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새' 김보라 감독 "'특별하다'는 관객평, 놀랍고 짠하다"

[인터뷰] 그가 강조하고 싶었던 것들... "다음 작품에서도 비주류들의 삶 다뤄보고 싶어"

등록 2019.09.14 11:34수정 2019.09.14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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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꿨다. 과거 90년대 시절로 돌아가 중학교 3년을 다시 다녀야 하는 내용이었다. 문제는 수차례 반복되는 이 꿈이 전혀 반갑지 않은 기억이라는 거다. 꿈의 주인은 무의식에서 강제로 소환된 90년대, 중학교 생활을 '기형적이었다'고 기억한다.

"어른이 되면 과거, 그 시대를 이해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오히려 어른이 되고 나서야 그 시대가 기형적이라는 것을, 나를 가르친 이들이 괴물 같았다는 것을 깨달았죠."

김보라 감독이 무의식에서 건져낸 1994년의 조각. 영화 <벌새>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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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영화 <벌새>의 김보라 감독 ⓒ 이희훈

 
김보라 감독의 첫 번째 장편영화 <벌새>는 1994년 당시 중학교 2학년(15살)이었던 '은희'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흘러간다. 은희가 성장하며 겪는 다양한 아픔과, 이를 치유하는 과정이 담겼다. 일련의 성장통은 김일성 사망사건, 성수대교 붕괴사건 등 당대 굵직한 사건들과 맞물리며 전개된다.

영화는 지난 10일, 누적 관객 수 5만 명을 넘어섰다. 개봉 13일 만이다. 독립·예술영화가 1만 명을 넘기기도 쉽지 않은 상황에 '이례적인 흥행'이라 평가받고 있다. 국내 개봉에 앞서 전 세계 영화제에서 25관왕에 오르기도 했다.

어쩌면 지극히 개인적인, 혹은 지극히 보편적인 1994년 15살 중학생 소녀의 이야기 <벌새>. 영화는 어떻게 시대와 문화권을 막론하고 대중의 공감을 끌어낼 수 있던 걸까? 영화가 관통한 보편성은 무엇이었을까. 이 물음을 들고 지난 10일, <벌새>의 김보라 감독을 만났다. 아래는 <오마이뉴스>와 그가 나눈 대화를 정리한 내용이다.

26년 전 과거에서 현재를 발견하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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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영화 <벌새>의 김보라 감독 ⓒ 이희훈

 
- 영화에 대한 관심이 높습니다(10일 오후 2시 기준, 약 4만 8천 명). 창작자로서 관객들이 호응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영화 배경이 1994년도의 과거일지라도 당시의 일들이 지금 사회 속에서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공감하시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영화에서 표현한 사회적 맥락들, 예컨대 가부장제 문화나 학벌주의 문화, 자본주의 사회 등이 그렇죠. 다만 조금은 불편할 수 있는 메시지를 과거의 장면을 빌려서 말했기 때문에 관객들이 훨씬 편하게 이입할 수 있었을 테고요."

- 해외에서도 상당한 반향이 있었어요. 문화권을 뛰어넘은 보편성은 무엇일까요?
"유년기의 얘기는 누구나 겪는 보편적인 요소니까요. 청소년기에 풀지 못했던 마음의 숙제를 어른이 되어서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죠. 또 어른이 되더라도 은희(영화 주인공)처럼 자유로워지려고 하거나, 자신을 사랑하려는 노력은 하나의 여정처럼 계속되잖아요. 이런 부분에서도 문화권과 상관없이 많이 공감해주셨던 것 같습니다."

- 영화에는 90년대 한국에 국한된 차별적인 요소도 많이 나오는데요.
"넓게 보면 여기에도 보편적인 요소가 있어요. 예를 들어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사건. 시대와 문화를 막론하고 재난은 어디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거든요. 미국의 911 테러 사건, 이탈리아 다리 붕괴사건, 일본 쓰나미 사건들처럼요.

어떤 재난이든 사회 구성원 전체가 함께 고통을 통감하고, 몸 곳곳에 상흔을 남긴 채로 성장한다고 생각해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 재난을 거치면서 각자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각자의 어떤 부분들을 죽게 하는지 경험하니까요. 이런 부분에서 보편성이 나오는 것 같아요."

-영 화의 배경을 1994년으로 정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이때가 한국 사회의 성장통이라고 생각했어요. 한국은 전쟁 이후 급격한 현대화를 겪었죠. 그동안 개인들은 짧은 시간 내에 방대한 사회 변화를 경험했고요. 독재, 민주화 운동, 88올림픽, 혹은 선진국 반열에 들어서려는 사회의 욕망 등. 저는 이 모든 게 성장통의 모습이라고 생각해요.

