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운동가는 왜 MBC 계약직 아나운서를 변호했나

[인터뷰]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 박진

등록 2019.09.01 11:17수정 2019.09.04 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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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수정 : 4일 오전 7시 3분]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 박진 ⓒ 안건모

 
수원에 있는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 박진씨. 올해 49살인데 23년을 인권운동가로 살았다. 촛불혁명으로 문재인 정부가 탄생했지만 약자의 인권을 무시하는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행태는 나아지지 않고 있다. 박진씨 같은 인권운동가가 없어서는 안 되는 이유다.

박진씨는 요즘 2018년에 해직자 신분이 된 MBC 계약직 아나운서 8명의 인권을 위해 싸우고 있다. 이들은 박근혜 정권 때인 2016~2017년 MBC 안광한·김장겸 전 사장 재직 중에 채용된 계약직 아나운서들이다. 그때, MBC는 언론이라고 차마 입에 담기도 어려웠던 '적폐 언론'이었다.

MBC 노동자들이 안광한·김장겸 전 사장을 몰아내기 위해 파업하기 직전, 공채 시험을 거치면서도 비정규직으로 채용돼 어쩔 수 없이 회사가 시키는 대로 방송해 시민들의 공분을 샀던 이들 계약직에게 관심을 갖는 시민단체와 활동가는 많지 않다. 오히려 '적폐 세력'이라고 비난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인권운동가 박진씨는 이명박‧박근혜가 만들어 놓은 차별의 굴레들을 가장 힘없는 사람들한테 돌리는 게 정말 정당한가 묻고 있다. 이들 이야기는 이 글 마지막에 하기로 하고 인권운동가 박진의 삶부터 되돌아본다.

어린 시절
 

샛별유치원 다닐 때의 박진씨. 어린 시절 이름은 박소영이었다. ⓒ 박소영

 
"아버지가 쌍용양회 강원도 영월 공장에 다녔어요. 저는 영월에서 태어났어요. 아버지가 쌍용그룹 본사에도 계셨다가 대구로 전근 가셨다가… 아마도 이 지방 저 지방 전근당한 거 보니까 회사에 입바른 소리를 많이 하신 거 같아요. 어머니도 그런 이야기를 얼핏 하시더라고. 니가 아빠 성격 똑 닮았다고."
      
박진은 어린 시절에 영월에서 서울로, 대구로 이사를 자주 다녔다. 학교를 자주 옮겨다닌 것 말고는 평범하게 살았다.

"우리 가족이 평범하게 살았다는 건 아버지가 정말 위대한 일을 하셨다는 걸 최근에야 깨달았어요. 왜냐면 제가 활동하면서 만나는 사람들 대부분이 평범한 삶이 깨진 사람들이거든요."

박진은 서울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다. 그리고 중학교 때는 아버지가 대구로 전근을 가서 온 가족이 모두 대구로 이사를 한다.


"중학교는 대구 동부여중을 다녔어요. 그리고 대구여고에 입학했는데 그 즈음 오빠가 서울에 있는 대학에 입학했어요. 87학번, 데모가 많았잖아요. 그러니까 어머니가 오빠 데모할까 봐 동생을 데리고 먼저 서울로 이사를 갔어요."

박진은 아버지와 둘이 대구에서 1년을 더 살다가 서울로 올라와 1990년에 서울영파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한다. 그리고 대학 시험에 한 번 떨어진 뒤, 다음해에 경기대 법대를 들어갔다.

"그 당시 <하버드 대학의 공부 벌레들>이라는 외화가 있었거든요. 킹스필드 교수가 법대생들과 토론하는 게 멋있었어요. 아, 법을 알게 되면 이 사회에 뭔가 기여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법대를 가고 싶었고 또 한편은 역사를 공부하고 싶었고요. 정의를 실현하는 삶을 살고 싶었는데, 그게 역사학을 공부한다거나 법학을 공부한다거나 그런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박진은 어려서부터 책을 많이 읽었다. 당시는 세계문학전집을 사는 게 유행이었다. 어머니가 사 온 세계문학전집을 다 읽었다. 그런데 박진이 처음으로 펑펑 울었던 책은 전집에 있는 책이 아니라 다른 책이었다.

