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실한 첩보활동... 양승태의 '요원'이 된 판사들

[사법농단] 이규진 전 대법원 양형실장 업무수첩에 담긴 지시-복종관계

등록 2019.08.27 13:54수정 2019.08.27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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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을 받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23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공판에 출석하며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 연합뉴스

   
쿠바를 둘러싸고 미국과 스페인이 대립하던 19세기 말, 매킨리 미국 대통령은 전쟁의 승리를 위해 쿠바의 반군 지도자 가르시아 장군을 찾아야 했다. 소재에 대한 아무 정보도 없었으나 묵묵히 명령을 따라 쿠바로 향한 로완 중위는 결국 그를 찾아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상부 지시에 불평하지 않고 질문 하나 없이 완수한 로완 중위를 법관의 덕목을 말하는 여러 자리에서 예시로 들었다.

22일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합의32부(부장판사 윤종섭) 심리로 열린 이규진 전 대법원 양형실장(고등법원 부장판사), 이민걸 서울고법 부장판사, 방창현 대전지법 부장판사, 심상철 전 서울고법원장 재판은 '양승태의 로완 중위'들이 모인 자리였다. 특히 이날은 이규진 전 양형실장이 주도한 양승태 대법원의 헌법재판소 견제활동 관련 증거가 법정에서 공개됐다.

그들은 자신이 성실하다 생각했다

2015년 5월 25일, 이 전 양형실장은 업무수첩에 '大(대) 연구원-정보역할 신중'이라고 적었다. 헌재 파견법관들이 제역할을 해야 한다며 민감한 사건의 진행상황을 미리 확인해 한정위헌 결정을 막아야 한다던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당시 지시사항이었다.

한정위헌은 2014년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10조를 '해 진 후부터 24시까지 시위를 금지한다'고 해석하면 위헌이라던 것처럼 특정 방향으로 법률을 해석하는 것은 위헌이라는 결정이다. 그런데 대법원은 법률해석의 최종 기관은 법원이라며 헌재가 한정위헌 결정을 내리더라도 법원이 반드시 따라야 하지 않는다(기속력 없음)고 봐왔다. 대법원과 헌재의 오랜 경쟁, '최고 사법기관은 어디인가'에서 한정위헌은 대표 쟁점이었다. 

양 전 대법원장은 '정보수집 등으로 이 문제에 선제적 대응을 하라'고 지시한 셈이었다. 그는 2015년 7월 '헌재가 적극적으로 나올 시기가 도래한다, 비상적·극단적 대처수단을 강구하라'고도 지시했다. '로완 중위' 이규진 전 양형실장은 그 내용을 업무수첩에 잘 정리해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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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행정권 남용으로 재판에 넘겨진 이규진 전 대법원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이 22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두 번째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 연합뉴스


로완 중위들은 성실했다. 2015년 3월 2일 박병대 당시 차장은 이규진 전 양형실장에게 '헌법 관련 업무 보고'를 받으며 '헌재 정보를 입수하는 데에 파견 법관을 활용하되 적극적이고 융통성 있는 사람을 물색하라'고 지시했다. 물색 결과 '낙점' 받은 최희준 부장판사는 헌재 재판관들의 평의, 헌재 내부 보고서 등을 착실히 입수했고 이 전 양형실장에게 전달했다.

그들의 활동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심판 때 더욱 활발해졌다. 이날 검찰이 공개한 최희준 판사의 검찰 피의자신문조서에 따르면, 국정농단이 드러난 직후인 2016년 11월 탄핵심판에 관심을 가진 양승태 대법원은 최 판사에게 관련 자료를 요구했다.

이후 최 부장판사는 박한철 당시 헌재소장용으로 만들어진 보고서 등을 이규진 전 양형실장에게 전달했다. 심판이 시작되자 그는 내부 동향은 물론 탄핵심판 자체의 정보를 수집했고, '비선실세' 최순실씨의 실체를 폭로한 고영태씨 관련 녹취파일까지 챙겨 이메일로 보냈다. 이 전 실장은 최 부장판사가 수집한 자료들을 정리해 업무일지에 기재해뒀다.

성실한 첩보활동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을 위한 것이었다. 법원행정처는 최 부장판사가 보낸 정보들을 바탕으로 탄핵심판 관련 헌재동향 대비문건을 작성, 대법원장 보고용과 대법관들 배포용으로 나눠서 만들었다. 이밖에 최 부장판사가 수집한 헌재 관련 정보들은 당시 법원행정처 차장, 박병대 전 대법관이 주재한 실장회의 안건으로 다뤄졌다.

'권한이 없었다'며 항변하지만... "법관 독립 유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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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평등 정의'가 새겨진 서울 서초구 대법원 청사. ⓒ 권우성

 
이규진 전 양형실장은 사실관계 자체는 인정한다. 다만 양 전 대법원장과 박 전 대법관 등 윗선 지시들을 최희준 부장판사에게 전달했을 뿐이며 자신은 최 부장판사에게 상세한 업무지시를 내리고 감독할 권한이 없었으니 '직권을 남용했다'는 혐의가 성립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의 변호인은 22일 "쟁점은 상급자들이 헌재 파견에 어떤 직권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어떻게 남용했는지가 핵심"이라며 "이규진 피고인이 자료 요청한 것을 직권남용으로 볼 수 없다, 그가 어떤 직권을 가지고 있었고 어떤 방법으로 남용했는지가 명백히 확인돼야 한다"고 했다. 

또 "다른 기관에 파견한 직원을 이용해서 그 기관 정보를 확인하고 습득하는 것은 어느 공공기관에서나 이뤄진다"며 "피고인도 이 부분이 법에 위배된다고 판단하지 않았고, 최희준 부장판사도 들은 것을 전달했을 뿐"이라고 반박했다. 

검찰은 사법농단을 "처벌 필요성이 있는 헌법 침해 사건"으로 규정한 뒤 "공무원이 자기가 속한 조직의 위상강화 등 사적 가치를 중심으로 했다는 것이 직권남용죄가 대응하고 예정한 사안"이라고 재반박했다. 이어 "피고인들은 자신들의 행위가 부적절하고 법관에게 허용되지 않은 것을 모르지 않는다"며 "법관의 독립을 유린한 행위를 변호하려는 주장을 하면 안 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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