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턴이 '큰 실수'했다는 트럼프... 리비아 모델에 대한 오해

[역사로 보는 오늘의 이슈] 카다피 몰락의 근본적인 원인은 따로 있어

등록 2019.09.16 14:37수정 2019.09.16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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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아마르 알 카다피. 사망 2년 전인 2009년 모습. ⓒ 위키백과(퍼블릭 도메인)


리비아 최고지도자였던 무아마르 알 카다피는 육군 대위 시절인 1969년, 27세 나이로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한 뒤 미국의 패권주의에 맞서 싸웠다. 그러다가 핵개발에 나선 그는 2004년 이를 포기했다. 그는 핵을 먼저 포기한 뒤 경제제재 해제라는 보상을 받았다. 이것이 이른바 '리비아 모델'이다.

리비아와 미국 사이에 있었던 이 '기브-앤-테이크'가 채규철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선임연구원의 논문 '핵문제 해법: 기존 모델과 북한의 사례 비교'에 다음과 같이 설명돼 있다.
 
"리비아는 2003년 12월 핵시설·물질 등을 포함한 대량살상무기 포기를 선언한 데 이어 2004년 1월 IAEA(국제원자력기구) 감시 하에 모든 핵시설을 해체하고 3월에는 NPT(핵무기 확산금지조약) 추가의정서에 서명했다.

그리고 이에 대해 부시 행정부는 '대(對)리비아 제재의 효율성을 고려하여 대량살상무기 및 대테러 분야에서 리비아의 협력을 평가한다'고 하면서 2004년 2월 5가지 종류의 제재 조치를 해제하는 등 보상을 제공했던 것이다." - 한국정치외교사학회가 2009년 발행한 <한국정치외교사 논총> 제30집 제2호.
 
카다피는 핵 포기 7년 뒤인 2011년 '재스민꽃의 나라' 튀니지에서 촉발된 재스민혁명의 직격탄을 받고 쓰러졌다. 북아프리카 튀니지에서 시작해 이 나라는 물론이고 오른쪽으로 옆의 옆의 나라인 이집트 정권까지 붕괴시키고 옆 나라인 리비아에까지 들이닥친 민주화운동으로 인해 카다피는 그해 10월 20일 시민군에 체포된 뒤 총살당했다.

재스민혁명은 이 정도로 멈추지 않았다. 튀니지 왼쪽의 알제리에도 영향을 미쳤을 뿐 아니라 중동으로 건너가 예맨·오만·바레인·시리아·이란에도 파급력을 끼쳤다. 기다란 사막지대가 이어지는 북아프리카와 중동으로 번진 민주화운동의 모래 폭풍 속에 카다피의 운명도 함께 매장됐던 것이다.
 

북아프리카와 중동. ⓒ 구글 지도


반미운동의 상징적 인물 중 하나였던 카다피는 핵개발 포기와 함께 친미 노선을 본격화한 뒤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이로 인해 그의 최후가 마치 리비아 모델 때문인 것처럼 오해되는 일들이 계속 벌어지고 있다.

그런 오해는 꽤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북한 역시 리비아 모델에 대해 불길한 인식을 갖고 있다. 카다피의 최후를 리비아 모델과 연관시키기 때문이다. 이런 인식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한테서도 나타난다. 2018년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 전에 그는 "리비아 모델은 우리가 북한에 대해 생각하는 모델이 전혀 아니다"라는 말로 북한을 안심시키려 했다.

워싱턴 시각으로 이번 9월 11일 백악관에서 있었던 기자들과의 문답에서도 트럼프는 그런 인식을 표출했다. 존 볼턴 안보보좌관의 경질에 대한 질문을 받은 트럼프는 "그는 김정은에게 리비아 모델을 이야기하며 매우 큰 실수를 저질렀다"며 "카다피에게 일어난 일을 보라"고 말했다. 존 볼턴의 리비아 모델 언급을 '큰 재앙'으로 칭한 트럼프는 "카다피에게 일어난 일을 보라"고 재차 언급했다. 이런 일련의 발언들을 통해 트럼프는 김정은의 신변을 위협하는 리비아 모델을 추구할 뜻이 없음을 분명히 밝혔다.

카다피의 최후와 리비아 모델을 연결하는 인식은 싱가포르 정상회담 전의 힘 겨루기 상황에서 마이크 펜스 부통령이 보인 반응에서도 나타난다. 펜스는 카다피의 최후를 연상시키며 리비아 모델을 언급한 뒤 "리비아 모델이 그렇게 끝난 것처럼 김정은도 제대로 협상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끝날 수밖에 없다"고 경고했다.

