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다움' 따지는 법원 앞에서 분노한 여성들

[해군 상관의 부하 여군 성폭력 ⑤] 피해자 의심하고 배제하는 통념, '정의'는 어디로 갔나

등록 2019.09.06 11:40수정 2019.09.06 11:40
0
해군상관에 의한 성소수자 여군 성폭력 사건 공동대책위원회(이하 공대위)는 성소수자 여군의 성폭력 가해자인 직속상관과 함장에 대해 각각 징역 10년과 8년형이 선고된 사건이 2심에서 무죄판결이 된 것을 계기로 만들어졌다. 공대위는 피해자를 지원하고 군대 내 성폭력 사건의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 활동하고 있으며 해당 사건은 현재 대법원에서 상고심을 진행 중이다. 이에 공대위는 사건에 대한 법적 쟁점을 포함하여 군대 내 성폭력 사건의 특수성, 군사법원 판결의 문제점 등을 짚는 기획기사를 총 7회에 거쳐 연재할 예정이다. 다섯 번째 글은 한국여성의전화 여성인권상담소가 썼다.[편집자말]
'여자가 끝까지 저항하면 강제로 성관계(강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30%
'여자가 처음 만난 남자의 집에 가는 것은 성관계를 허락한다는 뜻이다' 42.5%
'여자가 '싫다'고 말하는 것은 진심이 아닐 수 있다' 35.7%
 

2016년 여성가족부 성폭력 실태조사에서 각 문항에 '그렇다'라고 대답한 남성 응답자의 수치이다. 이처럼 성폭력의 원인과 책임이 피해자에게 있다고 말하는 사회에서 성폭력 피해자가 성폭력에 대해 말하고 또 신고까지 한다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며, 헤아릴 수조차 없는 2차 피해를 '견뎌내야' 하는 일이다.

성폭력 피해자의 입을 틀어막는 사회
 
a

'피해자다움' 따지는 법원에 의해 여성들의 목소리가 묻히고 있다. ⓒ 오마이뉴스

 
지난해 미투 운동에서는 수많은 피해자가 성폭력 문제를 공론화 하기 위해 자신의 피해 사실을 용기 있게 말했다. 성폭력 피해자들은 이 사회에 책임 있는 해결을 요구했다. 그러나 수사·재판 과정에서 피해자들은 "왜 이제야 신고를 했느냐" "이것은 왜 기억하지 못하느냐" "도망칠 수 있지 않았느냐" "샤워를 했으면 성관계를 예상한 것이 아니냐" 등의 자신을 의심하고 비난하는 질문들을 받아야 했다.

사법기관은 성폭력 피해를 신고하는 피해자들에게 사건과 관계없는 피해자의 나이, 외모, 성 이력 등을 이유로 '피해자답지 않다'며 피해자의 진술을 의심하고 배척했다. 성폭력 신고율 1.9%는 이러한 척박한 현실을 보여주는 수치이다.

성폭력통념에 갇혀 피해자를 바라보는 고등군사법원

2018년 11월 고등군사법원은 군대 내의 강력한 권력 관계를 이용하여 성소수자인 피해자에게 "남자 경험을 알게 해 주겠다"며 성폭력을 한 두명의 가해자에게 '무죄'를 선고하였다.

각각 10년, 8년의 선고를 한 1심의 판결을 완전히 뒤집은 결과였다. 피해자의 일관된 진술에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한 1심 재판부와 달리 2심 재판부는 "피해자 진술은 주요 내용이 있고 신빙성은 인정하지만, 합리적 의심을 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사실에 부합한다고 보기 어렵다"며 의문 없이 피해자의 진술이 신빙할 수 있다는 원심의 판단에 수긍하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2심 재판부는 피해자의 진술이 매우 중요한 성폭력 사건에서, 피해자의 진술 토씨 하나하나를 따지면서 '믿을 수 없다'며 가해자의 죄를 인정하지 않는 논거로 인용했다.


