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고로 거듭난 김원봉·소녀상... "독립운동 세계에 알리고파"

[인터뷰] '독립운동 프로젝트' 브릭 사진가 이제형씨 "손석희·김어준 등 실존인물도 만들 것"

등록 2019.08.26 18:43수정 2019.08.26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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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독립운동 활동을 레고 사진으로 재현하는 '독립운동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 브릭 사진가 이제형 ⓒ 이제형

 
키 5cm도 안 되는 미니 피규어(인형)에 생명을 불어넣는 사람이 있다. 한국을 대표하는 브릭 사진가 이제형(45)씨가 그 주인공이다.

본업은 특수 교량을 설계하는 엔지니어지만, 지난 9년 동안 레고 브릭으로 연출한 사진 작품 700여 편을 SNS에 올려, 한국뿐 아니라 외국 브릭 애호가들 사이에도 많이 알려졌다. SNS에서 '장군운전병' 아이디로 활동해온 이씨의 인스타그램 팔로어(구독자) 1만8천여 명도 대부분 외국인들이다.

이씨는 그동안 '레고 스타워즈' 시리즈에서 제국군 말단 병사인 '스톰트루퍼'를 주인공으로 한 다양한 에피소드와 영화 포스터 재현으로 화제를 모았지만, 요즘 우리나라 독립운동가들의 활약상을 외국에 알리는 일에 푹 빠져 있다.

레고나 옥스포드 같은 브릭 제품을 활용해 독창적인 피규어나 디오라마(축소 모형)를 창조하는 브릭 아티스트들은 많지만, 이씨의 작품 활동이 더 특별해 보이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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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릭 사진가 이제형의 3.1운동과 건국100주년 기념 독립운동 프로젝트 1탄 유관순 열사와 3.1 독립운동 ⓒ 이제형

  
이제형씨는 지난 3월 1일 '유관순 열사와 3.1 독립운동'을 시작으로, '3.1운동과 건국 100주년 기념 독립운동 프로젝트' 작품을 선보였다. 이씨는 지금까지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를 비롯해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의거,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 전투 등 15편을 발표했다. 이 가운데는 재평가 논쟁이 한창인 의열단 단장 약산 김원봉과 일본에서 전시 중단 논란이 벌어진 '평화의 소녀상'도 포함돼 있다.

단순한 취미로 출발한 브릭 사진이 어쩌다 독립운동 프로젝트까지 이어졌을까? 지금은 본업 때문에 정신없는 이제형씨를 지난 22일 낮 서울 강남구 역삼동 한 카페에서 점심시간을 이용해 만났다.

아날로그 감성 간직한 교량설계 엔지니어, 브릭 아트에 빠지다

이씨는 지난 2010년부터 레고 스타워즈로 비하인드 스토리를 만들어 사진으로 찍는 작업을 9년째 하고 있다. 아이와 함께 레고를 갖고 놀다 취미 삼아 시작한 일이지만 지난 2014년부터 수차례 브릭 사진전을 여는 등 나름 독보적 영역을 구축했다. 특히 제국군 병사들이 사막에서 캠핑하는 모습을 담은 작품은 영국에서 출판한 브릭 사진집에 실리기도 했다.


다른 브릭 사진가들과 달리 이씨는 브릭 사진을 찍을 때 가급적 컴퓨터그래픽(CG) 작업을 하지 않고 배경부터 특수효과까지 실제 연출을 고집하고 있다.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 장면에서 바닥에 깔리는 연기도 드라이아이스를 이용해 연출한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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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릭 사진가 이제형의 3.1운동과 건국100주년 기념 독립운동 프로젝트 2탄 안중근 의사와 하얼빈 의거 ⓒ 이제형

  
"중학생 때부터 사진을 30년 가까이 찍었다. 필름카메라 쓰다 디지털화 되면서 편리한 것도 있지만 요즘 포토샵 보정이 너무 심하다. 처음 찍는 대상 자체는 실제여야 한다고 생각해 안중근 의사 의거 장면에서 연기 효과를 만들려고 드라이아이스 한 상자를 주문했다. 처음엔 너무 많아서 다 못쓸 줄 알았는데, 여러 차례 반복하다보니 다 쓰고 겨우 사진 한 컷 건졌다. '베스트 컷'이 나오려면 수십 장에서 100장 가까이 찍는다. (CG가 아니라는 걸) 별로 알아봐주는 사람이 없어 (실제 연출하는) 제작 과정을 꼭 증거 사진으로 남긴다.(웃음)

