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주, 주민들이 대량 학살 암매장된 현장에서 시신을 파내고 있다(1950. 9. 29). ⓒ NARA
국군과 유엔군은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종료 바로 다음날인 9월 16일 오전 9시부터 낙동강 방어선에서 일대 반격을 시작했다. 이는 인천상륙부대와 함께 남하한 인민군을 협공하기 위해서였다. 먼저 국군·유엔군은 인민군의 방어선을 톨파한 후 경부축선을 따라 진격해 인천상륙 부대와 연결할 계획이었다.
당시 국군과 유엔군의 병력은 15만8000여 명으로 인민군의 2배 이상을 웃돌았고, 야포 등 중화기 화력은 10배 이상 앞섰다. 게다가 미군의 일방적인 제공권과 제해권까지 고려한다면 쌍방의 전력 차는 매우 컸다. 하지만 닉동강 지역의 인민군은 그때까지 인천상륙작전 소식을 잘 모르고 있었기에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9월 23일에야 인민군은 모든 전선에서 후퇴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국군과 유엔군은 사흘 후인 9월 26일 오후 10시 30분에야 오산 북방에서 인천상륙부대와 조우할 수 있었다.
이번 회는 국군과 유엔군의 서울 수복 때 사진 중심으로 엮었다.
(* 기자의 기억력 한계로 일부 사진은 이미 연재된 사진들과 겹칠 수 있음을 밝힙니다.)
▲ 인천 상륙작전으로 전열을 가다듬은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 전선에서 북상하고 있다. 신작로 옆에는 인민군 탱크가 불타고 있다.(1950. 9.). ⓒ NARA
▲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맥아더 원수 일행이 생포한 포로들을 시찰하고 있다(1950. 9.). ⓒ NARA
▲ 서울 수복 전날의 중앙청, 광장 국기 게양대에 인공기가 걸려 있다(1950. 9. 27.). ⓒ NARA
▲ 인천 월미도(1950. 9. 27.). ⓒ NARA
▲ 서울 탈환하고자 지나가는 유엔군을 환영하는 경인가도의 주민들(1950. 9. 27.). ⓒ NARA
▲ 인천 월미도 인민군 진지(1950. 9. 27.). ⓒ NARA
▲ 전란으로 폐허가 된 대전 시가지(1950. 9. 29.). ⓒ NARA
▲ 인천상륙작전 뒤 바닷가에 정박한 유엔군 함정들(1950. 9.) ⓒ NARA
▲ 전주, 대량 학살된 시신들(1950. 9. 30.).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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