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애와 유아인보다 더 간절했던 작곡가의 사랑

[사연있는 클래식] 슈베르트의 순탄치 않은 짧은 삶

등록 2019.09.11 14:46수정 2019.09.11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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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앞의 슈베르트(구스타프 클림트, 1899. ) ⓒ 위키피아

 
이 그림은 구스타프 클림트가 그린 '피아노 앞의 슈베르트'이다. 피아노를 치는 슈베르트와 반주에 맞춰 노래하는 여인들, 그리고 정면을 향해 상념에 잠긴 여인이 보인다. 촛불에서 흘러나오는 빛이 오묘하여 신비롭고 몽환적이다. 안타깝게도 이 그림은 2차 대전 때 퇴각하던 나치가 불태워버려 지금은 이미지만 남아 있다.

사실 그림 속의 피아노나 여인들의 의상은 슈베르트가 살던 시대의 것은 아니고, 클림트가 살았던 19세기 말 유행하던 피아노며, 복장이다. 고증해서 그리는 것보다 작가의 상상력이 발휘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슈베르트는 클림트보다 60여 년 먼저 빈에서 활동하는 음악가였고 클림트는 같은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색채로 표현된 슈베르트의 음악'이라는 작품 세계를 보여줬다.

몇 해 전, 드라마 <밀회>에서 김희애와 유아인이 함께 피아노를 연주한 슈베르트의 '네 손을 위한 환상곡 F 단조'가 화제가 되었다.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서 연주했을 뿐인데 많은 사람이 에로티시즘의 극치라는 표현에 동의했다. 이 곡은 차근차근 감정을 쌓아가는 느낌이 탁월한 곡이다. 슈베르트는 이 곡을 어떤 마음에서 만들었을까.
 

슈베르티아데(모리츠 폰 슈빈트,1868) ⓒ 위키미디어 커먼스

 
이 그림은 슈베르트의 친구인 화가 모리츠 폰 슈빈트가 그린 슈베르티아데이다. 이 그림 속 피아노를 치는 사람이 슈베르트이고 고개를 뒤로 젖히고 노래하는 사람은 미하엘 포글이다. 1828년 마지막 슈베르티아데가 열린 곳도 바로 이 그림을 그린 슈빈트의 집이었다.

이 그림 속 정면 배경으로 보이는 여인의 초상화가 있다. 이 여인의 정체는 카롤리네 에스테르하지 백작 부인이다(이 초상화는 '요제프 텔처'가 그린 수채화로 현재는 소실되어 존재하지 않는다). 슈베르트는 1818년과 1824년 두 차례에 걸쳐 각각 5개월가량 카롤리네에게 피아노 교습을 했다.

슈베르트와 가까웠던 극작가 에두아르트 폰 바우에른 펠트의 기록에 의하면 "슈베르트는 백작부인 E와 정말 사랑에 빠진 것 같다. 그의 그런 모습이 반갑다. 그녀에게 수업한다"라고 기록되었고, 또 그의 측근인 바우에른펠트의 회고록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사실 그는 자신의 제자인 젊은 에스테르하지 백작 부인에게 푹 빠졌고 너무도 아름다운 작품 하나를 그녀에게 바쳤다. '두 대의 피아노포르테를 위한 환상곡 F단조'가 바로 그것이다. 수업이 있을 때 말고도 자신의 후원자인 가수 포글을 대동하고 백작의 집에 종종 들렀다. 그럴 때면, 슈베르트는 티 내지 않고 흠모하는 제자 옆에 가만히 앉아 있었고 사랑의 화살을 마음속 깊이 묻어두었다."
 
이런 사실을 몰랐는지 어느 날 카놀리네는 슈베르트에게 왜 자신에게 작품을 바치지 않느냐고 물었다. 슈베르트는 "그게 무슨 소용이요? 모든 게 당신에게 바치는 건데"라고 답한다. 이후, 슈베르트는 자필 악보 4곡을 그녀에게 건넸다. 초조, 아침 인사, 물방앗간의 꽃과 같은 작품들이다. 그리고 마침내 1828년 그가 작고한 해에 만든 이 명곡을 그녀에게 헌정한다.

