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노동계급 혐오의 이면

[서평] 영국 노동당 연구원 출신 오언 존스가 쓴 '차브'

등록 2019.09.15 20:11수정 2019.09.15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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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영국은 극단적인 정치적 혼란을 겪고 있다. 캐머런 총리 시절에 통과된 브렉시트 국민투표 이후, 브렉시트를 대체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를 두고 큰 혼란에 빠져 있다. 정권을 잡고 있는 보리스 존슨 총리는 노딜 브렉시트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태세지만, 보수당 이탈파와 야당들은 이에 강경하게 맞서고 있는 중이다.

브렉시트 투표에서 찬성 측이 승리한 것을 두고 여러 가지 분석이 있었다. 캐머런 총리가 섣불리 행동했다는 주장, 유럽연합의 의의가 점점 약화되고 있다는 주장이 있었다. 분석 중에는 소외된 계층이 브렉시트에 찬성했다는 주장도 있었다. 


시사IN은 2016년, '트럼프와 브렉시트는 쌍둥이?'라는 기사에서 "1세계의 중하층이 반자유무역, 반이민 블록으로 결집"하고 있으며, "고삐 풀린 세계화가 불평등을 심화시키면, 소외된 대중은 민주주의를 통해 세계화에 역습을 가한다"고 설명했다. 또한 '트럼프와 힐러리의 브렉시트 손익계산서'라는 기사에서는 "브렉시트로 분노를 표출한 영국인은 대다수가 백인 노동자로 지구화에서 경제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이라고 언급했다.

미국은 민주당과 공화당의 양당제지만, 영국에는 오랜 역사를 가진 노동당이 존재한다. 이들은 오랜 집권 경험도 있고, 양당제의 한 축이다. 그런데 왜 노동자들을 보호할 정당이 있는데도 백인 노동자가 소외됐다는 말이 나오는 것일까?  
 

차브 ⓒ 오언존스

  
영국 노동당 연구원을 지낸 오언 존스가 쓴 <차브>라는 책에 따르면, 영국의 노동당은 이미 노동계급을 버린 지 오래다. <차브>는 노동당이 왜 백인 노동계급을 저버리고 그들의 지지를 등한시하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추적한 책이다.

저자는 '차브'에 대한 영국 언론의 극단적인 혐오부터 설명한다. 매경시사용어사전에 따르면 '차브'는 싸구려를 자처하며 저급한 취향을 떳떳이 공개하는 청년 문화다. 이들은 대개 소득 수준이 낮고 낙후된 지역에서 살아가며, 별다른 숙련된 기술이 없어 불평등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그런데 보수적인 이들이나 대중지는 이들을 타깃으로 삼아 극렬하게 비난한다. 아무런 생각이 없고, 폭력성을 보이거나 자신이 원하는 일에 단순하게 몰입하는 위험한 사람들로 말이다. 술과 담배, 마약을 하며 미혼모인데도 아이는 돌보지 않는 그런 존재들로 묘사되기에 이들에 대한 비난은 은근슬쩍 정당화된다. 

저자는 이런 차브에 대한 힐난 뒤에는 노동계급에 대한 적대가 숨겨져 있다고 폭로한다. 불안정한 일자리에서나마 일하고 먹고 사는 이들을 무식하고 잔인한 이들로 묘사하며, 이들의 고된 삶을 왜곡하는 식이다. 책에는 노동계급인 싱글맘, 싱글대디가 성실하게 직장에 나가 일을 하면 애를 내팽겨치고 밖에 나간 사람으로 묘사되고, 애를 돌보고 지내면 복지 지원이나 축내는 인간으로 비판한다는 언급이 있다.
 
 만약 당신이 일을 안 하고 실업수당만 수령한다면, 사람들은 당신을 게으른 식충으로 볼 테고, 당신이 일하러 나가면, 아이들이 어디 있는지도 모른 채 그저 방치하는 부모로 볼 테니까요. -32P
 
이들은 가난한 노동계급을 낙인찍음으로써 그들이 의지하는 복지 제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이들은 매우 거칠고 폭력적이며 게으른 이들이니 지원금을 끊어야 한다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책에 따르면 노동계급이 고통을 겪는 지역 상당수는 과거 충분하게 임금을 제공했던 영국의 산업 단지가 붕괴하면서 몰락한 지역들이다.


무너진 노동자들 상당수는 과거에 노동조합에 가입하여 임금 노동을 제공하고 그 대가로 안정적인 삶을 살아갔다. 헌데 그 체제가 붕괴하고 산업 도시가 몰락하자 무엇을 따라가며 살아야할지 알지도 못한 채로 세상에 내던져졌다.

몰락하고 경제적으로 낙후된 지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상당수가 무엇을 바라보고 노력을 해야 할지,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지 알기 어려워 당혹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노동 계급의 아이들이 겪는 이런 혼란을 다른 계층 아이들과 달리 큰 죄악이자 악의 씨앗으로 여긴다. 

이러한 문제와 사회적 배경을 이해하지 않고 단순히 노동계급에 대한 멸시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영국의 현실이며, 더는 이를 방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또한 저자는 노동당과 일부 진보적인 사람들에게도 비판적 시각을 보인다. 이 책의 저자는 현재의 영국 노동당이 그동안 노동자들을 대변하고 문제를 해결하는데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았음을 지적한다. 노동계급이 모욕당하고 낙인찍히는 와중에도 말이다.

그에 따르면, 대처 수상이 집권한 시대가 지나간 후, 노동당은 우클릭하여 노동계급을 버리고 중간계급을 위한 마케팅에 돌입했다. 노동계급은 어차피 집토끼니까 찍어줄 존재로 여겼기 때문이다. 이렇게 노동계급은 자신을 대변해줄 사람을 잃었다.

보수정당은 온갖 지원을 받고 풍족한 상황에서 사립학교를 다니며 성공한 사람들을 두고 왜 노동계급은 저렇게 열심히 안 사냐고 비난하고, 노동당은 집토끼니까 무시하는 동안, 노동계급에 대한 연구, 그들에 대한 보호는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 저자의 해석이다. 극우 단체가 이들의 틈을 파고들어 생활고에 대한 증오에 찬 해법을 전파하는 현상도 발생했다.

저자는 노동계급을 둘러싼 이미지가 상당수 왜곡되어 있음을 강변하고, 결론적으로 맥 빠진 중도정치 대신 노동계급의 열망에 대한 전반적인 재정의가 정치 의제의 중심에 서야 한다고 본다. 열망을 공동체를 개선하고 삶의 조건을 더 낫게 만드는 노력과 결부시키고, 노동당이 노동계급 내부에 정치적 기반을 재건하며, 노동계급이 자신들의 이익을 지켜야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계급정치에 대한 요청은 경제부문에 진정한 민주주의를 가져올 것이다. 시장의 약탈에 대한 환멸이 확산된 까닭에 대중의 마음도 확실히 움직일 것이다. - 390P
 
저자는 이 책을 쓰기 위해 다양한 사람을 만나서 인터뷰했으며, 그 대상은 노동조합 운동가에서부터 점원, 보수당 정치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렇게 모은 자료를 차곡차곡 정리하여 사람들이 노동계급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을 정리했다. 그리고 사람들이 가진 말과 행동의 뒤에 숨겨진 전제들에 당당하게 달려들어서 싸워 나갔다. 누군가 한국에서도 이런 책을 썼으면 싶을 정도로 좋은 책이다.

차브 - 영국식 잉여 유발사건

오언 존스 지음, 이세영 외 옮김,
북인더갭, 2014


#노동당 #영국 #차브 #계급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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