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일약 스타 된 아베, 2019년 후속작 준비중이지만

[역사로 보는 오늘의 이슈] 북일평양선언 → 극우 결집 꾀한 아베, 지금 상황은 다르다

등록 2019.09.17 08:57수정 2019.09.17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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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세작'이란 말이 있다. '아무개 배우의 출세작은 어느 작품이다' 등의 말을 종종 듣게 된다.

1954년 9월 21일생인 아베 신조 총리에겐 48회 생일 나흘 전에 있었던 2002년 9월 17일 북일평양선언(조일평양선언)이 일생일대의 출세작이 됐다. 이때 관방차관이었던 그는 2006년부터 1년간 총리를 지내고 2012년에 다시 총리로 복귀했다. 그가 세 번이나 총리직을 역임할 수 있었던 데는 평양선언의 역할이 지대했다. 이 선언을 계기로 결집된 지지 기반이 지금까지도 그의 정치 활동을 뒷받침하고 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재임 2001~2006년)가 평양선언의 일본 측 주연이었다면, 그를 수행한 아베 신조는 '비중 있는 조연'쯤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선언을 계기로 아베는 고이즈미보다 훨씬 많은 수확을 거두며 새로운 지도자로 우뚝 섰다. 그런 의미에서 아베 신조의 출세작은 평양선언이다.

일본 국민 66.1%가 찬성했던 북일 국교정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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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9월 17일 방북한 고이즈미 당시 일본 총리가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악수하고 있는 모습. ⓒ 연합뉴스=AP

 
아베 신조를 우뚝 세워준 북일평양선언은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고이즈미 총리가 식민지배 문제 및 현안들을 해결하고 경제협력을 해나가며 관계정상화를 추진하기로 약속하는 선언이었다.

일본 입장에서 보면, 이 선언은 납치 문제의 책임 소재를 명확히 했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의를 갖는다. 일본이 주장하는 '북한에 의한 납치 피해자'에 대해 북한은 '자발적인 입북자'라고 주장했었다. 평양선언은 이 논쟁에 어느 정도의 전기를 제공했다. 북한이 종래 주장을 간접적으로나마 철회했기 때문이다. 평양선언 제3조에 그 점이 언급됐다.

"일본 국민의 생명 및 안전과 관련된 현안 문제에 대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측은 조·일 두 나라의 비정상적 관계 속에서 발생한 이러한 유감스러운 문제가 앞으로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을 확인했다."

일본인 납치 문제를 '일본 국민의 생명 및 안전과 관련된 현안 문제'로 지칭했다. 그런 다음 '이러한 유감스러운 문제가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적절한 조치를 취할 책임'을 북한에 부여했다. 김정일 위원장이 '자발적인 입북자'가 아니라 '북한에 의한 납치 피해자'라고 인정한 셈이 된 것이다. 그가 입장을 급선회한 배경을 시급한 경제협력의 필요성에서 찾는 시각이 그 당시 유력했다.

북한은 납치 문제를 인정해주면 국교 체결과 경협이 순조로울 것이라 예측했었다. 이 예측은 처음에는 적중했다. 평양선언 직후의 일본 여론도 국교 체결을 지지하는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남기정 서울대 일본연구소 교수의 논문 '2002년 북일정상회담과 아베 신조의 부상'에 당시 일본 분위기가 소개돼 있다. 평양선언 직후인 2002년 10월에 실시된 여론조사에 관한 대목이다.

"무엇보다도 북일 국교정상화에 대해서는 일본 국민의 지지가 있었다. 일본 내각부가 실시한 '외교에 관한 여론조사(2002년 10월 10일~20일 실시)'에 따르면 국교정상화에 대해 일본 국민의 66.1%가 찬성이었으며, 반대는 26%였다." - 역사비평사가 2015년 발행한 <역사비평> 제112호.