"잉게 숄의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이었어요. 독일 나치 때 레지스탕스 운동하는 대학생들의 얘기예요. 결국 다 죽임을 당하는데 그거 보고 제가 펑펑 울었어요. 어떤 저항이라거나 사회에 대한 관심이라는 걸 처음 접했던 거 같아요. 최초로 사회과학 책을 읽은 거죠."

박진이 대학에 들어간 1991년은 노태우가 집권한 시기였다. 전두환 시절 학생과 시민들의 치열한 투쟁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했던 학생운동은 등록금 인상 반대 투쟁, 교내 강의실 학보 투쟁을 비롯한 학내 투쟁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저는 입학하자마자 과에 있는 학습 동아리만 들어갔어요. 그때 모든 대학생들이 다 본다는 <껍데기를 벗고서>,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철학에세이> 이런 책을 봤어요. 91년도가 민중 생존권 투쟁을 하다가 많은 사람들이 자결하고 그랬던 해잖아요. 그게 5월을 기점으로 폭발했는데…"

박진은 대학에 들어가면 뭔가 삶이 재미있어지고 그럴 것 같았는데 재미가 없었다. 수업을 빠지고 혼자 미사리에 놀러 가기도 했다. 그런데 1991년 4월 26일, 명지대학교 학생 강경대가 백골단 쇠파이프에 맞아 죽는 사건이 터졌다. 그 뒤로 4월 29일 전남대학교 학생 박승희가 강경대 사건 규탄 집회 중 분신했고, 이어서 5월 1일엔 안동대학교 학생 김영균, 5월 3일엔 가천대학교 학생 천세용, 5월 8일엔 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 5월 10일엔 노동자 윤용하 등이 잇따라 분신하여 이른바 '분신 정국'이 조성됐다.

"5월 들어가면서 사람이 죽기 시작했거든요. 그때 내 삶이 조금 바뀐 거 같아요. 강경대가 처음 쇠파이프에 맞아 죽었는데 '이건 뭐지?' 하면서 집회에 나가기 시작했고, 안양에서 구속돼 있던 박창수 열사가 의문의 상처를 입고 죽으면서 또 거기에 가게 됐어요. 동년배 아이가 죽었다는 충격도 있었고, 계속 사람들이 자살하는데 대학생들이 많았으니까 거기에 대한 의문이 있었고, 그래서 데모 나가기 시작했어요."

동년배 학생들이 죽어 가는데 숨기는커녕 세상에 발을 내딛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답답했던 삶에 재미가 없었는데 데모를 나가니 숨통이 트였다.

"최루탄 터지고 불바다 되는 현장에 있는 게 속이 후련했어요. 집회를 빠지는 건 양심에 꺼려진다는 마음이 들 때부터 제 인생이 바뀐 거 같아요. 집회를 빼놓지 않고 나갔고, 학생회 일도 하고 여름에 농활도 가고, 자연스럽게 운동권 학생의 삶으로 살기 시작했어요."

당시 경기대는 다수가 NL(민족 해방) 계열이었다. 그런데 박진이 다니는 법정대는 PD(민중 민주) 계열도 있었다. 데모를 같이 하면서 친하게 지내다가도 학생회 선거 때만 되면 갈라졌다.

"유물론 배울 일이 별로 없었죠. 맨날 PD 선배들이 NL들 무식하다고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러고 나서 노동자 계급 이야기를 하는데 무슨 이야기인지 못 알아듣겠어요. 동아리에선 맨날 역사 공부만 시켜 주는데 여기 오면 계급이 어쩌고저쩌고… 제가 그 겨울에 독서실을 끊어서 PD 선배들이 보는 책을 쌓아 놓고 봤어요. 내 무식하다는 소리는 세상에서 제일 싫은데 하는 마음으로.(웃음)

책에서 배운 게 많았던 거 같아요. 근데 역시 우리의 DNA를 결정한 것은 이론이 아니다. 어떤 선배랑 친하게 지냈냐에 따라 달라졌죠. 결국은 NL 선배들과 세미나 하고 그쪽 주장 따라 조국통일을 열망하는 청년학도로 살았어요."

 

박진씨 가족 사진 ⓒ 박진

 
박진은 데모하다 경찰에 잡혀 들어가 고초를 당한 적이 있다.

