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 잡기가 하늘의 별따기... 요강 있는 여관

물소리, 숲향만이 가득한 105년 된 유선관에 가다

등록 2019.09.07 20:52수정 2019.09.07 2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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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인인가 그 집 앞을 지나가면서 '여기서 한 번 자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높은 담장에 감시 카메라가 주렁주렁 매달린 집도 아니고, 우람한 체격의 경비원이 있는 집도 아니다. 수영장이 달린 오성급 호텔도 아니고, 카프리 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초호화 유람선도 아니다.

숲속에 자리 잡은 산사와 같은 집. 기와집 문간채 지붕에 잡초가 자라고 있는 집. 무언가 낭만이 있을 것 같았다. 더구나 손님을 받는 여관이라 하지 않은가. 돈만 주면 들어가 잘 수 있다. 하지만 편리함에 길들여진 현대인의 한 사람이 된 이후에는 불편함의 노파심 때문에 그 소망이 점점 엷어져 갔다.
 

유선관 간판 ⓒ 이정근


이 집의 진가를 알아본 임권택 감독이 그 곳에서 <서편제>와 <천년학> 영화를 찍고 강호동이 <1박2일>을 촬영한 이후에는 손님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휴가철에는 방을 잡기가 하늘에 별 따기가 되어 언감생심 꿈을 접었다. 하지만 꿈은 성취하라고 있다지 않은가. 이제는 버킷 리스트(bucket list)가 되어버린 '그 곳에서 하룻밤'을 위하여 더 늦기 전에 결행하기로 마음먹었다.

대흥사 입구에 차를 들이대니 차단기가 꿈쩍하지 않는다. 관리하는 사람이 나와 출입 목적을 묻는다. 예약 문자를 보여주니 차단기가 올라간다. 서서히 미끄러지는 차창으로 피톤치드 향이 콧속을 파고든다.

좋다. 무조건 좋다. 이게 바로 회색 콘크리트 숲에 찌든 도시인에게 주는 청량제다. 주위를 살펴보니 편백나무와 삼나무가 빽빽하다. 터널을 이룬 숲길이 환상적이다. 잘 왔다고 스스로 자위해 본다.
 

유선관 현관 ⓒ 이정근

 

유선관 현관 지붕에 잡초가 무상하다 ⓒ 이정근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문간채를 바라보니 지붕에 잡초가 무성하다. 우리나라에 이러한 숙박업소가 있었던가. 처음 보는 모습이다. 현판을 살펴보니 유선관(遊仙館))이라는 한자 이름표를 달고 있다. 신선이 유유자적 노니는 곳이란다. 그럴만도 하다. 마당으로 들어서니 아담한 정원 사이에 굴뚝이 유난하다.
 

유선관 굴뚝 ⓒ 이정근

 
굴뚝하면 보물 제811호로 지정된 경복궁 아미산 굴뚝이 으뜸이다. 1869년 경복궁 중건 당시 경회루 연못을 파낸 흙으로 인조 산을 만들어 장대석으로 석축을 쌓고 6각형으로 쌓은 굴뚝이 장안의 명물로 떠올랐다 한다. 지금도 졸부들이 집 자랑을 하듯이 그 당시도 어쩌다 사대부가 된 탐관오리와 졸부들이 집자랑을 하기 위해 굴뚝을 높이 쌓는 것이 유행이었다고 전해진다.
 

유선관 호실 ⓒ 이정근

 
손님들이 묵는 각 방에는 현대적인 감각의 아라비아 숫자 호실이 아니라 장미방, 매화방, 참나무방, 소나무방 등 순수 우리식 이름을 붙였다. 짐을 풀고 원두막에 앉아 막걸리를 주문했다. 계곡에서 흐르는 물소리가 온갖 잡소리에 절은 귀를 정화해준다. 조국도 없고, 아베도 없고, 트럼프도 없다. 오직 물소리만 있다.
 

유선관 원두막 ⓒ 이정근

 
이 고장 명물 '해창막걸리'에 버금간다는 '삼산막걸리'를 입속에 털어 넣었다. 숲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산소와 막걸리에 함유된 산소가 풍부해서 그런지 목 넘김이 부드럽다. 해물 파전을 한 입 베어 물고 하늘을 바라보니 흰 구름이 두둥실 떠간다. 신선이 따로 없다.
 

유선관 저녁상 ⓒ 이정근

 
저녁상을 받았다. '임금님의 밥상'이라고 회자되고 있는 12첩 반상보다 더 많은 14첩 반상이다. 정갈한 반찬에 시선이 꽂혔다. 하지만 육류는 없다. 굴비 구이와 서대 찜과 갖은 나물은 있지만 육고기는 없다. 그 연유를 다음날 쥔장과의 대화에서 엿볼 수 있었다.
 

유선관 요강 ⓒ 이정근

 
화장실과 샤워실은 공동으로 써야 한다. 깜깜한 밤길에 여자들이 무서워 출입을 못할까봐 여자 샤워실에 요강을 준비해 놓았다. 필요한 분은 방으로 가지고 들어가 사용하라는 배려다. 하지만 요강이 있는 숙박업소, 이 또한 우리나라에서 유선관이 유일할 것이다.
 

유선관 실내 ⓒ 유선관

  

유선관 침구 ⓒ 이정근

 
105년 전에 지어진 유선관은 처음엔 대흥사를 찾는 신도와 수도승들의 숙소로 쓰이다 40여 전 년부터 여관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소유권자가 대흥사다. 현재 영업하고 있는 분은 대흥사와 임대차 계약을 체결하고 영업을 하고 있다고 한다. 육고기가 없는 이유를 유추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유선관 #대흥사 #요강 #굴뚝 #원두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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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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