성장이 아닌, '통증'으로 표현한 이유는 그 사이에 부작용이 드러났기 때문이에요. 영화에서 다룬 성수대교 붕괴사건이 그 예죠. 이런 사회적 문제, 혹은 시대적 흐름을 영화로 다뤄보고 싶다고 생각했었죠."

부당한 게 부당한 건지 몰랐던 시대, 199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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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영화 <벌새>의 김보라 감독 ⓒ 이희훈

 
- 감독님이 기억하는 1994년은 어떤 모습인가요?
"부당한 게 부당한지 모르고 살았던 시대라고 생각해요. 영화에 표현된 것들이 제가 1994년도를 기억하는 모습이죠. 예컨대 가부장적인 가족의 모습, 폭력과 억압으로 가득 찼던 학교, 자본주의적 욕망에 사로잡힌 사회, 그리고 가족 내 비합리적인 서열 같은 것들이요.

성인이 된 후, 과거 중학교 시절의 꿈을 몇 차례 꾼 적이 있어요. 좋은 꿈은 아니었죠. 꿈을 꿨을 때는, 당시의 학교가 정말 기형적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후였거든요. 아이들을 성적에 따라 A반, B반을 나눈다든지, 교사들의 성추행 성희롱이 만연했다든지. 당시에는 이런 것에 대해 저항하는 일이 없었어요. 학교에서 차별당하고, 뺨 맞고 발로 차이고, 복도에서 머리카락 잘리고... 이런 게 너무 비일비재했던 시기였지만 이게 잘못이라고 말도 못 했죠.

어른이 되면 그들(교사들)을 이해할 수 있을까 했는데... 오히려 뒤늦게서야 제가 괴물들에게서 교육받았다는 걸 깨달았어요. 이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인지, 내가 얼마나 병든 사회에서 교육을 받았던 건지."

- 26년이 지난 지금은 어떻다고 보시나요?
"과거와 비교하면 양태나 외양이 다를 수 있지만, 본질은 비슷하다고 봐요. 아직도 학교에서는 남성과 여성의 역할을 구분하고, 학벌에 대한 욕구는 더 강해진 것 같고... 사회 전반에 이런 자본주의적, 혹은 학벌주의 문화가 만연해 있기 때문에 <스카이캐슬> 같은 드라마도 흥행했다고 보고요.

현재는 1994년 대치동에 국한됐던 모습이 사회 전역으로 확산된 것 같아요. 당시 대치동은 제게 욕망의 상징같은 공간이었어요. 마치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환영에 갇힌 집단 같았죠. 이런 현상이 다른 지역에서는 흔하지 않은 일이라고 들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과거 대치동의 모습이 사회 전반에 만연해 있다고 생각해요. 대치동에서 과열됐던 현상이 모든 전역으로 퍼진 거죠."

영화 속 어디에도 '피해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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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영화 <벌새>의 김보라 감독 ⓒ 이희훈

 
- 영화의 중심은 중학생 은희의 개인 서사지만, 1994년도의 정치적 이슈들도 주요 요소로 나타납니다. 이런 사회 이슈들은 한 개인의 삶에서 어떤 역할을 한다고 보시나요?
"영화 속 인물들 모두 내적 균열을 겪죠. 주인공 은희는 가정과 학교에서 내적 붕괴를 겪어요. 은희의 가족들도 말로 표현하지는 않지만 저마다의 붕괴를 겪죠. 영화 배경에서도 붕괴가 일어나요. 아이들을 성적에 따라 A반과 B반으로 가르는 것, 서울대만 좋은 학교라며 학벌을 강조하는 것들이 그렇죠.

저는 이 모든 것들이 성수대교의 붕괴, 거대한 인재와 맞닿아 있다고 생각했어요. 성수대교, 삼풍백화점 사건, 이 모든 게 사실 인재인 동시에 사회 구조적인 문제잖아요. 사람의 안전을 먼저 생각하지 못한 채 본질을 간과해서 생긴 사고니까. 이런 일련의 사건들과 개인의 이야기를 대치해서 인간의 있는 그대로의 '본질'에 대해 성찰해보고 싶었어요."

- 말씀하신 '인간의 본질'은 등장인물들의 특성에 어떻게 반영됐나요?
"먼저 여성들의 모습을 최대한 다양하게 보여주려고 했어요. 그 다음, 누구도 '피해자'로 보이지 않게 하려고 했죠. 존엄성을 갖춘 여성 캐릭터를 그리는 것. 그게 가장 중요했어요.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도 각자의 방식으로, 서로 연대하며 꿋꿋이 살아가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통해 표현하고자 했죠.