요즘엔 배경에 그린스크린을 쳐서 CG로 처리하는 분들도 많은데 난 포토샵 작업은 최소화하고 배경도 옛날 할리우드 영화 제작 방식으로 직접 만들어 넣는다. 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 장면에서도 배경을 디지털하면 쉽게 할 수 있는데, 기차역 배경이 중요해 100만 원 정도 하는 절판된 증기기관차를 중고로 겨우 구입했다. 한 컷 찍는데 1주일 정도 예상했는데, 기차와 드라이아이스 주문하고 기다리느라 한 달 정도 걸렸다."

- 특수교량 설계 엔지니어란 본업과 브릭 사진 사이에는 어떤 연관성이 있나.
"토목공학을 전공했는데, 공과대학에서도 토목 전공하는 사람들은 특히 레고를 좋아한다. 브릭이 딱딱 맞아 떨어지는 느낌도 좋고,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과정 자체가 토목과 비슷하다. 특수교량도 매번 다른 형태로 설계하는데, 레고도 설명서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창조하는 매력이 일맥상통한다."

실제 토목 설계에서도 레고 디오라마와 유사한 목업(mock-up 모형) 작업이 일상적이다. 이씨도 지난해 7월 개통된 레고랜드 진입 교량(춘천대교) 설계 작업에 참여해 레고 애호가로서 원형 주탑 설계 등에 아이디어를 보태기도 했다.

"미리 촬영한 남북정상회담 장면, 실제 모습과 비슷해 소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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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5월 청와대 사랑채에서 열린 문재인 대통령 취임 1년 기념사진전에 전시된 브릭 사진가 이제형의 4.27 남북정상회담 사진 ⓒ 이제형

 
이제형씨의 작업이 브릭 애호가들뿐 아니라 일반인에게도 알려진 계기는 지난해 5월 청와대 사랑채에서 열린 문재인 정부 1주년 기념 사진전이었다. 당시 이씨는 남북정상회담, 북미정상회담 등 문재인 정부의 '결정적 순간' 12장면을 레고로 표현한 사진 작품을 전시해 화제가 됐다.

- 현직 대통령 활동을 다루는 게 부담스러웠을 텐데, 어떻게 전시에 참여하게 됐나.
"청와대 행정관이 먼저 연락했다. 문재인 정부 1주년을 맞아 어린이나 학생들을 위해 레고로 만든 결정적 순간 12컷을 같이 전시하고 싶다고 했는데, 개인적으로 큰 영광이었고 꼭 하고 싶었다. 촛불정국 때 박근혜와 최순실을 풍자한 브릭 사진을 SNS에 올린 적이 있는데 그게 연결고리가 된 것 같다.

남북정상회담 사진이 가장 힘들었는데, 사진 작업은 지난해 4월 초에 했지만 남북정상회담은 그해 4월 27일에 열려 아직 일어나지 않는 장면을 연출해야 했다. 그때는 보안 때문에 몰랐는데 판문점에서 두 정상이 만나 T2, T3 사이 군사분계선을 넘을 거라고 예상하고 먼저 촬영했는데, 실제 정상회담 장면과 비슷해 소름이 돋았다. 원래 양 정상 모습도 넣으려고 했는데 북측에서 김정은 인형을 만드는 걸 원치 않을 거라고 해 급히 두 정상을 닮은 JSA(공동경비구역) 병사 둘이 악수하는 걸로 바꿨다. 온갖 아이디어를 짜내서 작업한 거라 뿌듯했다."

이씨는 지난 7월 남·북·미 3국 정상이 판문점에서 만나 셀카를 찍는 가상 장면을 연출해 SNS에 올려 1년 전 두 정상 모습을 넣지 못한 아쉬움을 달랬다.

- 독립운동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지난해 10월 사진전을 마치고 바로 기획했다. 지난해 청와대 사진전과 캐논갤러리 단독 사진전으로 대단한 한해를 보냈다. 취미 사진으로 이룰 수 있는 건 다했으니 뭔가 보람 있고 뜻있는 작업을 하고 싶었다. 독립운동 프로젝트를 반대하는 사람도 많을 것 같고, 특히 약산 김원봉 작업의 경우 욕을 먹을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3.1운동 100주년인 올해가 아니면 다시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지난해 12월부터 작업을 준비해서 올해 4, 5월까지 거의 촬영을 끝냈고 지금도 조금씩 진행하고 있다."