또한 재판부는 '전적으로 피해자의 기억을 신뢰하기 어렵다'고 한 반면에, '피고인의 주장은 객관적인 정황에 비추어 사실일 가능성이 높아 쉽게 배척할 수 없다'고 판시했다. 무려 7년이나 지난 사건에 대해 피해자가 아주 세부적인 사항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을 이유로 피해자의 진술을 의심하는 반면에 가해자의 진술의 신빙성은 크게 의심하지 않았다.

피해자는 당시 가해자의 행동을 정확하게 진술하였음에도 재판부는 '피해자가 자발적으로 자신의 숙소에서 자고 갔다'는 취지의 가해자 측 주장을 받아들였다. 또한 "현재까지 악몽을 꿀 정도로 충격을 받은 사건"이었음에도 범행 장소에서 잠을 잤다며 피해자의 공소사실에 의심을 가졌다.

심지어 재판부는 가해자에 감정이입한 듯한 문장들을 적시했는데 '남성인 피고인이 저녁에 독신숙소로 불렀을 때 여성인 피해자가 응하였다면 큰 경계심 없이 피고인을 찾아갈 만한 사정이 있었을 것', '피해자에게는 티타임을 갖자는 가해자의 말이 자신의 숙소에서 자고 가라는 의미로 이해되었을 것이다' 등 피해자의 성폭력 경험과 가해자와의 군사체계 내 권력 관계가 가지는 강제성을 완전히 무시하고 가해자의 서사를 적극적으로 동조하여 피해자의 진술을 배척하였다.
      
사법기관, 성폭력 통념에서 벗어나야
 
a

지난 2000년 대통령령으로 창설 서울 용산 국방부 내에 위치하게 된 고등군사법원의 법정 내부. ⓒ 연합뉴스

 
이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는 데 범죄 피해가 있은 후 7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어렵게 세상에 드러난 이 사건은, 많은 성폭력 사건이 그렇듯 피해자의 진술이 주요 증거인 사건이다. 재판부는 기준도 없이 피해자를 의심하는 태도로 일관하면서 가해자들의 거짓말과 번복된 진술에 대해서는 왜 '의심'하지 않는 것인지를 묻고 싶다. 또한 재판부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신체적 차이, 가해자와 피해자가 가진 명확한 권력의 차이, 권위적이고 수직적인 '군대'라는 조직문화, 피해자의 성적 지향 등은 고려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장병들의 '권익을 보호'하고 군사법의 '정의실현'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고등군사법원. 그러나 그들이 보호하겠다는 권익에는 '성소수자'이자 '여성군인'의 권익은 포함되지 않았다. 또한 성폭력 사건에 대한 정당한 판결은 군사법의 '정의실현'에 해당되지 않는, 말 그대로 논외의 일인 것일까.

성폭력 사건이 발생하였을 때 사법시스템 내에서 이 사건이 정의롭게 해결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성폭력 피해자들의 사법시스템에 대한 신뢰를 높이고, 무분별한 피해자 비난과 의심을 막을 수 있는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도리어 성폭력 사건을 처리하는 사법기관이 '피해자다움'의 통념에 갇혀 그 책무성을 저버리는 것은 한국사회의 여성폭력 문제가 제대로 해결될 것이라는 기대를 절망으로 바꾸는 일이다. 이제 대법원의 응답이 남았다. 실체 없는 '피해자다움'을 강요하며 성폭력 피해자의 입을 틀어막은 고등군사법원의 시대착오적인 판결을 반드시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피해자다움 #해군 #성폭력
댓글

한국성폭력상담소는 1991년 4월 문을 연 이후로 성폭력 피해에 대한 상담, 지원 활동과 성폭력 피해자를 위한 법/정책 마련 및 인간중심적인 성문화 정착과 여성의 인권 회복을 위한 활동들을 해 오고 있습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검찰 급했나...'휴대폰 통째 저장', 엉터리 보도자료 배포
  2. 2 재판부 질문에 당황한 군인...해병대 수사외압 사건의 퍼즐
  3. 3 "명품백 가짜" "파 뿌리 875원" 이수정님 왜 이러세요
  4. 4 '휴대폰 통째 저장' 논란... 2시간도 못간 검찰 해명
  5. 5 김종인 "윤 대통령 경제에 문외한...민생 파탄나면 정권은 붕괴"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