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은 인구를 거느리고..." 조선은 왜 '쉽게' 망했을까

[도서관, 그 사소한 역사] 경복궁 집옥재 ①

등록 2019.10.03 15:49수정 2019.10.03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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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은 1395년 9월 29일 완공된 조선 왕조의 '법궁'(法宮)이다. 여러 궁궐 중 으뜸이 되는 궁궐이라는 뜻이다. 도성의 북쪽에 있어서 경복궁은 '북궐'(北闕)이라 불렸다. 삼봉 정도전은 '큰 복을 누려 번영할 것'이라는 의미로 궁의 이름을 '경복'(景福)이라고 지었다. 태조 4년(1395년) 1차 완성된 경복궁은 390여 칸으로 그리 큰 규모는 아니었다. 

경복궁은 1398년 1차 '왕자의 난'이 발생한 공간이기도 하다. 지은 지 3년 만에 '정변'의 무대가 된 것이다. 정도전을 중심으로 사병을 혁파하려 하자, 태조의 셋째 아들 이방원은 1398년 8월 25일 사병을 동원해 정적인 정도전과 남은, 세자 방석과 그의 형 방번을 죽였다. 2년 후인 1400년 이방원은 2차 '왕자의 난'을 통해 개경에서 방간을 제거하고 왕좌에 올랐다. 

경복궁 이야기
 

조선의 법궁, 경복궁가로 500미터, 세로 700미터인 경복궁은 가로 760미터, 세로 960미터인 중국 자금성과 비교해도 규모가 적지 않다. 가로 250미터, 세로 450미터인 교토 일본 황궁과 비교하면 경복궁이 얼마나 큰 지 알 수 있다. ⓒ 백창민

 
'큰 복을 누려 번영할 것'이라는 이름과 달리, 경복궁을 실제 사용한 기간은 조선 왕조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조선 초기부터 임진왜란 중 소실될 때까지 197년, 고종 때 복구된 후 28년을 합해 225년 동안만 궁궐로 쓰였다. 

경복궁은 1592년 임진왜란 때 불탄 후 273년 동안 복구되지 않다가 1865년 흥선대원군에 의해 중건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 왕실이 오랫동안 경복궁을 중건하지 않은 이유는 왕가 골육상잔의 현장이라는 점, 풍수상 명당이 아니라는 점, 백악산·인왕산에서 들여다보여 왕비와 대비 같은 여성이 은밀하게 거처하는 공간으로 부적합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흥선대원군은 세도정치 타파와 왕권 강화의 상징으로 경복궁 중건이라는 대공사를 추진했다. 흥선대원군이 7000칸 넘게 중건한 경복궁은 왕권 강화에 도움이 되었는지 모르지만 재정난과 민생고를 가중시켰다. 

공사에 착수할 무렵인 4월은 농번기임에도 3만5000여 명을 동원했고, 공사 재원 마련을 위해 발행한 원납전과 당백전은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졌다. 도성을 출입하는 사람에게 통행세를 걷어 민심이 악화되었는데, '경복궁타령'은 이때 불린 노래다. 공사 도중 두 차례 화재가 발생하기도 한 경복궁은 3년 만인 1868년 완공되었으나 부속 건물 공사는 1872년까지 이어졌다. 

흥선대원군이 중건한 경복궁은 13만892평 면적에 7225칸에 달했다. 태조 때 1차 완공된 경복궁이 390여 칸이고 베이징의 자금성(紫禁城)이 8000여 칸임을 감안하면, 대원군이 경복궁을 얼마나 큰 규모로 다시 지었는지 알 수 있다. 경복궁 중건에 든 비용은 770만 냥에 달했다. 

경복궁 수난사 
 

근정전경복궁 근정전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건물 중 가장 큰 목조 건축물이다. 근정전 용상은 왕의 상징이지만 일제 강점기에는 조선 총독이 이 자리에 앉았다. ⓒ 백창민

 
중건한 지 8년 만인 1876년 11월 4일 왕비 침전인 교태전에서 시작된 대화재로 경복궁은 830여 칸이 불탔다. 이 화재로 창덕궁으로 옮긴 고종은 갑신정변 후인 1885년 1월 7일 경복궁으로 돌아왔다. 이후 고종은 아관파천으로 경복궁을 완전히 떠날 때까지 주로 건청궁(乾淸宮)에서 지냈다. 

한편 1894년 6월 24일 터진 청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일본은 청나라를 물리치고 조선에서 주도권을 잡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출범한 김홍집 내각은 수백 건의 개혁안을 통과시키는 '갑오경장'을 단행했다. 갑오경장 때 수많은 개혁안을 통과시킨 군국기무처는 경복궁 수정전에 위치했다. 