"두 번 잡혔는데 한번은 범민족대회 서울대회에서 잡혔어요. 우리 부모님이 보수적이고 엄하셨거든요. 심지어는 오빠가 데모할까 봐 전 가족이 아버지 혼자 두고 서울로 이주할 정도로 데모를 싫어하셨는데 딸이 데모를 하니까… 마침 잡혀간 경찰서가 집 근처 강동경찰서더라고. 경찰 아저씨들이 저희 엄마 아빠를 불러서… 방학 때 한동안 가택 연금당하고 그랬죠. 싹싹 빌고 수원 학교 밑에 있던 자취방 빼고. 통학하기 힘들다고 핑계 댔지만 실제로는 데모하기 위해서 자취방을 구했던 거죠.

그 사건 뒤로 자취도 못하게 했는데, 그러다 빌어서 다시 자취하고 몰래 데모 나가고 그러다가 한 번 더 잡혀서… 한총련 출범식이었나? 제가 3학년 때 93년 한총련 출범식 준비위 출범식을 했던 기억이 나요. 그때 어머니가 너무 화가 나서 집을 나가셨어요. 일주일 동안 연락도 안 되고, 저는 정말 집안에서 죄인이 돼서 처음으로 아버지한테 맞았어요. 저희 아버지가 그 연배지만 자식들을 때리는 분이 아니었거든요. 그런데 그때 처음으로 아버지한테 맞아 봤어요."


박진은 인생의 가장 큰 고난은 그때가 아니었나 회상한다.

"어머니가 제 침대에 칼을 꽂은 적이 있어요. 딱 꽂고 '죽자. 데모를 계속 할 거면 나하고 죽자.' 죽이라고, 그렇게 불효를 했다니까요. 내가."

결국 누가 옳았을까. 부모님은 지금도 여전히 자식을 걱정하지만 딸이 올바른 일을 한다는 걸 이젠 안다.

"심지어 대구 출신인 우리 어머니는 문빠가 됐어요. 제가 문 대통령을 욕하는 것도 싫어할 정도예요. 아버지는 제가 정치 학습을 많이 시켰죠. 이런 팟캐스트를 들어라, 이런 유튜브를 봐라. 저희 부모님들은 자식 사랑이 커서 자식이 잘되는 게 제일 중요한 일이에요. 지금은 많이 바뀌셔서 선거 때가 되면 저한테 물어요. 이번엔 누구를 찍어야 하냐, 어느 당을 찍어야 하냐? 물을 정도로…"

운동가로 살겠다

박진씨는 1995년에 대학을 졸업했다. 학생운동 출신들이 지역 활동이 막 시작되던 때였다. 박진씨는 수원사랑민주청년회라는 단체에 들어갔고, 작은 여행사에 취직했다. 청년회 활동을 열심히 했지만 늘 한구석이 부족했다.

"지역 활동을 제대로 하고 싶은데 전문성이 없으니까 한계가 있겠다 싶더라고요. 제가 법학과를 나왔으니까 전공을 살릴 수 있는 뭔가를 찾고 있었는데, 마침 그때 법무법인 다산에서 인권상담소 간사를 뽑는다고 하더라고요."
 

법무법인 다산은 1992년, 수원지방법원 근처에 김칠준 변호사와 김동균 변호사가 연 변호사 사무실이다. 두 사람은 인권 문제를 다루고자 변호사 사무실에 인권상담실을 열었다. 1996년에는 인권상담실을 인권상담소로 전환했고 아파트공동체 운동을 펼치고 수원인권영화제를 개최하면서 인권운동에 나선다.

"저는 1997년에 법무법인 다산에 간사로 들어왔죠. 그때는 다산 산하에 상담소가 있었고 상담소에서 다산으로 오는 노동 사건이나 인권 관련 사건들 소송을 같이 하는 구조였거든요. 인권 활동만 하는 게 아니라 실무자들이 법률사무소 사무장 역할을 했어요."

박진씨는 학교 다닐 때도 잘 하지 않았던 법률 공부를 그제서야 열심히 했다. 상담을 하려면 많은 걸 알아야 했다. 게다가 찾아오는 사람은 나이가 많은 남성 노동자분들인데 박진씨는 나이도 어렸다.

"그때 27살이었거든요. 근데 상담하러 찾아오는 분들은 나이가 많은 남성 노동자분들이에요. 말투에 나이 어린 여자를 우습게 본다고 생각되더라구요. 우습게 보이면 상담이 안 되니까 제가 무게를 잡고 아는 체해야 돼요."

