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를 어떤 한국말로 고쳐쓸 만할까?

[숲노래 우리말꽃] ‘생채기’, ‘앙금’, '멍울'을 떠올리며

등록 2019.09.15 15:51수정 2019.09.15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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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한 우리말 이야기를 물어보시는 이웃님이 있습니다. 이웃님이 궁금해 하는 대목을 짚는 글월을 띄워 주고서 생각하니, 그분뿐 아니라 다른 여러 이웃님한테도 이 글월을 읽혀도 좋겠구나 싶어서, 이렇게 갈무리를 합니다.

[물어봅니다]
궁금한 낱말이 있습니다. 작가님께서 내신 외래어를 우리말로 순화한 책에서, '트라우마' 를 "마음속 상처" 또는 '생채기'로 바꿔 표현할 수 있다고 보았는데요. 현재 제가 독서 중인 코뿔소·코끼리 보호구역 관련 책에는 '트라우마'라는 단어가 대략 30회쯤 등장해요. 이렇게 자주 나오는 말을 "마음속 깊은 상처" 한 마디로 고쳐서 읽어도 좋을까요? 정신 충격을 받아 그 비슷한 상황이 연출될 때 다시 극심한 공포를 느끼는 후유증이란 의미가 충분히 전달될 만한 말로 '생채기' 말고 또 어떤 말이 있을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상처(傷處)'라는 한자말을 안 써요. 한자말이기에 안 쓰지 않습니다. '생채기'란 낱말이 있어서 '생채기'를 씁니다. 때로는 '허물'을 쓰고, 때로는 "다친 곳·다친 데"라 써요. "아픈 곳·아픈 데"를 쓰기도 합니다.

영어사전을 살피면 '트라우마'를 "마음의 상처"쯤으로 풀이합니다. 저는 트라우마를 "마음의 상처"로 손볼 만하다고 밝히지 않았어요. 영어사전에 나오는 뜻풀이가 그럴 뿐입니다. '생채기'라고만 해도 몸이나 마음에서 다친 곳이 있다는 느낌을 넉넉히 나타내요. 한자말 '상처'도 그렇지요. "나, 상처 받았어." 하고 말할 적에는 "마음이 다쳤다"는 뜻이면서 "마음이 다쳐서 '앙금'이 남았다"는 느낌이에요. 그러니까 '앙금'이란 말을 써도 어울리지요.

어느 때이든 예전에는 어떤 말을 어떻게 썼을까를 헤아리면 좋겠어요. 예전에는 수수하게 "생채기가 남았다"라 했을 테고 "마음이 다쳤다·마음을 다쳤다"라 했겠지요. 그리고, 이렇게 다쳐서 오래도록 뒤앓이(← 후유증)'가 있다고 할 적에는 '고름'이나 '앙금'이 있다고 말해요. 그냥 '뒤앓이'라고도 했어요.

이밖에 '마음앓이·가슴앓이·속앓이'란 말이 있어요. 힘주어서 '고름덩이'나 '피고름'이라 해도 되겠지요. '괴로움·괴롭다'라든지 '아픔·아프다'를 써도 되어요. 그리고 '마음아픔'을 쓸 만한 자리도 있어요. 찬찬히 간추릴게요.
 
(숲노래 손질말 사전)
트라우마 → 가슴앓이, 가슴앓이하다, 속앓이, 속앓이하다, 고름, 고름덩이, 괴로움, 괴롭다, 뒤앓이, 마음앓이, 마음앓이하다, 마음아픔, 마음아프다, 마음고틈, 생채기, 아픔, 피고름, 앙금, 멍, 멍들다, 멍울, 피멍

늘 똑같은 말을 쓸 까닭은 없어요. 흐름을 살펴서 여러 말을 고루 쓸 수 있어요. 그리고 똑같은 말을 잇달아 써도 되어요. 구태여 다른 말을 써야 하지는 않습니다.

 

국립국어원 사전에 나온 '멍울' 풀이. 요새는 다들 '트라우마'를 쓰지만, '멍울'이란 오랜 한국말이 있습니다. ⓒ 국립국어원

 
 (숲노래 손질말 사전)
마음앓이(마음앓이하다) ← 마음고생, 내면의 상처, 한(恨), 속병, 전전긍긍, 성장통, 심적 고통, 트라우마, 쇼크, 정신적 충격, 후유중, 내상(內傷)
아픔 ← 고통, 상처, 통각, 한(恨), 원한, 원망, 비애, 치부(恥部), 벌(罰), 트라우마, 쇼크, 정신적 충격, 후유중, 내상(內傷), 내면의 상처, 속병, 심적 고통, 한(恨), 마음고생
멍울 ← 흔적, 충격, 상처, 고통, 고충, 탈, 업(業), 한(恨), 원한, 원망, 비애, 한탄, 흠(欠), 상흔, 흠결, 치부(恥部), 쇼크, 트라우마, 심적 고통, 내면의 상처, 정신적 충격, 후유중, 내상(內傷), 고충

'마음앓이'이든 '아픔'이든, 또 '앙금'이든 '고름'이든 쓰임새가 꽤 넓습니다. 살갗이나 몸 어느 곳이 다쳤을 때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마음이 다쳤다든지, 몸이나 마음이 다쳐서 그 느낌이 오래도록 이어진다고 할 때에도 두루 써요.


마음 한켠에 다쳤다는 뜻만 나타내고 싶다면 '마음-'을 앞에 붙이면 좋으리라 생각해요. 그래서 '마음앓이·가슴앓이·속앓이' 같은 말을 사람들이 널리 쓴다고 느껴요. 이 얼거리대로 '마음고름·마음멍·마음멍울' 같은 말도 지어서 쓸 만합니다.

그래요. 마음에 '멍'이 들었네요. '마음멍' 하고 '마음멍울' 같은 말도 어울립니다. 맞거나 부딪혀서 멍이 든다고 해요. 멍은 하루아침에 빠지지 않아요. 멍은 무척 오래 남기도 하고, 때로는 아예 뿌리내리기도 합니다.

사람들 마음·가슴에 갖가지 아픔이나 괴로움이나 슬픔으로 맺힌 자리란 '마음멍·마음멍울'로 잘 나타낼 수 있겠구나 싶어요. 부디 모두들 마음멍을 지울 수 있도록 서로서로 곱게 다독여 주면 좋겠어요. 

마음에 맺힌 멍울도 앙금도 생채기도 씻고서, 하늘에 겹무지개가 곱게 뜨듯, 마음 가득 고운 무지개가 뜰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아홉 살 작은아이가 그려 준 그림입니다. ⓒ 산들보라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글쓴이 누리집(https://blog.naver.com/hbooklove)에도 함께 올립니다.
#숲노래 우리말꽃 #우리말꽃 #우리말 이야기 #트라우마 #숲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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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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