압도적 비율의 일본 국민들이 평양선언과 북일 수교를 지지했던 것. 이 분위기가 그대로 이어졌다면, 양국은 정상적인 외교관계를 맺는 사이가 됐을 것이다. 동시에 아베 신조는 총리가 되지 못했거나 아니면 지금처럼 확고한 기반을 구축하지 못했을 공산이 크다. 왜냐하면 북일 수교로 가는 듯했던 분위기가 갑자기 뒤집히면서 아베 신조가 새로운 지도자로 급부상했기 때문이다.

반전

분위기가 반전된 것은 다름 아닌 납치 문제 때문이었다. 납치 문제를 인정해주면 일본의 태도가 누그러질 것이라는 북한의 예측은 얼마 지나지 않아 오판으로 판명됐다. 북한이 납치 문제를 시인했다는 것을 명분으로 일본 우익이 북한에 대한 총공세에 나섰기 때문이다.

일본 우익은 도쿄 시내에서 선전용 차량을 끌고 다니거나 시위를 벌이는 방법으로 납치 문제를 크게 부각시켰다. 또 친북성향인 조총련 한국인들을 괴롭히는 방법으로 북한 정부를 자극하고 양국 관계를 악화시켰다.

그러는 사이, 수교 문제는 뒷전으로 밀리고 납치 문제만 전면에 부각됐다. 이런 공세의 선두에 선 인물이 바로 아베 신조다. 그는 이 분위기를 활용해 우익 세력을 결집하는 데 성공했다. 위의 남기정 논문은 이렇게 말한다.

"이렇게 하여 9.17은 일본의 보수우익 세력에게 전후사(戰後史)의 '결정적 순간'이 되었다. 보수적 시민운동 그룹이 자생적으로 늘어났으며, 이들이 주관하는 모임과 시위에 자발적으로 참가하는 일본인이 극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날 이후 일본의 시민사회에서 '보수의 조류'가 조직화되고 팽배해지기 시작했다."

패전 이후의 일본 역사에서 '결정적 순간'이 됐을 뿐 아니라 아베 자신한테도 '출세작'이 된 9.17 평양선언은 일차적으로는 정부 수반인 고이즈미 총리가 만들어낸 결과물이지만, 아베의 입장에서는 자기가 만들어낸 작품이라고 봐도 될 만한 이유가 있었다. 납치 사실을 인정할 마음이 없었던 김정일이 갑자기 생각을 바꾸게 된 데에 아베 관방차관의 역할이 컸다는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평양에서 큰소리로 말한 결과
 

아베 신조 총리의 2006년 모습. ⓒ 위키백과(퍼블릭 도메인)

  
2002년 9월 17일 아침, 도쿄역 인근에서 주먹밥 도시락을 단체 구입해 평양으로 날아간 고이즈미 일행은 백화원초대소 영빈관에서 김정일 측과 오전 회담을 한 뒤 12시 5분부터 주먹밥을 먹었다. '평양에서 먹는 식사는 믿을 수 없다'는 고이즈미 때문에 도시락까지 싸들고 비행기를 탔던 것이다. 이들은 대기실에서 자기들끼리 점심 식사를 해결했다. 도시락 싸들고 남의 집에 가서 자기들끼리 식사하는 특이한 풍경이 연출됐던 것이다.

오전 회담이 끝날 때만 해도 김정일은 납치 문제를 인정하지 않았다. 오후 회담에서 그의 태도가 바뀔 가능성도 감지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점심식사를 하면서 아베가 발휘한 '기지'가 일본의 외교적 승리에 기여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인터뷰를 기초로 아베의 전기를 집필한 노다니엘 교토산업대 객원연구원의 <아베 신조의 일본>에 그 이야기가 소개돼 있다.