박진씨는 갑자기 남성처럼 목소리를 낮게 깔고 "'오셨습니까?' 이래야 돼요"하면서 웃었다. 박진씨는 소송 실무는 별로 재미가 없었고 인권에 관심이 많았다.

"인권 영화제라든가 인권 교육 같은 별도의 사업을 하게 된 거죠. 인권 교육은 1998년부터 공부했고, 교육을 하기도 했어요. 인권운동사랑방에서 인권 교육팀도 만들고 워크숍도 많이 했거든요."

박진씨는 징계, 해고, 산재 사건, 민사소송 상담 등 일상적인 법률 상담을 했다. 큰 사건이라고 하면 그 당시 사망했던 수지 철거민 사건이 있었다. 그리고 안기부에 끌려가 조사를 받던 김형찬 학생이 진술을 거부하다가 난로를 끌어안아 크게 다쳤던 사건, 안산 지역에서 있었던 대규모 해고 사건들도 박진씨가 상담을 하고 함께 싸웠다.

인권상담소는 1999년부터 전문적인 인권운동단체로 전환하는 길을 찾았다. 2000년 '다산인권센터'로 단체 이름을 변경하면서 자유권, 사회권 등 구체적인 인권 영역으로 활동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2002년에는 수평적 상임활동가 체제로 전환하면서 송원진, 박진, 송주현, 노영란씨가 상임활동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활동가들은 자기 사업을 하고 싶어하잖아요. 종속적인 직원 같은 관계, 이걸 좀 벗어나려고 서로 논의를 했어요. 그때 저는 시민단체 활동은 운동이라고 생각을 안 했어요. 그냥 좋은 일 하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인권운동을 한다는 생각으로 한 건 아니었어요."

박진씨는 1998년에 결혼했고 2000년에 아이를 낳았다. 한편으로 아이를 키우면서 상임활동가로 일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동안 다산인권센터는 가정폭력 사건부터 노조 결성, 철거민 사망 사건, 애국동맹 사건, 이주노동자 경찰 가혹 수사 사건, 소년원에서 같은 원생한테 맞아 식물인간이 된 사건, 성동구치소 사망 사건, 국가보안법 사건, 살인 사건의 억울한 용의자까지, 지역의 숱한 인권 침해 사례에 대응하며 성과를 내 왔다.

2005년 무렵 삼성SDI에서 노조를 조직하려던 전현직 노동자 20여 명이 지난 2004년부터 불법 복제된 휴대폰으로 위치 추적을 당했다고 의혹을 제기하고, 그중 강재민씨는 사측 임원을 검찰에 고소했다. 강재민씨는 2004년 10월 3일 저녁 방영된 MBC <시사매거진 2580>에서 다른 노동자들이 고소를 취하한 배경에는 사측의 집요한 협박이 있었음을 증언했다.

당시 노영란 활동가가 '삼성 노동자 감시 공동대책위' 집행위원장 직책을 맡아 삼성 노동자들과 함께 싸우고 있었다.

"그 언니가 그때 갑상선암에 걸렸어요. 저희한테 너무 충격이었어요. 언니가 휴직에 들어가고 인권교육활동을 주로 하던 제가 그 활동을 이어받아 하게 된 거죠. 그래서 삼성 해고자 위치 추적 사건을 제가 맡게 된 거예요."

박진씨는 열의가 넘쳤다. 현장은 박진씨를 다시 살아나게 만들었다. 전국 삼성공장을 돌아다니는 원정 투쟁을 기획하고 안티삼성문화제를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서 열었다. 하지만 삼성의 권력은 강했다.

"삼성 위치 추적 범죄가 다 무혐의로 나왔어요. 결국 김갑수 아저씨는 해고 싸움에 졌고, 강재민씨는 회사에서 버티다 견디기 어려워져 그다음 해인가 회사 그만두었죠."

박진씨는 삼성과 투쟁하면서 다시 정신 차리고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삼성 투쟁 시작하면서 공부도 하러 다니고 평화운동가들이 비폭력 트레이닝을 받았어요."

그동안 독재정권에 항거했던 운동가들은 화염병을 던지거나 쇠파이프를 휘두르며 싸웠다. 그런데 모든 폭력에 반대하는 평화운동가들은 비폭력으로 목표를 쟁취하고자 했다. 경찰과 대치하게 될 때 어떤 식으로 저항할 것인지 트레이닝을 받기도 했다.