청일전쟁 승리로 일본이 득세하자 명성황후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에 맞서는 '인아거일'(引俄拒日) 정책을 추진했다. 일제는 이런 명성황후를 제거하려 했고, 을미사변(乙未事變)은 이 과정에서 터졌다. 1895년 10월 8일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는 일본 군인과 낭인 48명을 이끌고 경복궁에 난입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했다.

그녀가 잔인하게 시해된 곳은 건청궁 곤녕합(坤寧閤) 옥호루(玉壺樓)다. 일제는 명성황후를 시해한 후 건청궁 동쪽 녹산(鹿山)에서 시신마저 불태웠다. 조선 왕조의 법궁으로 지었으나 왕가의 피가 흩뿌려진 비극적인 공간이 바로 경복궁이다.

명성황후는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이지만 한 나라의 왕비를 무자비하게 살해한 일제의 소행은 폭거이자 만행으로 규탄받아 마땅하다. 1896년 2월 11일 고종은 궁녀의 가마를 타고 경복궁을 빠져나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다. 고종의 아관파천(俄館播遷) 이후 경복궁은 왕의 거처로 쓰이지 않았다.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후 경복궁은 일본인을 비롯한 외국인들에게 개방되었다. 일제는 1907년 일본 황태자 방문 때 경회루를 '연회장'으로 활용한 데 이어, 1909년 이토 히로부미 통감 송별 및 소네 아라스케 통감 환영회와 1913년 다이쇼(大正) 천황 생일을 축하하는 '관민 연합 대봉축회'를 경복궁에서 개최했다. 경복궁의 '주인'이 조선 왕실에서 일제로 바뀐 것이다. 

일제는 1910년 8월 22일 한일 강제병합 이후 경복궁 전각 4천여 칸을 헐어 민간에 내다 팔았다. 1915년 9월 11일부터 10월 31일까지 열린 조선물산공진회 개최 후에는 전각의 90% 이상이 헐렸다. '공진'(共進)은 일본과 조선이 함께 발전하자는 뜻이라지만 이 과정에서 경복궁은 큰 피해를 입었다. 그 이후에도 경복궁은 각종 박람회와 공진회가 열린 단골 장소였다. 

1917년 창덕궁 대조전(大造殿)과 내전에 화재가 나자 일제는 경복궁 강녕전, 교태전, 연길당, 경성전, 연생전, 인지당, 흠경각, 함원전, 만경전, 흥복전 같은 4백여 칸의 전각을 헐어 창덕궁 재건에 사용했다. 경복궁의 동문인 건춘문과 서문인 영추문 사이에는 횡단도로가 놓이고 서십자각은 철거되었다. 1909년 일제는 명성황후를 시해한 건청궁을 헐었다. 1939년에는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 미술관을 세웠다. 

조선 왕실의 권위를 상징했던 근정전(謹正殿) 용상(龍床)은 행사 때마다 조선 총독이 차지했고, 일제의 순직 경찰관 초혼제 장소로도 쓰였다. 1926년 10월 1일에는 경복궁 근정전 바로 앞에 일본 제국 내 최대 건물인 조선총독부 청사가 들어섰다. 

조선 망국에 즈음하여 근정전에 담긴 뜻을 되새기지 않을 수 없다. 경복궁을 포함해 주요 건물의 이름을 지은 정도전은 '근정전'의 이름을 다음과 같은 의미로 지었다. 

"천하의 일이 부지런하면 다스려지고 부지런하지 않으면 폐(廢)하게 됨은 필연의 이치입니다." 

고종, 무능한 왕인가 비운의 황제인가 
 

고종황제 어진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된 고종 황제의 어진. 통천관에 강사포를 입은 모습이다. 고종황제의 초상화는 12점이 제작되었는데, 6점만 전해지고 있다. ⓒ 국립고궁박물관

 
1863년 즉위한 고종은 43년 동안 왕위에 있었다. 왕좌에 머문 기간만 놓고 보면, 고종은 조선의 왕 27명 중에 영조 52년, 숙종 46년에 이어 세 번째로 재위 기간이 길다. 흥선대원군이 친정을 한 10년을 제외해도 33년이니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니다. 

긴 재위 기간 때문이었을까. 고종은 즉위 기간 내내 아버지 흥선대원군과 갈등, 왕후 민씨 일가의 정권 장악과 부패, 임오군란, 갑신정변, 동학농민전쟁, 을미사변, 아관파천, 을사늑약 체결, 강제 퇴위 같은 파란만장한 사건을 겪었다.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였으나 '제국'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국권은 열강에 의해 심각하게 위협받았다.