또 2018년 5월 25일 자 YTN '김선영의 NEWS 나이트'에 따르면, 니콜라스 번스 전 국무차관도 리비아 모델을 그런 뜻으로 사용하면서 "리비아식 해법은 무아마르 카다피의 죽음, 카다피 정권의 몰락을 말하기 때문에 북한은 이를 당연히 경계할 것"이라고 말했다.

카다피는 핵개발 포기 때문에 몰락한 게 아니다  

반미국가가 핵개발을 먼저 포기한 뒤 미국이 경제제재를 해제하는 리비아 모델은, 양국 사이에 신뢰관계가 없을 경우에는 일방적이고 불합리한 방식이 될 수밖에 없다. 북한과 미국처럼 70년간 적대관계를 이어온 국가 간에는 더욱더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리비아 모델은 북미관계에 적용하거나 추천할 만한 방식이 못 된다.

그런데 카다피의 몰락 원인을 리비아 모델에서 찾는 것은 그다지 타당치 않다. 왜냐하면 그의 몰락을 초래한 본질적 요인이 핵개발 포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는 말이 있다. 오비이락(烏飛梨落)이란 한자로 표현되는 이 말처럼, 리비아 모델과 카다피의 운명은 외형상으로는 상호 연관되는 듯해도 본질적으로는 연관성이 적은 사안이다.

물론 인과관계가 조금도 없는 것은 아니다. 카다피가 핵개발에 성공했다면, 재스민혁명 당시 미국이 영국·프랑스·이탈리아·캐나다와 함께 리비아를 폭격하기가 훨씬 더 힘들었을 수도 있다. 핵무기가 없기 때문에 미국이 만만히 본 측면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런데 미국은 리비아 반군을 편들면서 사태에 개입했지만, 미국의 개입은 엄밀히 말하면 반군한테도 유리하지 않았다. 미국의 폭격은 반정부 시위대에도 타격을 줬다. 재스민 혁명 당시인 2011년 3월 책갈피가 발행한 <마르크스 21> 제9호에 실린 김하영의 논문 '리비아 혁명, 어떻게 볼 것인가?'에 이런 설명이 있다.
 
"다국적군은 정부군과 저항세력 간 격전지인 벵가지에도 폭격을 퍼부었다. 저항세력에 대한 카다피 군의 공격도 계속되고 있어, 리비아 민중은 양쪽에서 학살당하고 있는 셈이다."
 

벵가지의 위치. ⓒ 구글 지도


미국 등 다국적군의 개입 목적은 석유자원에 대한 이권 유지에 있었다. 핵개발 포기 뒤 카다피 정권으로부터 확보한 석유 이권이 재스민혁명 와중에 사라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세계의 이목 때문에 민주화운동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긴 했지만, 미국과 다국적군의 실제 목적은 사태를 빨리 진정 시켜 석유 이권을 안정화시키는 데 있었다. 그러다 보니 저항세력과 정부군 양쪽에 폭격을 퍼붓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카다피뿐 아니라 반군도 멈추게 하려고 그렇게 했던 것이다.

설령 미국의 진짜 목적이 카다피 제거였다 해도, 미국의 개입은 그의 몰락을 재촉하는 요인이었을 뿐 그것의 본질적 요인은 아니었다. 리비아의 핵개발을 포기시킨 미국이 폭격을 가한 게 카다리 몰락의 진짜 이유가 아니었던 것이다.

카다피 정권이 붕괴한 것은 집권 초기의 공약을 이행하지 않고 오랫동안 국민들을 실망시켰기 때문이다. 카다피는 '인민대중'의 국가를 세우겠다고 표방했지만, 노동자 계급을 탄압하고 집권당인 아랍사회주의연합의 독재를 강화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일례로 이런 일이 있었다. 위 김하영 논문에 나오는 대목이다.
 
"1972년 3월 트리폴리의 항만 노동자들이 임금 임상과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일주일간 파업을 벌이자, 정부는 파업과 노동조합의 정치 활동을 금지했다. 카다피는 '노동조합과 정치는 아무 관계가 없다. 정치를 하는 것은 아랍사회주의연합뿐이다'고 선언했다. 혁명사령부위원회는 '정당을 건설하거나 참여하는 자는 누구나 사형에 처할 수 있다'는 법령을 공포했다."
 
카다피는 소득 분배에서도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줬다. 석유 무역으로 창출된 부를 공정하게 나눠주지 않았던 것이다. 동부지역 도시인 벵가지에서 시위가 격화된 것도 그 때문이다. 이희수 한양대 교수의 글 '카다피, 혁명가와 독재자의 두 얼굴'은 이렇게 말한다.
 