2006년에는 대추리에 미군기지를 확장한다고 농민을 내쫓기 시작했다. 문정현 신부, 박래군, 박진 등 수많은 인권운동가들, 시민들, 학생들이 대추리를 지켰다. 5월 4일, 행정대집행을 하는 날은 잊을 수가 없다.

"기자 회견 하고 나서 경찰들이 활동가들을 다 끌어내고 있었어요. '아, 저들이 이제 들어와서 우릴 뜯어내겠구나' 하는 순간, 초등학교 철문에 내가 이렇게 손을 넣고 걸었어요. 쟤네들이 내 팔을 자르지 않는 이상 행정대집행을 못할 거라는 판단이 들었어요."
 

2006년 3월 5일 평택 대추리 행정대집행에 맞서 대추초등학교를 지키려고 철조망에 손을 집어넣고 버티고 있는 박진씨. 반대편에는 문정현 신부가 박진씨 손을 잡고 있다. ⓒ 정택용

 
그날 문정현 신부와 반나절을 버티면서 대추초등학교를 지켰다. 이때 애처로우면서도 강렬한 박진의 모습이 <한겨레> 1면에 실리면서 유명해졌다. 하지만 어찌 권력을 당하랴. 결국 대추리도 빼앗겼다.

"사람들한테 내 영혼을 팔아서라도 대추리를 지키고 싶다고 했는데 상처만 남았죠. 그래서 아팠어요. 그때 대추리를 같이 지켰던 오두희 언니가 그런 얘기를 했어요. '너는 지킨다는 게 무슨 의미냐. 대추초등학교를 뺏기지 않는 게 지키는 거냐?' 이런 철학적인 질문을 던졌어요. 그 질문이 되게 오래 남더라고요. 지킨다는 건 뭘까. 내가 정말 영혼을 걸고 지켜야 할 가치는 뭘까."

박진씨는 그때부터 스스로에게 그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았다.

"요즘 와서 내가 정리한 답은 권력과 맞서 승리한다기보다는 거기에 있는 사람들이 완전히 추락해 버리지 않도록 지켜주는 것, 그게 내가 지키고 싶은 가치가 아닌가 생각해요. MBC 계약직 아나운서들한테도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다. 그보다 먼저 당신들이 무너지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아픈 상태에서 이겨 봐야 아무 소용없으니까. 지금은 그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남는가가 중요한 가치가 됐어요."

하지만 당시 이명박‧박근혜 정권을 거치면서 박진씨는 지쳐 갔다. 용산 철거민 투쟁, 쌍차 투쟁… 무엇 하나 이기는 게 없었다. 더 이상 뭘 해도 안 된다는 절망감 같은 게 밀려들었다. 가만히 있어도 눈물이 났다. 박진씨가 이러다가 안 되겠다 싶어 쉬려고 하던 그 무렵, 2014년 4월 16일에 세월호 참사가 터졌다.

"대학교에서 학생들 가르치는 수업을 몇 년째 하고 있거든요. 오전에 수업을 마치고 은행에서 일을 보고 있는데 계속해서 뉴스에 뭐가 나오는 거예요. 당연히 살아 나오리라 생각했고 흘려들었던 거 같아요. 그런데 어, 배가 거꾸로 들어가는 게 보이더라고요. 그때 너무 충격받았어요. 시간이 갈수록 이상한 거예요. '박근혜가 너무 싫은데 저 세월호에서 애들 구해 내고 그러면 박근혜 용서할 수 있을 거 같애. 그 정도는 하지 않겠어?' 진짜 이런 생각을 했단 말이에요. 그런데 상황이 결국… 용서가 안 되더라고요. 세상에 그런 미친…"

너무 놀랍고 충격적인 사건이다 보니 성명서 한 장 나오지 않았다. 인권단체에서 처음으로 성명을 냈다. 그리고 박진씨는 진도로 갔다.

"그때는 이미 시신을 수습하고 있을 때였어요. 참혹하더라고요. 본격적으로 그 싸움을 같이하게 된 거는, 안산시민대책위가 작은 집회를 하는데 와서 발언을 해 달라고 해서 갔어요. 그다음에 안산에서 처음으로 추모문화제를 크게 열었어요. 거기 사회를 봐 달라고 하더라고요. 그게 본격적으로 세월호 투쟁에 뛰어든 계기가 되었어요."