한편, 고종 황제는 4만여 권의 책을 소장한 '장서가'였을 뿐 아니라 '커피 애호가'로도 알려져 있다. 선글라스, 발전기, 전차 같은 신문물을 받아들이는 데도 적극적이었다. 영어 교육과 도량형의 통일, 노비제 폐지 같은 정책을 펴서 근대화를 위해 애쓰기도 했다. 

공교롭게 일본의 메이지(明治) 천황도 고종과 같은 해인 1852년 태어났다. 작가 송우혜는 한일 양국에서 각각 제위에 오른 두 사람의 공통점을 이렇게 정리했다. 

'같은 해 태어나 어린 시절 제위에 올랐고, 권력 의지가 강하고 외형상 친정 체제를 구축했다. 수명이 길어 장기 집권했으며 여색을 탐해 자녀가 많았다. 어릴 때 죽은 자녀가 많고 후계자는 병약했다.'

여러 공통점에도 고종과 메이지 천황의 결정적 차이는 한 사람은 '망국의 군주'로, 다른 한 사람은 근대화를 이끈 '개명 군주'로 기억된다는 점이다. 무엇이 두 사람의 성공과 실패를, 무엇이 두 나라의 근대화 성공과 식민지 전락을 갈랐을까? 

질문은 이어진다. '망국의 군주'로 기억되는 고종을 우리는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왕국(王國)의 멸망에 왕이 책임을 벗기는 어려울 것이다. 열강의 각축, 일본의 침략 속에서 국권을 지키지 못한 것은 사실이니까. 그의 능력이 더 뛰어났다면 조선 왕조, 대한제국의 생명은 연장되었을까? 국권을 빼앗기지 않으면서 시대 과제인 근대화의 길을 걸어갔을까? 

조선은 왜 망했나? 
 

메이지 천황(明治天皇)일본의 122대 천황. 1852년 태어난 그는 1867년 1월 30일 천황 자리에 올랐고 1912년 7월 30일 사망했다. 메이지 유신을 통해 일본 근대화와 부국강병에 기여한 군주로 평가받아 일본에서는 ‘대제’(大帝) 또는 ‘성제’(聖帝)로 칭하기도 한다. ⓒ Wikipedia

 
고종에 대한 질문은 조선 망국(亡國)의 이유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진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병자호란의 외침을 막아낸 조선은 왜 일제 침략을 막아내지 못했을까? 518년이라는 긴 역사를 이어온 조선은 도대체 왜 망했을까? 주한 미국 대사관에서 오랫동안 근무한 그레고리 헨더슨(Gregory Henderson)은 <소용돌이의 한국정치>에서 이런 의문을 표한 바 있다. 

"1910년에 그 많은 인구를 거느리고 그토록 훌륭한 유산을 가진 한국이 그렇게 쉽게 멸망한 것은 기이한 일이다." 

조선 망국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분석이 있지만, 명확하게 원인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 때문에, 망국적인 당쟁 때문에, 제국주의 열강 일본의 강력함 때문에, 고종 황제의 무능함 때문에, 친일 매국노들 때문에, 폐쇄적이고 착취적인 제도 때문에... 쉽게 정리하기 어려울 정도로 조선 망국의 이유는 간단치 않다. 

중국의 계몽 지식인 량치차오(梁啓超)는 한일 강제병합 직후인 1910년 9월 14일에 쓴 <조선 멸망의 원인>(朝鮮滅亡之原因)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육국을 멸한 것은 육국(六國)이지, 진(秦)나라가 아니다. 진나라를 멸한 것은 진나라이지 천하가 아니다. 일본이 별의별 궁리를 다해 남의 나라를 도모한 것만이 문제겠는가? 일본이 정예를 길러 남의 나라를 망하게 할 수 있는 실력을 가진 것만이 문제겠는가?

돌이켜보건대, 왜 다른 나라를 도모하지 않고 오직 조선을 도모했으며, 왜 다른 나라를 멸망시키지 않고 조선을 망하게 했는가? 조선이 망하는 길을 취하지 않았다면 비록 100개의 일본이라고 하더라도 저들이 어쩌겠는가? 스위스, 네덜란드, 벨기에를 보지 못했는가? 그 국토 면적과 인구가 모두 조선보다 훨씬 못하지만 유럽의 여러 큰 강국이 그들을 멸망시킬 수 없었다."