"오랫동안 권력에서 소외당하고 석유 이익의 배분에서 불이익을 당한 벵가지 지역 부족들은 쉽게 반카다피 무장 대열에 합류했다." - 민음북스가 2011년 발행한 <세계의 문학> 제36권 제2호.
 
카다피는 공정하게 배분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부의 상당 부분을 자신과 주변 사람들의 몫으로 돌리기까지 했다. 카다피가 아직 권좌에 있을 때 집필된 위 김하영 논문은 이렇게 말한다.
 
"석유로 벌어들인 돈으로 떡고물을 나눠주면서 확고한 충성파인 지지세력을 철옹성처럼 꾸렸다. 여기서 카다피의 친인척이 핵심 중 핵심이었다. 둘째아들 사이프 알 이슬람은 석유회사와 국영 방송사를 소유하고, 영국에 거주하면서 서방의 거물급 인사들과 두루 접촉했다. 넷째아들 무타심은 군 사령관이고, 여섯째아들 카미스는 특수부대 사령관이며, 큰아들 무함마드는 우편과 통신위원회를 관장한다. 다섯째 아들 한니발은 석유 산업, 셋째아들 사디는 국영 영화 산업에 관여한다. 딸 아이샤는 사설 금융기관을 소유하고 에너지와 건설에도 이권이 있다."
 
카다피는 욕망을 표출했을 뿐 아니라 역량 부족까지 드러냈다. 그는 반미노선을 표방하면서도 그에 필요한 것을 구축하지 못했다. 장기적인 반미노선에 필수적인 자립경제를 달성하지 못한 것이다. 석유 수출에 대한 과도한 의존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산업과 무역의 다변화를 이루지 못한 것이다. 이는 결국 미국이 유가 하락과 무역 방해 등의 방식으로 카다피와 리비아를 쉽게 압박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물론 자립경제 구축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반미노선을 표방한 이상, 시도하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카다피는 그것에 실패했다. 그와 리비아 집권층이 책임지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명분을 충분히 구축하지 못한 상태에서 친미노선으로 돌아선 것도 카다피한테 화근이 됐다. 그는 2003년 이라크전쟁에서 사담 후세인이 미국에 두들겨 맞는 것을 보면서 핵개발 포기를 결심했다. 그의 입장에서는 실리적인 선택이었을 수 있지만, 명분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전향은 지지층을 이탈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재스민혁명 당시 리비아 반군 내에는 친미세력도 있었지만, 반미단체인 '리비아 이슬람투쟁그룹'도 있었다. 이 조직은 2004년 2월 조지 테닛 중앙정보국(CIA) 국장이 '미국에 대한 즉각적 위협 중 하나'로 평가한 그룹이다. 반미 진영이 공개적 도전을 했을 정도로, 카다피는 기존 지지층 내에서도 신망을 상당히 잃은 상태였다.

리비아 모델은 카다피의 몰락을 설명하지 못한다
 

1969년 쿠데타 당시의 카다피(왼쪽). ⓒ 위키백과(퍼블릭 도메인)


이처럼 카다피는 애초의 공약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혁명의 길에서 스스로 이탈했다. 인민대중의 나라를 건설하지도 않았고, 부를 제대로 분배하지도 않았으며, 반미노선에 필요한 자립경제도 구축하지 못했다. 그런 상태에서 친미로의 전향을 연착륙시키지 못함에 따라 지지층 일부도 잃고 말았다. 이것이 몰락의 근본 원인이다.

그에 비해 핵개발 포기는 부차적 원인이었다. 핵개발을 성사시켰더라도, 돌아선 민심을 상대로 핵을 쏠 수는 없었다. 핵개발 포기는 미국이 리비아 공습을 손쉽게 단행하게 된 배경이 됐을 뿐이었다. 미국의 폭격이 카다피 몰락의 결정적 원인은 아니었으므로, 그 폭격을 수월케 한 핵개발 포기가 카다피 정권을 붕괴시킨 핵심 원인이었다고 말하기는 곤란하다.

이와 같이 리비아 모델은 카다피의 핵개발 포기를 설명해줄 수는 있어도, 그가 몰락한 진짜 원인을 제대로 설명해줄 수는 없다. 그런데 오늘날까지도 미국이 카다피의 핵개발을 포기시킨 게 몰락의 핵심 원인인 것처럼 이야기 되고 있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지긴 했지만, 배(카다피)가 나무(리비아 민중)에서 떨어질 만한 이유가 따로 있었음을 간과한 결과라고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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