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모에게 맡긴 두 아들, 아빠의 명절은 얼마나 간절했을까

[나를 붙잡은 말들] 명절은 가족이 완성되는 시간

등록 2019.09.12 11:07수정 2019.09.12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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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나를 붙잡은 말들'은 프리랜스 아나운서 임희정씨가 쓰는 '노동으로 나를 길러내신 아버지,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편집자말]
생의 한창, 아버지는 아주 바빴을 것이다. 노동을 하느라, 돈을 버느라, 그리고 그것들을 반복하느라 끊임없이 바빴을 것이다.

아버지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배관 심는 일을 한 건 1979년, 그의 나이 서른둘이었다. 그때 큰오빠의 나이는 세 살이었다. 세 살배기 아들과 아내를 두고 열세 시간이 넘는 거리를 넘어가야 했을 심정을 나는 차마 짐작조차 하지 못한다. 삶이 얼마나 급하고 간절했기에 아버지는 먼 곳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을까.


큰오빠와 작은오빠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아버지의 고향인 전라남도 무안에서 할머니 손 아래 자랐다. 아버지는 두 아들을 당신의 노쇠한 부모에게 맡긴 채, 무작정 서울로 올라와 사글세로 단칸방을 얻어 살림을 꾸리고 딸 하나를 낳았다. 아버지에게 상경은 더 나아지기 위한, 더 잘살아 보기 위한 큰 결심이었을 것이다. 그때는 많은 가장이 그렇게 고향을 떠나지 않았을까 싶다.

초등학생이 된 내가 가정통신문 속 가족 사항을 쓰는 공란에 '엄마, 아빠, 나'라고 적자, 엄마는 말해주었다. 나에게는 오빠 둘이 있다고, 시골에서 할머니와 함께 있다고, 곧 집에 올 거라고. 물론 그전에도 엄마는 내게 오빠 얘길 해줬고, 할머니댁에 가면 오빠들을 볼 수 있었지만 그건 잠시였을 뿐이다. 어린 나는 한 집에 살고 있지 않은 오빠들의 존재를 자꾸만 잊곤 했다.

그제야 오빠들의 존재를 실감했다. 엄마, 아빠, 나 이렇게 셋만 살 때는 느낄 수 없었던 오빠라는 존재가 곧 집에 온다니. 나는 혼자가 아니구나. 오빠가, 그것도 둘씩이나 있었구나. 갑자기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방학이 되자 오빠 둘은 서울로 올라왔다. 나에게 오빠라는 존재는 생경하면서도 설레는 것이었다. 처음으로 집에서 오빠를 만난 순간을 기억한다. 나보다 키도 크고 덩치도 큰 오빠 둘이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볼이 발그레해져 남매라는 관계를 잊은 채 사랑에 빠질 것만 같았다. 그만큼 좋았고 또 좋았다.

중학교 2학년 때, 내 생일 선물로 스물세 살의 큰오빠는 삐삐를, 열아홉의 작은 오빠는 삐삐 줄을 사줬다. 그들이 사준 선물들을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오빠가 있다는 것은 이런 것이구나. 내가 어떤 마음을 품으면 그걸 함께 생각해 주고, 때로는 눈앞에 가져다주기도 하는 존재구나. 오빠들은 자기들과 각각 8살, 4살 터울인 막냇동생을 참 예뻐해 줬다. 그 마음이 아직도 깊이 고맙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다섯이 됐다가 셋이 되기를 반복했다. 아버지는 계속 다섯이 되기 위해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나에게 큰오빠와 작은오빠는 방학과 함께 가까워지는 큰 기쁨이자, 방학이 끝나면 멀어져야 하는 작은 슬픔이었다. 오빠가 오면 반가웠고 오빠가 가면 아쉬웠을 뿐이다.

하지만 그 시절의 나는 알지 못했다. 자꾸만 두 아들과 어쩔 수 없이 떨어져야만 했던 아버지의 날들을. 단칸방이 아닌 방이 있는 집으로 옮기면 아들을 서울로 데려와야지 했을, 아들과 딸에게 방을 주지 못해 속상했을 아버지의 마음을 알지 못했다. 자식들에게 방을 주려고 매일매일 힘써 노동했을 그 심정을, 나는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인지하지 못했고 헤아리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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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달 앞에서 가족의 안녕을 빈다

공식적으로 우리 가족이 한데 모이는 날은 일 년에 네 번. 설과 추석,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이었다. 그때가 다가오면 아버지는 더 열심히 돈을 벌었고, 어머니는 더 열심히 장을 봐 음식을 했다. 그리고 나는 오랜만에 보는 오빠 둘이 마냥 좋았다. 우리 가족에게 명절이 어떤 의미인지, 방학이 어떤 시간인지, 그 감각을 깨닫기까지 나는 지나간 시간들에 예민해져야 했다. 그래야 조금 헤아려볼 수 있었다.

어렴풋한 기억 속 아빠는 명절이 다가오면 조금 설레는 듯했고, 엄마는 조금 바쁜 듯했다. 전을 부치고, 나물을 무치고, 차례상을 준비하는 것 외에 아들 둘이 집에 온다는 것이 가장 앞에 놓이는 듯했다. 무뚝뚝한 오빠들도 그때만큼은 더 많은 밥을 먹었고, 더 긴 잠을 잤다. 시간과 마음을 내내 부모 곁에 두는 듯했다. 나도 늘어난 가족이 마음에 들었다. 집은 더 좁아졌는데 마음은 더 넓어졌다. 오빠의 존재가, 가족의 완성이 참 좋았다. 

이제 부모의 부모는 존재하지 않고, 자식의 자식이 생겨났다. 손자와 손녀까지 생겨 더 늘어난 가족이 추석이라는 명절 아래 한데 모일 시간이다. 그리고 나도 오빠에게 동생이자 고모라는 이름으로 불릴 시간이 온다. 나 역시나 가족 안에서 많은 것을 먹을 것이고 편안한 잠도 청할 것이다.

모든 것은 생의 한창이던 시간, 많이 바빴던 부모의 날들 덕분이었다. 허겁지겁 애쓴 덕분에 헤어지기도 했지만 만나기도 했던 것이다. 이제 그 품을 알기에 만남과 이별 앞에 슬픔은 없다. 서로에게 손을 잘 흔들 뿐이다. 어서 오라고, 잘 가라고.

둥글고 환하게 부풀어 오를 보름달 앞에서 나는 마음을 한껏 부풀려 우리 가족의 안녕을, 부모의 건강을 빈다. 셋에서 다섯으로, 다섯에서 여럿으로 늘어난 가족이 한데 모이는 날. 시간은 식구를 떨어뜨려 놨다가 모아들이기도 한다. 넓으면서도 다정한 시간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필자의 브런치(www.brunch.co.kr/hjl0520)에도 실립니다.
#가족 #명절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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