량치차오는 <지난 1년 동안의 세계 대사건 - 조선의 멸망>(過去一年間世界大事記第六朝鮮之亡國)에서는 이렇게 썼다. 

"조선을 망하게 한 자는 처음에는 중국인이었고, 이어서 러시아인이었으며, 끝은 일본인이다. 그렇지만 중국.러시아.일본인이 조선을 망하게 한 것이 아니라 조선 스스로 망한 것이다."

량치차오는 일제 침략이라는 '남 탓'을 하기 전에 조선 스스로 멸망을 '자초'했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한 번은 실수, 두 번은 실패, 세 번은 무능
 

석촌호숫가에 있는 삼전도비정식 명칭은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다. 병자호란 때 삼전도에서 인조가 청 황제 홍타이지에게 항복한 사실을 기록한 비다. 몽골문자, 만주글자, 한자, 세 나라 문자로 글을 새겼다. 비석의 원래 위치는 석촌호수 서호 안이었고 2010년 지금 위치로 옮겼다. ⓒ 백창민

 
맹자(孟子)는 "한 나라가 멸망하는 것을 보면, 반드시 그 나라 스스로가 망할 짓을 한 후에 다른 나라가 그 나라를 멸망시킨다"(國必自伐然後人伐之)라고 말했다. 제국주의 시대 근대화에 성공한 소수의 나라를 제외하고 상당수 나라가 식민지를 경험했다. 식민지 시대를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지만 "나쁜 일본 놈들"이라고 욕만 할 게 아니라 우리가 자초한 '망할 짓'은 무엇이었기에 자주적 근대화를 이루지 못하고 식민지로 전락했는지 곱씹을 필요는 있다.

한일 강제병합으로부터 318년 전에 터진 임진왜란 때 조선은 200만 명이 죽고 10만 명이 일본에 끌려갔으며 전 국토를 유린당했다. 일본 침략으로 망국 직전까지 몰린 조선 왕조는 7년간 이어진 전쟁으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단 말인가. 더 가까이는 1637년 1월 남한산성에서 삼전도로 끌려 나와 청 태종 홍타이지(皇太極)에게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하며 굴욕적으로 항복한 기억을 잊었단 말인가. 

한 번은 '실수'라지만 두 번은 '실패'이고 세 번은 '무능'이다. 어쩌면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이미 사망 선고를 받은 체제가 250년 넘게 '연명'하다가 '자연사'한 건 아닐까.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이 로마의 멸망 원인을 묻기보다 어떻게 장기간 존속했는지 물은 것처럼, 혹자는 조선에 대한 질문 역시 망국의 원인이 아닌 518년 동안이나 지속한 이유에 대해 살펴야 한다고 말한다. '망국'의 원인이든 '장기 지속'의 요인이든 조선 망국의 역사를 되새기는 이유는 똑같은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함이다.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자들은 과거를 되풀이하기 마련"(Those who cannot remember the past are condemned to repeat it)이라는 조지 산타야나(George Santayana)의 말도 있지 않은가.  

우리는 왕실과 양반에게 책임을 물었나
 

족보기록으로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족보는 1423년 작성된 <문화 유씨 영락보(永樂譜)>인데, 현재 전하지 않는다. 현존하는 족보 중 가장 오래된 것은 1476년 쓰인 <안동 권씨 성화보(成化譜)>다. ‘족보’를 중시하다 보니 다른 나라와 달리 도서관이 ‘족보’를 구비하거나 ‘족보자료실’을 따로 운영하는 사례도 있다. 사진은 장택 고씨의 족보다. ⓒ Wikimedia Commons

 
1919년 고종이 죽자 일제에 의한 '독살설'이 퍼지면서 그의 죽음은 3.1 만세운동으로 이어졌다. '산' 고종보다 '죽은' 고종이 끼친 영향이 더 컸다는 평이 있지만, 이 대목에서 우리가 생각할 건 역사학자 김기협의 지적처럼 조선 종말의 '격'인지 모른다. 한 인간의 죽음에도 품격이 있는 것처럼 국가의 종말에도 격이 있다. 망하는 마당에 무슨 '국격'(國格)을 따지냐고 타박할지 모르지만 조선 망국은 어떤 '장렬함'을 남겼을까.

고종 죽음으로부터 26년이 지나 해방이 되었을 때 우리는 군주를 두는 '왕정'(王政)이나 '입헌군주제'(立憲君主制)를 고려하지 않았다. 고종의 비운 또는 무능과 상관없이 해방 후 우리는 '대한왕국'이나 '대한제국'이 아닌 '대한민국'을 수립했다. 우리의 정치 체제로 시민이 주인 되는 '민주공화국'을 선택한 것이다. 

