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홧발이 밟고 지나간 곳, 처참하게 희생된 사람들

[박도 기자의 NARA 앨범 ⑫] 1950년 9월의 전란 현장 Ⅲ

등록 2019.09.03 12:13수정 2019.09.03 12:13
0
원고료로 응원

전주, 주민들이 대량 학살 암매장된 현장에서 시신을 파내고 있다(1950. 9. 29). ⓒ NARA

   
국군과 유엔군은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종료 바로 다음날인 9월 16일 오전 9시부터 낙동강 방어선에서 일대 반격을 시작했다. 이는 인천상륙부대와 함께 남하한 인민군을 협공하기 위해서였다. 먼저 국군·유엔군은 인민군의 방어선을 톨파한 후 경부축선을 따라 진격해 인천상륙 부대와 연결할 계획이었다.

당시 국군과 유엔군의 병력은 15만8000여 명으로 인민군의 2배 이상을 웃돌았고, 야포 등 중화기 화력은 10배 이상 앞섰다. 게다가 미군의 일방적인 제공권과 제해권까지 고려한다면 쌍방의 전력 차는 매우 컸다. 하지만 닉동강 지역의 인민군은 그때까지 인천상륙작전 소식을 잘 모르고 있었기에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9월 23일에야 인민군은 모든 전선에서 후퇴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국군과 유엔군은 사흘 후인 9월 26일 오후 10시 30분에야 오산 북방에서 인천상륙부대와 조우할 수 있었다.

이번 회는 국군과 유엔군의 서울 수복 때 사진 중심으로 엮었다.

(* 기자의 기억력 한계로 일부 사진은 이미 연재된 사진들과 겹칠 수 있음을 밝힙니다.)
 

인천 상륙작전으로 전열을 가다듬은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 전선에서 북상하고 있다. 신작로 옆에는 인민군 탱크가 불타고 있다.(1950. 9.). ⓒ NARA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맥아더 원수 일행이 생포한 포로들을 시찰하고 있다(1950. 9.). ⓒ NARA

     

서울 수복 전날의 중앙청, 광장 국기 게양대에 인공기가 걸려 있다(1950. 9. 27.). ⓒ NARA

  

인천 월미도(1950. 9. 27.). ⓒ NARA

  

서울 탈환하고자 지나가는 유엔군을 환영하는 경인가도의 주민들(1950. 9. 27.). ⓒ NARA

  

인천 월미도 인민군 진지(1950. 9. 27.). ⓒ NARA

             

전란으로 폐허가 된 대전 시가지(1950. 9. 29.). ⓒ NARA

 

인천상륙작전 뒤 바닷가에 정박한 유엔군 함정들(1950. 9.) ⓒ NARA

  

전주, 대량 학살된 시신들(1950. 9. 30.). ⓒ NARA

#NARA #한국전쟁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AD

AD

AD

인기기사

  1. 1 100만 해병전우회 "군 통수권" 언급하며 윤 대통령 압박
  2. 2 300만명이 매달 '월급 20만원'을 도둑맞고 있습니다
  3. 3 캐나다서 본 한국어 마스크 봉투... "수치스럽다"
  4. 4 시속 370km, 한국형 고속철도... '전국 2시간 생활권' 곧 온다
  5. 5 "일본정치가 큰 위험에 빠질 것 우려해..." 역대급 내부고발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