안산에서 추모제 사회를 보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광화문 광장에서도 사회를 맡게 됐고 세월호범국민대책위가 꾸려졌을 때 공동운영위원장을 맡았다. 그리고 안산에 내려가 유가족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처음엔 유가족들이 마음을 열지 않았어요.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죠. 자꾸 만나는 방법밖에 없었어요. 자주 찾아갔죠. 자연스럽게 대책위 사람들하고 조금씩 연결되기 시작했구요. 그다음부터는 쭉 같이 박근혜 정부에게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싸움을 했죠. 서울에 교황님 오셨을 때 공동투쟁을 기획했고, 유가족은 청와대 앞에서 농성을 시작했고, 저도 농성장에 유가족들하고 같이 있었어요."
  

2017년 독일 에버트 재단 인권상을 수상한 직후. 왼쪽부터 박근혜정권퇴진비상국민행동 기록기념위 박석운 공동대표, 박진 백서팀장, 세월호 생존 학생 장애진씨. ⓒ 박진

 
최순실 게이트

2015년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1기 특조위)가 출범했다. 특조위는 세월호 참사 직후 사고 원인 규명과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출범했지만, 당시 새누리당의 반대로 수사권·기소권을 부여받지 못하는 등 조사에 어려움을 겪었다. 특조위는 활동 기한을 연장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당시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이 반대해 2016년 6월 활동을 종료했다.

"그 무렵 자원 활동을 했던 친구가 심정지로 쓰러져 죽었어요. 가까운 동료는 집안 일 때문에 지방으로 내려가고. 안 되겠다 싶어 정말 쉬어야겠다 생각했어요. 1년 동안 안식년 휴가를 받아서 처음 두 달은 잠만 잤어요. 우리 딸이 학교 갔다 와서 '엄마! 이 자세로 그대로 있었어?' 할 정도로 하루 종일 잠만 잤어요. 한두 달을 자고 잘 만큼 잤다 싶으니까 일어나서 그때부터 집 청소를 두 달 하고. 그리고 놀았어요. 제주도에 가고 엄마한테도 가고 지리산에도 얼마 동안 있었고 가족들과 해외여행도 하고…"

그런데 최순실 게이트가 터졌다. 도저히 쉴 수가 없었다.

"박근혜가 처음으로 국민한테 사과하는데, 결국 무릎을 꿇은 것 같은 그런 느낌! 되게 신났어요. 또 나오게 된 거죠."

박진씨는 못 참고 촛불집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제가 선배들하고 하는 모임이 있었어요. 박래군 선배, 이태호 선배, 염형철 선배, 그 모임에서 '이 촛불항쟁이 어느 방향으로 갈 거 같냐?' 누가 그래서 제가 자꾸 의견을 냈더니 '너 그럼 쉬지 말고 나와서 일해.' 그래서 '박근혜 퇴진 비상행동 공동상황실장'으로 추천받게 된 거예요."

박진은 퇴진행동 공동상황실장과 공동대변인을 맡았다. 그중에서 언론과 선전, 시민행동은 그의 몫이었다. 10만 명이 모인 세월호 서울광장 집회에서 사회를 보기도 했다. 촛불집회 4차와 7차 광화문 본대회 사회도 봤다. 주최 쪽 추산 각각 60만 명과 80만 명이 모인 곳이었다. 어마어마한 규모의 군중인데 사회자의 말 한마디 제안에 한순간에 불이 꺼지고 조용해졌는데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그때 광장을 통해서 큰 힘을 받았어요. 힘들긴 정말 힘들었는데 너무 큰 힘을 받아서 저는 앞으로 운동을 잘 할 수 있을 거 같았어요. 광장에서 받은 에너지로 그 이전까지 힘들었던 게 다 상쇄된 거 같아요.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고 나서 부모님들이 포기하지 않고 계속 싸웠기 때문에 그 싸운 힘들이 광장으로 이어졌다고 생각해요. 거기에 동의하는 선량한 시민들과 힘을 합쳐 싸워 온 게 촛불까지 이어진 거라고 봐요."
 

촛불집회 때 아이와 함께. ⓒ 사진제공 - 박진

 
박진씨는 전과가 많다. 몇 개나 되는지 세기도 힘들다고 한다. 그동안 인권운동을 하면서 숱하게 체포당해 재판을 받았는데 대부분 벌금형에 집행유예를 받았다.

