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못갈 애들 덕 좀 보자는 게 대수냐'는 학부모께

광주 K고등학교 학생과 학부모의 항의에 답한다

등록 2019.09.04 10:14수정 2019.09.04 10:14
1
원고료로 응원
시험 문제 유출 의혹으로 시교육청의 특별 감사를 받은 광주 K고등학교 관련해 최근 시교육청이 경찰 수사에 비협조적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특별 감사 결과 자료를 경찰에 인계하지 않는다는 내용인데, 이 기사의 반향 때문인지 시교육청이 경찰의 요구를 수용했다는 후속 기사가 보도되었다. 아무튼 일벌백계를 외쳐온 시교육청이 의심을 사기에 충분한 해프닝이었다.

경찰 수사를 앞둔 상황에서도 K고등학교의 조직적 반발은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학부모들을 불러다 시교육청의 감사 내용을 부인하고 반박하는 설명회를 여는가 하면, 교직원과 학생들에게 광주 교육이 사망했다는 의미의 검은 근조 리본을 패용하도록 했다. 잘못을 반성하기는커녕 교사, 학부모, 재학생이 혼연일체가 되어 장기전에 대비하자는 뜻일까. 

며칠 전에는 족히 수십 년은 됨직한 멀쩡한 교정의 아름드리 나무들을 잘라버렸다. 학교측은 해마다 해온 가지치기 작업의 일환이었다고 밝혔지만, 한 전문가는 단순히 나뭇가지를 다듬기 위해 전지한 정도가 아니라 머리 부분이 아예 잘려진 상태라는 점에서 가지치기라 볼 수 없다고 지역 언론에 밝혔다. 한 커뮤니티 사이트에는 "멀쩡한 나무들까지 베어가면서 당신들의 억울함을 보여줘야만 했는가?"라는 글이 올라오기도 했다.

[관련기사]
시험지 유출 광주 K고, 나무들 싹둑... 현수막 잘 보이게 하려고?
http://omn.kr/1ko0m

사실 미물일지언정 그 나무들은 얼추 나이로 미루어 1985년에 개교한 K고등학교의 역사와 동고동락한 사이다. 운동장 주변에 버티고 서서 여름철 아이들에게 시원한 그늘을 마련해 주었을 것이고, 때로는 오가는 시민들에게 초록의 시원함을 선사했을 고마운 존재다. 하루아침에 잘려나간 나무들 뒤로 보이는 현수막의 글귀가 더욱 천박해 보이는 이유다.

'실수를 범죄로 모는 건 가혹하다'며 교사 두둔하는 학생들 

지난 주 K고등학교의 태도를 비판한 두 편의 기사를 연이어 쓴 뒤 열흘 가까이 더 지난 지금까지도 학부모들의 항의를 받고 있다. 항의라기보다는 차라리 하소연에 가깝다. 그들은 아무런 잘못도 없는 아이들이 피해를 입고 있다면서 어수선한 학교가 빨리 안정되어 자녀들이 예전처럼 공부할 수 있는 분위기로 돌아오기를 바란다. 물론 여기서 공부란 대학입시 준비다.


현재 K고등학교는 '정상화'의 과정에 있다. 입사자를 오로지 성적순으로 선발해온 기숙사를 폐쇄한 채 모두 집으로 돌려보냈고, 수강 여부에 대한 아이들의 선택권을 제한해온 방과 후 수업도 중단됐다. 시교육청의 특별 감사로 교사들의 경황이 없는 탓이기도 하지만, 아무튼 아이들은 정규수업이 끝나는 오후 4시 반이면 모두 하교하고 있다.

아이들은 때 아닌 '휴가'에 어리둥절해 하는 빛이 역력하다. 마냥 신나 하며 이웃 학교에 다니는 친구들에게 자랑을 늘어놓는 철부지들도 있지만, 대개는 갑자기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 고민하며 안절부절 못하는 모양새다. 지금껏 아침 8시에 등교해 밤 10시에 하교하는 이른바 '8 to 10' 이외의 일과를 한 번도 경험해본 적이 없는 탓이다.

몇몇 아이들이 보내온 항의 메일을 통해서도 그들의 속내를 읽을 수 있는데 내용이 천편일률적인 게 놀랍기만 하다. 한낱 실수를 범죄로 모는 건 가혹하다며 교사들을 두둔하는 한편, 갑작스럽게 늘어난 자유 시간이 무척 부담이 되고 고통스럽다며 입을 모았다.
 
a

26일 K고 교문 우측 담장 쪽 건물에 걸린 현수막과 그 일대 나무들이 베어진 모습. ⓒ 광주드림

 
그들을 가르쳐온 교사에게 관대할 수밖에 없는 건 그렇다 해도, 명색이 낼모레면 성인이 되는 고등학생들이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몰라 애면글면하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거칠게 말해서, 나이 스물이 다 되도록 부모가 하라는 대로 교사가 시키는 대로 노예처럼 살아왔다는 고백처럼 느껴져 민망할 지경이었다. 자유보다는 속박이 익숙하고 편하다는 뜻 아닌가.