지금까지 이씨가 주로 작업한 스타워즈나 영화 포스터 같은 '픽션'과 달리 독립운동 프로젝트는 실존 인물과 역사 속 한 장면을 다루는 일이라 역사 고증이 쉽지 않다. 하지만 이씨는 윤봉길 의사가 훙커우 공원에서 던진 수통 폭탄 같은 소품 하나하나까지 섬세하게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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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릭 사진가 이제형의 3.1운동과 건국100주년 기념 독립운동 프로젝트 5탄 윤봉길 의사와 훙커우 의거 ⓒ 이제형

  
"작업을 진행하면서 공부를 많이 하게 됐다. 나도 그동안 윤봉길 의사가 도시락 폭탄을 던졌다고 알고 있었는데, 실제 던진 건 수통 폭탄이란 사실을 알게 됐다. 사진 작업 한 달 전부터 작품 콘셉트와 캐릭터 포즈를 잡고 필요한 부품도 미리 해외에 주문했다. 준비 과정에서 인터넷에서 관련 자료를 찾아보고 여러 곳 자료를 비교해 누가 봐도 뭐라고 안 하겠다고 싶을 정도로 고증을 거쳤다."

올해 전시회 목표... "외국인들에게 독립운동 알리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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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릭 사진가 이제형의 3.1운동과 건국100주년 기념 독립운동 프로젝트 3탄 '의열단 단장, 약산 김원봉' ⓒ 이제형

  
- 약산 김원봉 작품을 발표했을 때 항의하는 사람은 없었나.
"항의가 많았다. 빨갱이란 얘기도 많이 들었다. 정말 신기한 건, 정치적인 것도 아니고 독립운동가 사진을 올렸을 뿐인데도 SNS 팔로어(구독자)가 뚝뚝 떨어져 나갔다. 외국 사람도 있지만 한국 사람들도 떨어져 나가는 걸 느꼈다. 블로그에서도 독립운동가 사진에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김원봉도 재평가돼야 하는 인물인데 정치적으로 보는 분들이 많다.

가끔 힘이 빠지기도 했지만 응원해주는 사람들도 많아 큰 힘이 된다. '평화의 소녀상'의 경우, 우스꽝스런 레고로 표현하는 게 오히려 소녀상을 모독하는 행위라고 항의하는 분도 있었지만 다른 회원들이 대신 나서 작품 취지를 설명하고 옹호해줘 해소됐다. 소개 글을 영어로 번역해서 외국인에게도 우리 독립운동을 알리려고 노력하고 있다. 평화의 소녀상은 인스타그램에서 외국인들에게 반응이 좋았는데 특히 동남아시아 쪽 분들도 이 문제를 잘 알고 있고, 서구인들도 댓글을 많이 달았다."

이씨의 이같은 노력 덕분에, 독립운동 프로젝트는 지난 6월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위원회'에서 진행하는 '국민참여 기념사업'으로 선정돼 인증서를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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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릭 사진가 이제형의 3.1운동과 건국100주년 기념 독립운동 프로젝트 4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 이제형

  
- 지금까지 독립운동 프로젝트 가운데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은 무엇인가?
"반응은 안중근 의사가 가장 좋았지만 가장 사연이 많은 건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사진이다. 지난 2017년 임시정부 방문 사진(왼쪽)은 문재인 정부 1주년 사진전에 전시됐던 사진인데, 언젠가는 1945년 환국 당시 기념사진(오른쪽)을 꼭 찍어야지 생각하다 이번에 작업해 가장 애착이 간다. 작업하면서 가장 재밌었던 건 의열단 김상옥 의사의 공중 총격전 사진이다. 지붕 위를 타고 넘는 장면이 호쾌하고 그림도 멋있을 것 같았다. 우리가 수동적으로만 독립운동한 게 아니란 걸 얘기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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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릭 사진가 이제형의 3.1운동과 건국100주년 기념 독립운동 프로젝트 8탄 홍범도 장군과 봉오동 전투 ⓒ 이제형