병들고 가난한 작곡가와 귀족 여인, 이루어질 수 없는 짝사랑은 더 애달프기 마련이다. 슈베르트는 드라마 <밀회> 속 두 주인공보다 더 간절히, 더 뜨거운 마음으로 이 곡을 만들었을 테니, 내게는 그런 그의 심정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보고 싶고, 슬프고, 좌절하고, 마음을 접을 수 없고, 격정적으로 되어 버리는 그 마음 말이다.

슈베르트는 키가 152센티에 배가 불룩하고 고도 근시로 인해 두꺼운 안경을 썼다. 친구는 많았지만 안타깝게도 이렇다 할 로맨스는 없었다. 더 오래 살았더라면 기회가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31살의 나이에 요절했기에 카놀리네에 대한 짝사랑을 제외하면 그가 17세에 만든 첫 미사곡에 노래를 불렀던 테레제가 그의 유일한 사랑이다. 한때는 그녀와 결혼을 약속했지만, 가정을 꾸릴 만한 경제력이 없었기에 결국, 그녀는 빵집 남자와 결혼해 버린다.

당시 새로 제정된 결혼법에는 시민들은 '가족을 부양할 충분한 재력이 있음을 증명'해야 했다. 물론 슈베르트도 시민 범주에 속했기 때문에 직업과 소득을 증명하는 자료를 제출해야 했는데, 그런 번듯한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고 그렇게 시간만 속절없이 흘러 테레제는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었다. 이 일에 대해 훗날 슈베르트는 친구인 휘텐브레너에게 털어놓았는데...

"누군가를 몹시 사랑한 적이 있네. 내가 작곡한 미사곡에서 소프라노를 노래했는데 어찌나 아름답게 깊은 감정을 담아 불렀는지 몰라. 그녀와 결혼할 생각을 3년 동안 했네. 그런데 괜찮은 일자리를 얻지 못했어. 그러자 그녀는 부모님 뜻에 따라 다른 남자와 결혼했고 나는 몹시 상처받았지. 지금도 그녀를 사랑해."

슈베르트는 그녀를 생각하며 만든 곡을 포함하여 17개의 가곡이 담긴 노래집을 테레제의 동생에게 넘겨줬고 이후, 이 곡들이 한데 엮여 '테레제 그로프의 노래집'이 되었다.

이 시기에 슈베르트는 '프란츠 폰 쇼버'라는 귀족 친구를 만나게 된다. 쇼버는 작가이자 배우, 화가, 행정 관리 등 많은 감투를 가진 재능 많은 청년으로 슈베르트의 열렬한 지지자며 후원자였다. 둘이 쿵짝이 잘 맞아 온종일 붙어 다녀, 쇼버의 별명이 '쇼베르트'였을 정도였다.

슈베르트는 자신을 지지해주는 슈베르티아데와 쇼버의 응원에 힘입어 보조교사 일을 접고 본격적인 프리랜서 작곡가가 되기로 맘을 먹었다. 그렇게 19살의 슈베르트는 집을 나와 1년 넘게 부자 친구 쇼버의 집에 머물며 밥걱정 없이 마음껏 창작 활동에 몰입했다.

다음 해, 슈베르트의 인지도를 높여준 전설적인 바리톤 가수 '미하일 포글'을 연결해준 사람도 쇼버였다. 이 시기에 쇼버의 시에 곡을 붙인 '음악에 부침'을 포함한 죽음과 소녀, 숭어와 같은 명곡들이 탄생했다. 슈베르트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하고 그의 작품들이 출간되면서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려는 순간, 불행은 기다렸다는 듯 그의 발목을 잡는다.

카사노바로 불렸던 자유분방한 쇼버의 손에 이끌려 밤 문화를 접한 슈베르트는 매독에 걸리고 만다. 그의 나이 25살이었다. 당시 매독은 특별한 치료법이 없었고, 매독 말기에는 중추신경을 파고들어 정신 착란까지 일으켰으니, 슈베르트를 포함한 많은 사람이 이 병으로 고통받다가 죽었다.

슈베르트를 결국 죽음에 이르게 만든 몹쓸 친구 쇼버는 86세까지 장수했다. 슈베르트가 그렇게 가고 나자 슈베르티아데의 친구들은 이런 이유로 쇼버에게서 등을 돌렸다.

슈베르트 사후에 그의 전기를 만들기 위해 많은 친구가 기억을 소환하고 기록으로 남겼으나 쇼버는 단 한 줄의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그도 의도치 않게 발생한 일로 인해 평생 단짝이었던 친구를 잃어버리고 평생을 부채감 속에 살았을 테니 오래 살았다고 축복인 인생은 아니었으리라.