"이때 아베는 그 방의 대화가 도청된다는 생각에 '납치에 대한 자세한 경위(해명)와 사과가 없다면 평양선언의 조인은 다시 하기로 하고 바로 돌아갑시다'라고 큰소리로 말했다는 것이다. 결국 점심 후의 오후 회담에서 김정일이 '사과'라는 말을 하게 된 것은 이때의 발언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이 책에 인용된 공작원 출신 탈북자 장철현씨는 '실제로 북한 측이 아베의 발언을 들었다'고 진술했다. 아베의 발언을 도청한 북한 측이 수교와 경협을 위해 태도를 갑자기 바꿨다는 것이다.

'납치 문제를 인정하지 않으면 그냥 돌아가자'는 발언이 정말로 김정일에게 전달됐는지, 전달됐다면 어느 정도나 영향을 끼쳤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하지만 그로부터 5년 전인 1997년부터 납치 피해자 가족회의 발족을 주도하는 등 납치문제에 적극성을 보인 아베가 회담 참가자들에게 압박을 가한 게 김정일의 태도 변화를 유도했을 가능성은 있다.

중요한 것은, 아베는 자신의 발언이 김정일에게 전달돼 평양선언에 영향을 줬다고 믿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 그의 입장에서는 2002년 그날이 한층 더 의미 있게 기억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후속 출세작 혹은 망신작의 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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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15일 일본 도쿄의 '닛폰부도칸'(日本武道館)에서 열린 태평양전쟁 종전 74주년 '전국 전몰자 추도식'에서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기념사를 하고 있는 모습. ⓒ 연합뉴스=EPA

 
지금 아베 신조는 역사적인 과업을 준비하고 있다. 내년 도쿄 올림픽을 계기로 헌법 제9조를 개정해 '전쟁할 수 있는 나라'로 만들고 군사대국화의 길로 나아가는 한편, 자기 나라를 국제연합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반열에 올려놓는 것이다.

그가 그 과업을 이루기 위해 반드시 성사시켜야 할 '후속 출세작'이 또 하나 있다. 지금 진행 중인 한국과의 분쟁에서 승리해 자기 나라의 전범 이미지를 누그러트리는 일이다. 전범 이미지를 그대로 가진 채 군사대국화로 나아가면 국제적 반발이 심할 뿐 아니라 안보리 상임이사국도 되기 힘들기 때문이다. 아베가 지금의 한일 분쟁에 목숨을 걸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일본이 강제징용과 위안부 문제에 대해 책임이 없다는 점을 인정받지 못하면 전범 이미지를 약화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로서는 경제보복이라도 가해서 한국이 더 이상 강제징용이나 위안부 문제를 제기하지 못하도록 입을 틀어막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지금 한국을 상대로 도발하는 싸움은 그의 또 다른 출세작을 성공시키기 위한 도전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2002년과 달리 오늘날의 아베 신조한테는 결정적으로 불리한 제약이 있다. 2002년엔 북한 최고지도자가 납치 사실을 인정했기 때문에, 아베가 이를 명분으로 반(反)북한 여론을 고조시키며 우익 지도자로 올라설 수 있었다. 김정일의 태도 변화로 북한이 가해자가 되고 일본은 피해자가 됐기에 일본이 도덕적 명분을 쥘 수 있었던 것. 확고한 명분을 차지했기 때문에 일본 국민들이 아베 신조와 우익을 중심으로 뭉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아베가 경제보복 등의 방법으로 한일 갈등을 심화시키면 시킬수록 일본의 전범 이미지만 오히려 더 부각되게 돼있다. 일본이 한국을 압박하면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위안부나 강제징용 문제가 두드러질 수밖에 없는 이 상황에서, 한국이 갑자기 가해자로 둔갑하고 일본이 피해자로 둔갑하는 일은 발생하기 어렵다. 납치 문제 때와는 차원이 다른 싸움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명분을 얻기 힘든 싸움에 아베가 뛰어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베 신조는 한국과의 분쟁에서만큼은 출세작을 일궈내기가 어려워 보인다. 출세작이 아니라 오히려 '망신작'을 향해 달려가는 길이 될 공산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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