중천에 해가 떠 있는 시간에 귀가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는 부모의 마음도 편치 못하다. 한 분은 속이 새카맣게 타들어간다고 표현할 정도다. 요즘엔 중학교는 말할 것도 없고, 초등학교 때부터 자녀의 귀가 시간이 부모의 퇴근 시간보다 늦는 게 보통인데, 하물며 대학입시를 앞둔 고등학생이 일찍 집에 오는 게 말이 되느냐고 항변하는 분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수험생 아이들이 '딴 생각을 할 틈을 줘서는 안 된다'는 학부모도 있었다. 어떻든 학교가 밤 10시까지 잡아두니 부모로서 안심이 된다는 것이다. 언제부턴가 정규수업, 방과 후 수업, 야간자율학습으로 이어지는 '8 to 10' 학교생활로 인해 부모와 자녀의 대화가 단절되고 있다는 지적은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대학입시를 위해 인문계고등학교에 온 이상, 가족과의 시간보다 학교생활이 우선이라는 점은 모든 학부모가 동의한 것처럼 보인다. 그런 까닭에 학교가 아이들을 조기 귀가시키는 건, 이유야 어떻든 아이들을 '방치'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하다. 결국 '방치된' 자녀를 둔 소심한 학부모의 선택지는 많지 않다. 곧, 독서실과 학원의 문을 두드리는 것이다.

학부모가 요구하는 학교 '정상화'는 결국 대입에 집중하는 것 

학부모가 외치는 학교의 '정상화'가 결이 다른 이유다. '정상화'의 조건은 대학입시를 코앞에 두고 수험생인 아이들에게 피해가 가면 안 된다는 것, 오로지 그 한 가지뿐이다. 조금 더 솔직하게 표현하자면, 예년처럼 입시 결과가 좋아야 한다는 것이다. K고등학교는 '자사고 같은 일반고'로 불릴 만큼 매해 지역 내에서 최고의 입시 실적을 낸 곳이다.

학부모들이 학교 측과 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것도 그래서다. 그들이 시교육청 앞에서 시위를 벌이며 외치는 구호를 들어보면, 구체적인 요구 사항이 K고등학교 벽에 내걸린 현수막의 내용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더욱이 자녀가 성적이 최상위권이라면 어떻든 학교와 '운명을 함께할' 처지일 수밖에 없다.

자녀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그들은 고작 학교 비판 기사에 입에 거품 물고 달려들 게 아니라, 학교에 가서 잘잘못을 따져 재발 방지책을 요구해야 옳다. 기숙사를 무조건 폐쇄할 게 아니라, 입사 기준을 바꾸고 희망 학생을 다시 선발하도록 하면 된다. 방과 후 수업과 야간자율학습도 아이들의 선택권을 보장해 자율적으로 수강하고 참여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게 우선이다.

K고등학교의 '정상화'를 간절히 바라는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말하자면 지금은 '내 자녀'를 넘어 '우리 아이들'이 함께 생활할 학교라는 생각으로 뜻을 모으고 힘을 합쳐야 할  때다. 아이들이 보낸 메일 중에는 학교의 비리를 제보하는 내용도 적지 않다. 그런가 하면, 학부모들이 학교에 동원되어 들러리서고 있다는 게 안타깝다고 말하는 내용도 있다.

방금 전 열어본 한 K고등학교 학부모의 '솔직한 의견'에 대한 답변을 여기서 대신 전하며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그분 글의 요지는 이렇다. 어차피 공부에 아예 관심이 없는 아이들이 태반인 현실에서 그들의 수강 과목 선택권을 침해했다는 게 무슨 큰 죄가 되느냐는 것과, 민주주의는 합리적 차별이라는 데, 성적에 따른 우열반 편성이 왜 문제냐는 지적이다.

"우선, 제 아이도 고등학생이니 어머님과 저는 모르긴 해도 동년배일 듯합니다. 피차 마찬가지일 테지만, 어머님의 생각에 전혀 동의할 수 없는 것으로 미루어 '사람은 부모보다 시대를 닮는다'는 말은 수정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공부에 관심이 없는 아이들도, 열등반에 속한 아이들도 함께 살아가야할 우리 아이들이라는 점을 부디 헤아려주시기 바랍니다.

어차피 공부로 대학에 못 갈 아이들의 '덕' 좀 보자는 게 뭐 그리 대수냐는 것처럼 들립니다만, 지금 무기력해 보이는 그들에게도 꿈이 있었을 겁니다. 어릴 적 꿈들이 이번 일과 같은 어처구니없는 경험들이 시나브로 반복되면서 잊히고 지워졌다고 하면 억측일까요. 희미해져만 가는 그들의 꿈을 다시 꾸도록 북돋우기는커녕 되레 막는 곳이라면 과연 그곳이 학교일까요.

한편, 합리적 차별이라는 민주주의에 대한 정의에는 공감하더라도, 성적이 차별을 합리화하는 기준이라는 인식에도 결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고작 계량화된 점수로 순서를 매기고 갈라놓을 만큼 가벼운 존재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힘이 세다는 이유로 사자가 하이에나를 위협하고, 하이에나는 가젤을 잡아먹는 동물의 왕국과 다를 게 뭡니까."
#시험 문제 유출 #광주 K고등학교 #대학입시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검찰 급했나...'휴대폰 통째 저장', 엉터리 보도자료 배포
  2. 2 재판부 질문에 당황한 군인...해병대 수사외압 사건의 퍼즐
  3. 3 [단독] 윤석열 장모 "100억 잔고증명 위조, 또 있다" 법정 증언
  4. 4 "명품백 가짜" "파 뿌리 875원" 이수정님 왜 이러세요
  5. 5 '휴대폰 통째 저장' 논란... 2시간도 못간 검찰 해명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