조선의용대 활동 접고 임시정부 합류

[운암 김성숙 평전 25회] 결코 내키지 않았던 임시정부에 참여하면서, 관내지역 독립운동에서 조국광복운동의 중심부에 자리잡는다

등록 2019.08.24 17:57수정 2019.08.24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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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표의 김성숙 선생수형기록표의 김성숙 선생 ⓒ (사)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

김성숙이 계림에서 조선의용대 활동에 열정을 바치고 있을 즈음 내외 정세는 크게 요동치고 있었다.

1939년 5월 중국 국민당정부가 우파의 김구와 좌파의 김원봉을 함께 초치하여 한국독립운동 진영의 통합을 요청하였다. 

이에 따라 김구와 김원봉은 회동 후 「동지ㆍ동포 제군에게 보내는 공개통신」을 공표하면서 좌우 통합운동이 제기되었다. 독립운동진영의 통합은 오랜 숙원이었다.

중국정부의 요청이 아니라도 독립운동가들은 국제정세의 변화 즉 1938년 8월 독일과 소련이 불가침조약을 체결하는 등 국제사회는 제국주의 열강의 패권다툼으로 세계대전이라는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머지않아 일본이 독일ㆍ이탈리아와 주축국동맹관계를 맺게 될 것이란 예측이 나돌았다.

김성숙이 계림을 떠난 것은 1939년 4월 하순이다. 좌파진영의 통합과 임시정부가 머물고 있는 치장(基江)에서 개최되는 한국혁명운동 통일7단체회의(7당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비록 3개월의 짧은 기간이지만 계림에서 조선의용대의 창설에 많은 기여를 하고,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따라 보다 큰 그림을 그리고자 이곳을 떠났다. 이후 그는 결코 내키지 않았던 임시정부에 참여하면서, 관내지역 독립운동에서 조국광복운동의 중심부에 자리잡는다.

김성숙의 1920년대 독립운동을 연구한 학자는 이 시기 그의 활동상을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요컨대,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김성숙은 관내지역 독립운동진영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가장 뛰어난 이론가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1930년대 전반기 광주봉기의 실패 이후 저술활동에 몰두하면서 새로운 길을 모색한 결과 계급보다는 민족을 우선하는 노선으로 나아감으로써 정통 공산주의와는 다른 행로를 보였다.

또한 이 시기 그가 보여준 인물 유형은 투사형이나 비밀활동가에서 전형적인 이론가, 정치가로 변모하고 있었다. 그는 소수파의 독자성과 목소리를 대변하는 민족통일전선노선을 추진하는 동시에 각 단체 간의 연합을 주선하고 중재하는 정치가의 면모를 보여주었던 것이다. (주석 1)


조선의용대 활동을 접고 기장→충칭의 초기 그의 활동상을 『연보』는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1939. 8. 기강에서 개최된 한국혁명운동 통일7단체회의에 조선민족해방동맹 대표로 참석하다.
 ※ 1939년 말 7당통일회의가 결렬되고, 다음해 5월 임정옹호 세력이 '통합' 한국독립당을 창당하는 시기를 전후하여 김성숙은 중경으로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1941. 11. 1  「조선민족해방동맹재건선언」을 발표하다.
1942. 1. 22 임정 제22차 국무회의에서 김규광(김성숙)ㆍ박건웅ㆍ호건ㆍ김윤택 4인을 선전위원으로 선임하다.
1942. 1. 26  임정 국무회의에서 내무부장 천거로 3ㆍ1절기념준비위원으로 차리석ㆍ윤기섭ㆍ엄항섭ㆍ최석순ㆍ김규광(김성숙)ㆍ김관오ㆍ박건웅ㆍ안원생을 선임하다.
※ 3ㆍ1절 기념준비위원회는 윤기섭을 주석으로 선출, 총무조, 의식조ㆍ선전조의 3개조를 편성하였는데 김성숙은 선전조 주임으로 선임되다.             
※ 1942년 현 임직원 명단 ㅡ 김규광(김성숙)은 선전위원 겸 편집부 주임.
1942. 12. 24 부인 두군혜 대한민국임시정부 외무부 부원으로 선임되다.
1942. 12. 25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무부 차장으로 선임, 신익희 외무부 차장, 윤기섭 군무부 차장, 이현수 법무부 차장, 신환 재무부 차장, 김철남 교통부 차장, 유흥식 학무부 차장으로 각각 선임되다.
1943.  1. 5  최동오ㆍ박찬익과 함께 대한민국임시정부 외무부 외교연구원회 외교위원 선임되다.
1943. 3. 30 두군혜 대한민국임시정부 외무부 과원(科員)으로 선임되다.

'연보'에서 보이듯이 김성숙은 초기에는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이나 의정원 의원에 선임되지 못하고 위원회의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동안 임정과는 대치되는 사회주의계열이어서 였을 것이다.

그 대신 부인 두군혜도 임시정부에 참여함으로써, 흔치 않는 부부 독립운동가의 모습을 보였다. 저우언라이(朱恩來)의 소개로 김성숙과 결혼하고 한국독립운동에 기여한 부인 두군혜의 행적을 약술한다.

1929년 저우언라이의 소개로 김성숙과 상해에서 결혼, 본격적으로 독립운동 참여.
1930년 좌익작가연맹에 가입.
1931년 부녀자 문제를 마르크스 사상에 기초를 두고 연구, 2차 국공합작으로 항일전쟁 참가, 남편 김성숙과 『사회과학사전』, 『부녀자문제 강의』 출판.
1934년 심자구가 만드는 상해의 『신보』의 『부녀원지』에 진보적인 논문을 써서, 어두운 시기에 병폐를 폭로하여 여성의 권익을 옹호.
1935년 「상해문화계구국운동선언(上海文化界救國運動宣言)」발표, 상해여성구국회에 가입, 중국 여성계 항일구국운동에 참여.
1938년 우한에서 조직을 갖고 어린이보육회 상무이사 역임, 제7보육원 설립, 원장 역임.
1943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외무부 부원 등으로 활동.
1944년 충칭에서 『직업 여성』을 출간, 편집장 역임.
1945년 한국구제총회 이사 역임, 중국여성친목협회 상무.
1949년 베이징시 여자중학교 제2중학교 및 제6중학교 교장 역임.
1951년 제1회 전국여성연합 후보위원에 당선, 중화인민공화국 8대 대표.
1955년 제4대 광역시 정협위원회 상무위원회 위원.
1981년 2월 중국 북경에서 별세.
2016년 제71주기 광복절 '건국훈장 애국장' 포상.(주석 2)


주석
1> 김광재, 앞의 책, 94쪽.
2> 사단법인 운암 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 자료.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운암 김성숙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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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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