상대적으로 합리적인 보수, 문재인 정권이 들어섰다. 다산인권센터와 박진씨는 할 일이 줄기는커녕 더욱 바빠졌다. 박진씨는 경찰청 인권침해 사건 진상조사위원을 맡고 대변인 역할도 맡게 됐다.

"용산참사, 쌍용차해고사건, 백남기 농민 사망 사건, 밀양청도송전탑건설, 강정해군기지건설, 삼성염호석사망사건 등 경찰공권력에 대해 조사하고 권고한 것을 발표했어요. 우선은. 권고가 강제력이 있지는 않지만 경찰청이 의지를 갖고 만들었기 때문에 우리들의 권고를 무시해서는 안 되잖아요. 그래서 백남기 사건에 대해서도 경비 인력 운용에 대한 것, 인권침해 소지를 없애기 위한 구체적인 제도를 권고했고, 경찰관 식별표지 아주 디테일한 부분을 권고했고, 그리고 과거사 사건들에 대해서 경찰청장이 공식적으로 사과할 것, 백남기 농민 사건 관련된 민중총궐기, 쌍용차 관련해서도 손배와 가압류를 취하하라는 굉장히 강도 높은 권고가 나왔죠."

박진씨는 법무부 인권정책 자문위원도 맡고 있다. 유엔 자유권위원회, 사회권위원회 등 국제인권 기구들이 한국사회에 권고한 중요한 일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백남기 어르신 돌아가셨을 즈음에 유엔 자유권위원회가 '한국의 집회 시위 자유가 현저히 축소되고 있다, 차벽을 친다거나 하는 행위는 원천적으로 집회 시위를 허가하는 것이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 과도한 공권력 남용은 문제가 있다, 이거 시정하라' 이런 권고를 하거든요. 그런 국제사회의 권고에 대해서 얼마나 잘 이행하고 있는지를 법무부가 관리 감독해야 하는데, 그런 걸 박근혜 때는 개무시한 거죠. 그러니 국가 인권 등급이 죽 내려갔죠. 문재인 정부는 적어도 그런 걸 눈치 보는 정부예요."

정권이 바뀌었지만 박진씨는 끊임없이 인권을 위해 나선다.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도 부당한 인권침해 사건이라고 규정하고 국가인권위원회도 재심을 촉구하는 의견을 표명하라고 요청했다.

"재심, 그게 왜 어려운지 모르겠어요. 이석기 의원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서 너무 과도한 징벌에 처해 있는 거잖아요. 오죽하면 미국 법무부 보고서에도 이 사실이 언급돼 있겠어요(미국 법무부 보고서는 이석기 전 의원 구속을 '자의적 구금' 즉 '불법적 구금'으로 규정했다)? 앰네스티에서도 양심수 석방하라고 했구요. 인권 기준으로 이석기 전 의원 구속은 명분이 없어요.

양심수 문제뿐 아니라, 정부가 인권에 있어 국정 방향을 풀어가는 데 실망스러운 게 많아요. 그중에서도 특히 노동문제를 너무 못 풀어요. 정부 관료 상당수가 노동 혐오, 노조 혐오가 있는 건 아닌가 싶을 때가 있어요. 차별금지법에 대한 태도도 실망스럽기 짝이 없고… 그래도 협력할 것은 협력하고 비판할 것은 비판하려고 해요. 그러다 보니, 비판만 할 때보다 일이 더 많아졌어요."

 

2018년 반올림농성장에서 오렌지시상을 받은 다산인권센터 활동가들. 오른쪽 방향으로 아샤, 사월, 랄라. ⓒ 박진

   
뒷이야기

박진씨는 요즘 건강이 좋지 않다. 하지만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MBC 계약직 아나운서 문제에 나서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들은 박근혜 정권 때 많은 조합원들이 공정한 방송을 위해 제작을 거부할 때 참여하지 않고 방송을 했다는 이유로 적폐세력으로 따돌림당하고 있다.

"이 사람들 적폐 아니거든요. 왜냐면 이 친구들이 파업에 가담하고 싶어도, 노조에 가입하고 싶어도 사실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 거죠. 신분 자체가 너무 불안정하니까. 그런데 지금 이 사람들을 완전히 사회적 적폐, 김장겸 같은, 또 배현진 아나운서 같은 사람으로 묶고 불이익을 주는 데, 아무도 여기에 대해서 문제 삼지 않는 거예요."