수은 치료는 당시 매독에 대한 초기 화학요법으로 사용되었고 슈베르트도 이 치료를 받았다. 이로 인해 몸은 쇠약해지고 머리까지 몽땅 빠져 가발을 써야 했다.
 
"한마디로, 난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고 불쌍한 인간이라네. 건강은 더 이상 회복될 가망이 없고, 비관한 나머지 오히려 악화되기만 하는 한 인간을 생각해보게나. 빛나던 희망은 사라지고 사랑과 우정으로 가득했던 행복은 고뇌로 변해버린, 아름다움에 대한 열망(최소한의 자극)마저도 꺼져가는 한 인간을 상상해 보게나. 비참하고 불행한 인간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 슈베르트가 화가 친구인 레오폴트 쿠펠비저에게 보낸 편지 중.
 
절망 속에서도 슈베르트의 창작열이 꺼진 것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를 위한 4중주 두 곡과 8중주 하나를 썼고, 작은 4중주를 하나 더 쓸 생각이라네. 빈의 최신 뉴스는 베토벤이 연주회를 열어 신작 교향곡, 새로운 미사곡 중 세 곡과 새 서곡을 선보인다는 것일세. 신이 허락한다면 내년에는 나도 그런 연주회를 열고 싶네. - 레오폴트 쿠펠비저에게 보낸 편지 뒷부분.
 
기숙학교 시절부터 슈베르트가 가장 존경하는 음악가는 모차르트와 베토벤이었다. 특히 베토벤의 오페라 피델리오를 본 후에는 그에 대한 존경심이 더 깊어졌다. 슈베르트보다 27살 연상인 베토벤은 이미 명실상부 가장 유명한 음악가였고 수줍음이 많았던 슈베르트는 베토벤과 불과 2㎞ 반경에 살면서도 단 한 번도 그의 근처에 가지 못했다.

베토벤이 임종을 앞둔 며칠 전, 베토벤에게 자신이 만든 가곡 몇 개를 들려줄 기회가 왔고, 슈베르트의 곡을 들은 베토벤은 "참으로 아름다운 노래들이다"라며 감탄했다. 죽어가는 베토벤 앞에서 말 한마디 섞어보지 못한 슈베르트는 일주일 후 그의 장례식에서 횃불을 들었다.

우상이었던 베토벤이 죽고 그해 슈베르트가 발표한 가곡집이 그 유명한 '겨울 나그네'다.

'슈베르트는 한동안 대단히 긴장되고 우울해 보였다. 무슨 고민이 있느냐고 묻자 "조만간 들어보면 알게 돼"라고만 했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오늘 저녁, 쇼버의 집으로 와. 무시무시한 노래들을 불러 줄 테니까. 너희가 무슨 말을 할지 무척 궁금해. 다른 어떤 노래보다 정성을 많이 쏟았거든." 그날 밤 그는 겨울 나그네 전곡을 감정을 가득 담아서 노래했다.' - 요제프 폰 슈파운의 회고.

겨울 나그네는 빌헬름 뮐러의 시집에 곡을 붙여 만든 24개의 노래인데, 빌헬름 뮐러는 곡이 완성된 1827년, 베토벤과 같은 해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33세였다. 그리고 다음 해 3월, 슈베르트는 오로지 자신의 곡으로 채워진 생애 첫 번째이자 마지막인 공개연주회를 열었고, 그해 가을 31세의 젊은 나이에 쓸쓸히 숨을 거두었다.

그의 유해는 그의 바람에 따라 그의 우상이었던 베토벤과 가까이 안치되었다. 극작가 프란츠 그릴파르처는 그의 묘비에 이렇게 적었다.

"음악은 여기에 소중한 보배를, 그보다 더 아름다운 희망을 묻었노라."

[참고서적]
프란츠 슈베르트(한스-요아힘 힌리히센, 홍은정 옮김, 프란츠)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이언 보스트리지, 장호연 옮김, 바다 출판사)
금난새와 떠나는 클래식 여행( 금난새, 생각의 나무)
음악가와 친구들(이덕희, 가람기획)
더 클래식(문학수, 돌베개)
덧붙이는 글 이글은 인천투데이와 개인 브런치에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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