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요구에 비켜서지 않았던 재독 한인 가정 이야기

[재독 한인 민중운동사 ③] "민주화에 완성이란 없다"

등록 2019.08.29 13:27수정 2019.08.29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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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1970년대 우리 정부는 국내 실업난 해소와 외화 획득을 위해 광부와 간호원을 독일로 파견했다. 당시 우리나라는 극심한 실업문제를 겪고 있었고 이에 많은 청년들이 독일 취업 광부 및 간호원에 지원했다. 이들은 대부분 3년 계약직으로 광부로는 7900여 명, 간호원으로는 1만여 명이 독일로 이주했다. 이들은 '산업 역군'이라 불리며 이들의 경제적 가치에 집중해 평가됐다. 그러나 우리 사회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한 측면도 적지 않다. 이 연재에서는 1960·1970년대 독일로 간 간호원, 광부 중 국내외 사회문제 해결을 위해 시민운동에 참여한 이들, 혹은 이들과 관계맺고 있는 사람들을 차례로 인터뷰하여 소개한다. 이 연재를 통해 한국 이주사에서 재외 한인들의 사회참여운동 시작과 흐름을 짚어보려 한다. - 기자말

이한나씨는 어머니와 함께 1973년, 10년 동안 독일에서 공부하고 있던 아버지 이화선 목사가 있는 독일로 이주합니다. 가족이 함께 살기 위해 독일로 이주했지만, 이화선 목사의 아내 김순실 작가는 당시 아쉬운 마음도 있었습니다. 이화선 목사는 1972년 독일 프랑크프르트에서 박사학위를 취득 후 한국에서 당시에도 비교적 안정적 직업으로 평가받던 대학교 교수가 되려고 했습니다. 남편의 안정적인 직업과 한국에서 이루고자 했던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독일로 이주하는 것이 김순실 작가에게 쉬운 결정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독일에는 이화선 목사를 기다리던 이들이 있었습니다. 당시 이화선 목사는 한인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목회를 하고 있었고 이들은 이 목사가 독일에서 자신들을 위한 목회를 계속해주길 바라고 있었습니다. 김순실 작가의 개인적인 아쉬움은 독일에서 남편을 기다리는 한인 교우들의 바람을 외면할 만큼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19살이었던 이한나씨도 아버지 목회 활동에 필요했던 한글 타자기를 구입하여 타자학원에 다니며 독일로 이주할 준비를 했습니다.

가족이 함께 독일로 와 목회를 시작한 1970년대는 한국 현대사의 암흑기와도 같았던 시절이었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때문에 많은 일들이 한인 교회에 요구됐습니다. 교인들의 신앙적 성장 및 돌봄에 대한 역할은 물론이고 한인들이 문화적 차이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곳을 찾아다니며 도왔습니다. 또한 분단 이데올로기로 인해 인권을 침해당하는 사람들을 보호하고 도와주는 목회 활동도 하게 됩니다.

이한나씨는 1974년 3월 본(Bonn)지역에서 있었던 유신체제 반대 집회를 선명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한나씨는 독일에 이주할 때 가지고 온 한글타자기를 교회의 주보 뿐만 아니라 이때 성명서를 작성하는 데에도 활용했다고 얘기했습니다. 한국의 인권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이 집회에는 한인 유학생, 노동자 등이 참여했고 당시 발표한 성명서에 55명이 서명했습니다. 유신시절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 한인들의 민주화 요구 활동을 철저히 감시하며 보복하던 상황을 고려한다면 놀라운 서명 숫자였습니다.

이러한 활동을 펼쳐오던 라인·마인 한인교회는 고통받던 한인 노동자의 든든한 버팀목과 같은 존재였지만 한편으로는 '빨갱이 교회'라는 표현을 들을 정도로 오해에 기반한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한나씨는 독일에서 학업을 하며 한국의 민주화 문제에 관심을 갖는 지식인들과 연대했습니다. 당시 독일에는 68학생운동의 영향을 받아 사회 변혁 문제에 관심을 갖는 세대가 있었고 이 들 중 일부는 Korea Komitee(이후 '코리아 협의회'로 명칭 변경)라는 단체를 만들어 한국의 민주화 등 사회 문제 해결을 위해 공부하고 행동했습니다.


이후 1977년 한인 여성 노동자들의 이른바 송환 반대 서명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유류 파동 등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던 독일이 독일에서 일하던 외국인 노동자들을 본국으로 송환시키려했고 이에 반발한 한인 여성 노동자들이 서명운동을 일으킨 것입니다. 이 투쟁에 독일 전역에 있는 한인뿐만 아니라 독일 현지인들도 많이 호응해주었습니다. 당시 한인 여성 노동자에 대한 호의적 인식 덕분이었습니다.

이 투쟁을 계기로 1978년 '재독 한인 여성 모임'이 결성되었고 이한나씨는 이 단체에서 활동을 시작합니다. 1980년 5·18민주화운동과 계엄군의 잔인한 진압 과정을 독일 현지 TV 뉴스로 접하게 되었고 이한나씨를 비롯한 많은 한인들은 충격에 빠졌습니다. 당시 매일 밤 모여 광주의 진실을 알리는 Korea-Abend(한국의 밤) 등의 활동을 했습니다.

또한 독재 정권의 인권 탄압, 동일방직 사건, YH 사건 등 한국의 노동 문제에 대해 독일 현지에서 연대 투쟁을 이어갔습니다. 특히 광주 미 문화원 방화사건 등 한국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즉각 연대하는 모임 및 활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유럽에 거주하던 한인들은 1985년 독일에서 '갑오 대동제'를 열게 됩니다. 이 행사는 연극, 공연 등을 통해 유럽에 거주하는 한인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힘을 다지고 유럽 현지에 한국과 민주화운동을 알리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이한나씨도 연극 <금강>의 기획을 맡는 등 갑오 대동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독일의 오덴발트(Odenwald Höchst)지역에서 열린 이 행사는 기존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은 참석자들이 모이며 독일의 이름없던 조그만 휴양도시가 한인들로 꽉 찰 정도로 성황리에 진행됐습니다.
  

1985년 독일의 오덴발트(Odenwald Hochst)지역에서 열린 갑오 대동제. 지역신문에 난 기사 ⓒ 이한나

갑오 대동제 연극 <금강> 중 한 장면 ⓒ 이한나

이후에도 이한나씨 가족은 교회 중심으로 통일, 노동, 민주화 등 다양한 주제의 활동을 이어왔고 최근에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 세월호 참사, 탄핵 촛불 관련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이한나씨는 마지막으로 우리 사회의 '기본 질서'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이뤄져 그 가치 속에서 조화롭게 살 수 있길 바란다고 했습니다. 덧붙여 그는 '민주화에 완성이란 없으며 사람 사는 세상은 늘 변화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나는 이 가운데 나의 역할에 대해 늘 고민하며 행동해 왔다'고 말했습니다.

어머니 김순실 작가는 올해 87세의 나이로 고령이지만 생생한 기억력으로 자신과 가족들의 역사에 대해 증언했습니다. 우리 현대사가 이들에게 요구한 역할을 단 한순간도 비켜가지 않았던 이들의 역사는 한 편의 기사로 모두 담아낼 수 없었습니다. 여전히 부족하지만 현재 자연스럽게 누리고 있는 우리 사회 민주화에는 이들의 눈물과 땀이 배여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2017년 보훔(Bochum)에서 오월 민중제를 마치고 ⓒ 이한나

#이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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