  
- 얼마 전 영화 <봉오동 전투>도 개봉했는데 홍범도 장군 사진과 시기가 잘 맞아 떨어졌다.
"홍범도 장군 캐릭터를 만들 때 공을 가장 많이 들였다. 군복과 모자, 총집도 에폭시 퍼티로 직접 만들었다. 귀마개를 모자 위로 올린 러시아식 모자와 러시아식 군복, 레닌에게 받은 권총과 권총집도 포인트다. 인형이 작고 부품은 더 작은데 노안이 와 돋보기로 보면서 만드느라 힘들었다.(웃음). 원형을 제작하는 데 2~3시간, 굳는 데만 10시간, 깎아내고 색칠까지 꼬박 24시간 정도 걸렸다."

이씨는 브릭 피규어나 디오라마를 직접 제작하기보다 기성 제품을 활용한 사진 작업에 초점을 맞춰왔지만, 마땅한 기성 제품이 없으면 직접 수작업으로 만들기도 한다. 독립운동가들이 입고 있는 의상이나 소품 역시 기성 제품을 구하기 쉽지 않아 상당 부분 에폭시 퍼티 작업으로 손수 제작했다.

- 모든 캐릭터나 배경을 직접 만드나?
"100% 내가 만든 건 아니고 비슷한 부품을 해외에서 주문하는 경우도 있다. 독립군은 당시 중국 군벌 군대 옷을 많이 입었는데 중국 제품 가운데 국민당 군대 피규어를 찾아서 고증에 근접하게 만들었다. 하얼빈 역 러시아 의장대 모자는 영국 근위대 털모자와 닮아 사용했고 코트도 다른 데서 차용해 비슷하게 만들었다. 정미의병과 민영환 열사는 대전에서 활동하는 권혁직 작가 피규어를 보고 너무 찍고 싶어 작업을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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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릭 사진가 이제형의 3.1운동과 건국100주년 기념 독립운동 프로젝트 9탄 의열단 김상옥 의사 ⓒ 이제형

  
- 촬영을 마친 뒤 직접 제작한 피규어나 배경은 계속 보존하나.
"거의 다 해체한다. 10년 동안 만든 게 600~700편이나 되는데 집에 다 보관할 수 없다. 힘들게 만들었던 건 다시 사진 보고 만들 수 있게 흔적을 남겨둔다. 몇 개는 사진전을 위해 남겨두는데 독립운동가 시리즈는 지금 1/3 정도 갖고 있다. 김상옥 의사 의거 장면에 등장한 한옥과 안중근 의거 장면에 사용한 기차, 독립운동가 13분 캐릭터도 상자에 잘 모셔두고 있다. 중요한 캐릭터가 아니면 해체하고 다시 조합해 만들 수 있는 것도 레고의 매력이다."

애초 이씨는 광복절인 8월 15일 이전까지 독립운동 프로젝트를 모두 끝낼 계획이었지만, '평화의 소녀상' 이후에도 앞으로 추가 작품을 더 낼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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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릭 사진가 이제형의 3.1운동과 건국100주년 기념 독립운동 프로젝트 15탄 평화의 소녀상 ⓒ 이제형

 

"김구 선생과 이육사 시인, 도산 안창호 선생 작업을 마치고 포스팅을 준비하고 있다. 10월 25일 독도의 날에 맞춰 안용복 장군과 경찰 독도경비대 작업으로 마무리할 계획이다. 독립운동 프로젝트 이후에는 손석희, 김어준 같은 실존 인물 작품도 만들어 선물하고, 평소 좋아하는 외국 아티스트 작업도 해보고 싶다. 세월호도 지난해 구상만 하고 촬영하진 못했는데 내년 4월 이전에 꼭 만들어 포스팅할 생각이다."

- 앞으로 독립운동 프로젝트를 전시할 계획은 있나?
"올해 초 강남 갤러리에서 전시하려고 했는데 조건이 잘 안 맞아 결렬됐다. 가급적 무료 전시회를 열고 싶고 20편 정도를 전시할 수 있는 여유 있는 공간을 찾고 있다. 3.1운동 100주년인 올해가 가기 전에 전시했으면 좋겠다."
#브릭사진가 #독립운동프로젝트 #이제형 #김원봉 #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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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사회부에서 팩트체크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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