일제 강점기 조선 왕실이 독립을 위해 '헌신'했다면 왕실 복원이나 입헌군주제 도입에 대한 논의가 있었을지 모르겠다. 실제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강령은 왕실을 존중한다는 조항을 담기도 했다. 임진왜란 때 선조는 의주로 피난을 떠났지만 세자인 광해군은 왕을 대신해서 강원도와 함경도에서 의병을 모아 싸웠다. 정유재란 때는 호남에서 의병과 군량미를 모아 후방을 지원했다. 일제 강점기 조선 왕실의 누구도 광해군 수준으로 대일전쟁에 '참전'하지 않았다. 

해방 후 그 누구도 왕실의 복원을 말하지 않을 정도로 조선 왕실은 존재감이 없었다. 고종 사망 후 일제 경찰이 수집한 자료에 따르면, 고종에 대한 당대 사람의 평가를 확인할 수 있다. 

'우리에게 하등의 은전을 베푼 적이 없는 자, 우리를 가렴주구 한 놈, 우리를 일본에 팔아넘긴 매국노.' 

한일 강제병합 후 일제로부터 가장 많은 은사금을 제공받은 이가 고종을 비롯한 왕실이었음을 감안하면, <친일인명사전>의 첫 페이지에 기록될 사람은 고종 이희(李㷗)를 포함한 조선 왕실인지 모른다. 

왕실과 함께 조선 망국에 가장 큰 책임을 질 집단은 지배계급인 '양반'이다. '한 나라의 멸망에는 필부도 책임이 있다'(天下興亡匹夫有責)라는 말이 있지만 책임에도 경중이 있다. 을사오적 같은 몇몇 매국노만이 문제였을까. 지배계급인 양반은 조선 왕실과 함께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할 대상이지만 비판을 피해 간 집단이다. 

임진왜란 당시 '백성에게는 추상같고 왜적에게는 허수아비 같던' 양반의 지배는 조선 후기로 올수록 강화되었다. 강준만 교수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왕실과 양반의 체통이 땅에 떨어졌음에도 지배체제가 유지된 이유를 이렇게 비유했다. '우리 사회에서 재벌이 존경받지 않지만 누구나 재벌을 선망하기 때문에 재벌의 지배체제가 유지되듯, 조선의 양반 지배체제 역시 그러했다'라고. 

구한말 조선을 둘러본 이사벨라 비숍(Isabella B. Bishop)은 양반 계급을 '허가받은 흡혈귀'(licensed vampires)라고 표현했다. 량치차오는 조선의 양반을 '모든 악의 근원'이자 '나라가 망해도 나는 부귀하고 편안하다고 하는 자들'이라고 비판했다. 

메이지 유신의 성공에 일본 지배계급인 '사무라이'가 기여한 점을 생각할 때 개화와 망국 과정에서 조선 양반의 처신은 비판할 지점이 많다. 망국뿐 아니라 이후 독립운동 과정에서 양반 계급이 보인 처신에 대해 우리는 엄중하고 비판적인 관점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또 하나, 계급이 사라진 우리 사회에서 조상이 '양반 출신'임을 은연중에 자랑하는 분위기는 어떻게 봐야 할까. 1920년대 출판물 통계를 보면 가장 많이 출간된 출판물이 '족보'였다. '족보'는 씨족의 계보를 기록한 책으로, 양반임을 드러내는 혈통 증명서다. 계급이 사라졌으니 족보를 통해 양반임을 '증명'하고 싶었던 걸까. 나라가 망한 그 시점에도 우리는 '족보'나 받들고 있었단 말인가. 

개중에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해서 사회적으로 존경받을 가문도 있겠지만, 거두절미하고 양반 후손임을 내세우는 건 '나라 말아먹은 후예'임을 자랑하는 꼴이나 다름없다. 조선 왕실과 함께 양반 계급이 망국의 주범인 마당에 '족보' 따지면서 양반 출신임을 자랑할 일인지 우리 스스로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 ②편으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경복궁 '집옥재'를 다룬 이 기사는 ①편과 ②편 2개의 기사로 나뉘어 있습니다. 이 글은 ①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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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해서 책사냥꾼으로 지내다가, 종이책 출판사부터 전자책 회사까지 책동네를 기웃거리며 살았습니다. 책방과 도서관 여행을 좋아합니다.

사람사이에 조용히 부는 따스한 봄바람같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아이들, 동물, 책을 좋아하는 고양이 집사입니다. 도서관 사서로 일하다가 지금은 소박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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