'해직자'가 된 8명은 노동위원회에 구제신청을 했다. 노동위원회는 부당 해고 판정을 했고, 법원은 이들에게 근로자 지위를 인정했다. 이들은 지난 5월 27일부터 MBC에 다시 출근하기 시작했지만 업무가 없다. MBC는 본안 소송이 확정될 때까지 이들에게 업무를 주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회사는 이들을 12층 회의실에 배치하고 업무를 주지 않고 있다. 이들은 지난 7월 16일 '직장 내 괴롭힘'으로 진정서를 제출했다.

지금 그들을 지지해 주는 이들은 대리인 류하경 변호사다. 류하경 변호사는 촛불집회 때 법률팀 구성원이었고, 촛불과 관련된 법률 팀의 의견과 성명을 주로 작성하면서 박진씨와 친해졌던 사이다.

"류하경 변호사가 고군분투하는데 누구라도 한마디 해야겠다, 제가 칼럼을 하나 쓴 거죠. 어떻게 가장 힘없는 비정규직 계약직한테 그 책임을 묻는지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박진씨가 쓴 칼럼과 기자 회견을 한 기사가 나간 뒤 댓글이 쏟아졌다.

"노동운동 하는 사람들조차 '내용이 배현진하고 다른 건 알겠다, 그럼에도 그 사람들은 파업에 동참하지 않고 대체 인력으로 투입돼 방송을 했으니까 적폐 아니냐, 용서할 수 없다'는 거예요. 그런 소리 듣고 당황스러웠어요. 이거는 어떤 도그마에 빠진 거라고 생각해요. 이 사람들은 그냥 자기 생존 때문에 거기 있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었어요. 신분이 불안정해서 파업에 참여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었어요. 왜 인간에 대한 이해를 못하지?

누구라도 직장 내 괴롭힘의 대상이 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해요. 우리의 목적이 옳더라도 어떤 올바르지 않은 수단은 정당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지난 시기에 당했던 비극들, 이명박 박근혜가 만들어 놓은 이 잔재들을 가장 힘없는 사람들한테 돌리는 거는 정말 정당한가, 이른바 우리 사회의 진보세력이라는 사람들한테 묻고 싶어요. 그래서 이들을 냄새 나는 골방에 처넣으면 우리는 과거를 청산한 거냐고 저는 그렇게 묻고 싶어요."


박진씨는 이 말이 하고 싶어 오늘 인터뷰에 응했단다. MBC 계약직 노동자들 이야기를 꼭 실어달라고 했다. 덧붙인 말이 또 있다. 새 정부 들어서 오히려 후원회원이 빠져나가는데 여전히 이 사회에는 인권단체가 필요하다고, 후원회원으로 가입해 달라고 써 달란다.

그렇다. 아직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 요즘 대놓고 일장기를 흔들면서, 문재인 정부가 일본의 아베 수상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주옥순 같은 엄마부대, 성조기와 이스라엘기와 일장기를 든 태극기부대, '일제의 강제징용자는 돈 벌러 간 것이고, 위안부는 소규모 영업 활동이었다'고 하는 이영훈 같은 친일파 극우세력들이 날뛰는 걸 보면 이 나라는 아직 독립운동, 시민혁명이 필요하다. 독립운동, 시민혁명 거창한 거 아니다. 만 원으로 둘레에 있는 시민단체에 후원하는 것이다. "독립운동은 못했어도 시민단체에 후원은 한다." 이런 구호도 나올 만하지 않은가.

'왜 힘들게 인권을 위해 싸우는가.' 장 폴 사르트르가 말했듯이 지식인이란 남의 일에 참견하는 사람이다. 정의와 자유, 선과 진실, 인류 보편적 가치가 유린당하면 남의 일이라도 자신의 일로 간주하고 간섭하고 투쟁하는 사람이다. 남의 일에 가장 많이 참견하는 박진 인권운동가가 이 시대의 참된 지식인이 아닌가싶다. 후원자 역시 남의 일에 참견하는 지식인이다. 다산인권센터 전화번호는 031-213-2105이다.
덧붙이는 글 작은책 2019년 9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작은책 #다산인권센터 #박진 #글쓰기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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