대표적인 게 은희와 영지(은희 한문 선생님)의 관계예요. 극에서 은희가 한문 선생님 영지를 만나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마주하는 방법을 찾아가는 모습이 그려져요. 이때 서로의 상황에 공감하며 진실 되게 대화하는 모습들이 나오죠. 저는 이 둘의 관계처럼 문제를 직면하면서 본질을 깨닫고, 타인과 진심으로 연대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이게 이 사회를 살아갈 수 있는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비정상이 정상인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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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영화 <벌새>의 김보라 감독 ⓒ 이희훈

 
- 주인공 은희는 '비주류', 흔히 '아웃사이더'라 불리는 아이로 그려집니다. 이렇게 설정하신 이유가 있나요?
"집에서의 압박, 학교의 부당함에 환멸을 느끼는 중학생으로 그리고 싶었어요. 불만은 있지만 저항할 줄은 모르는. 이렇다보니 은희는 점차 '아웃사이더'가 되는 거죠. 하지만 이후에 영지 선생님을 만나 조금씩 저항의 실마리를 찾아가는 거고요.

그런데 사실, 저는 은희가 아웃사이더라기보다 지극히 평범한 아이라고 생각해요. 평범한 사람들 대부분이 거대한 사회에 제대로 저항하지 못한 채 속으로 감내하며 살아가잖아요. 그런데 많은 분이 제 영화를 보신 후 '특별하다'고 하시더라고요. 이게 너무 놀랐어요. 한 편으로는 짠했고요."

- '특별하다'는 평이 짠하게 느껴졌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요?
"이 반응을 듣고 나서야 이제껏 영화들이 얼마나 비현실적이고 거짓말로 가득 차 있던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미디어가 어떻게 여성의 얼굴에 줄곧 색칠해오면서 이를 잘못 소비하고 있었나... 아이들도 마찬가지예요. 여중생을 묘사하는 방식이 대부분 뭘 모르거나 순진무구한 모습인데, 사실 알 거 다 아는 나이거든요.

그래서 저는 최대한 현실에 있는 여성의 얼굴을 담아내려고 했어요. 제 영화가 지금과 같은 호응을 끌어낼 수 있었던 것도, 미디어가 전시해놨던 여성의 모습에서 벗어나, 가장 '보편적인' 모습을 담아냈기 때문인 것 같아요. 그 여파로 제 영화를 신선하게 느끼시는 것 같고요."

- 영화에는 1994년도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사건, 사물들이 많이 담겨 있습니다. 만일 현재를 표현할 수 있을 만한 상징적인 것을 꼽는다면 무엇일까요?
"'여성'이라고 생각해요. 올해 여성국제영화제의 포스터가 웃지 않는 여성의 모습이었어요. 전 이런 변화가 굉장히 좋다고 봐요. 우리가 교육받아 온 여성의 모습은 주로 상냥한 얼굴이었잖아요. 반대의 얼굴도 여성의 얼굴인 건데.

그래서 과거와 현재의 가장 큰 차이도 '여성'에 있다고 봐요. 변화의 가운데에는 '미투 운동'이라는 사건이 있는 거고요. 이 사회의 규범이 잘못된 편견과 여성들의 잘못된 인내로 이뤄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과정이라고 봐요. 불합리한 것에 춤을 춰주던 것을, 이제는 멈출 수 있는 시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이 변화가 굉장히 반갑고, 이 흐름에 감사하고 있어요."

- 이후 영화화해 보고 싶은 소재가 있다면?
"제가 관심 있는 건 매체에서 잘 다루지 않는, 비주류들의 이야기예요. 이들이 사회적 억압을 견뎌내고 피워낸 꽃에는 엄청난 생명력과 아름다움이 있거든요. 그래서 늘 마음이 가요.

이 연장선에서, 지금 생각으로는 전쟁 영화를 다뤄보고 싶어요. 이 얘기를 하면 다들 놀라는데(웃음). 여태까지 나온 전쟁 영화들 대부분이 블록버스터급이잖아요. 스펙터클하고, 돈도 어마어마하게 투자해서 제작하고. 또 감독은 주로 남성들이고요. 저는 이 점이 이상하다고 생각해요.

전쟁이라는 건 사실 전투 장면이 중요한 게 아니에요. 진짜 고통은 전투가 다 끝난 후에야 비로소 드러나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전쟁 영화는 전쟁 이후에 드러나는 일상의 균열 및 폐허된 삶의 터전을 기록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기존의 화법과 다른, 여성의 눈으로 본 전쟁의 피해를 다뤄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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