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함도 강제징용에 원폭 피해까지... 한 남자의 삶

일본인 기무라씨가 기록한 강제징용·원폭피해자 고 서정우씨의 일생

등록 2019.09.17 10:29수정 2019.09.17 10:29
0
원고료로 응원

서정우씨가 돌아가셨을 때 만든 추도문집 표지 ⓒ 기무라

"안녕하세요? 추석 명절 잘 지내고 계시죠? 저는 지금 14살 때 징용당해 군함도에서 석탄 캤던 서정우씨 고향인 의령에 갈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17일이에요. 메일주소 주시면 서정우씨와 생전 인터뷰(1983년 7월 3일)한 녹취록을 보내드리겠습니다."

최근 일본 나가사키시에 사는 기무라씨에게서 온 메시지 내용이다. 기무라씨와 필자의 인연은 2015년에 나가사키 범선 축제(4.25~4.29)에서부터 시작됐다. 당시 나가사키 범선 축제에 초대받은 코리아나호가 여수를 떠나 나가사키 항구에 도착하자 맨 먼저 찾아와 한국말로 인사한 분이 기무라씨다.

한국 사랑한 기무라... '위안부' 피해자와 원폭희생자 모임 참석하기도
  

벌교에 있는 <태백산맥> 문학관 앞에서 기념촬영한 기무라씨 ⓒ 오문수

필자와 함께 벌교 <태백산맥> 문학관을 방문해 조정래 작가가 쓴 육필원고16500매 옆에선 기무라씨 ⓒ 오문수

한국말이 능통한 기무라씨. 알고 보니 도쿄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후 나가사키 시내의 한 고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다 정년퇴직한 교사 출신이다. 퇴직 후 우연히 한국문화원에 들렀다가 한국말을 배우기 시작해 한국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그가 읽은 소설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책은 <태백산맥>이다. 전편을 두 번이나 통독한 그는 몇년 전 필자와 함께 벌교를 방문해 조정래 작가 쓴 <태백산맥> 현장을 찾았다. <태백산맥> 속에 나오는 현장을 필자보다 더 잘 아는 그를 보며 한국을 얼마나 사랑하는 지 짐작할 수 있었다. 본인 스스로 "지한파"라고 말하는 그는 아베의 정책을 지지하지 않는다.
    

나가사키 원폭기념관을 안내하던 기무라씨가 동행했던 이효웅씨 한테 한국인 원폭피해희생자 추도 기념비에 대해 설명해주고 있다. 당시 나가사키현에는 7만여명의 한국인이 살고 있었고 2만명의 한국인 피폭자 중 1만명이 사망했다. ⓒ 오문수

1년 중 많은 시간을 한국에서 보내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위한 모임에 참석하기도 했다. 기무라씨는 한국을 여러 차례 방문했다. 2007년 '스톤 워크 코리아'(Stone Walk Korea) 행사가 한국에서 열렸을 때는 원폭희생자 마을이 있는 합천을 거쳐 지리산과 남원, 광주를 경유해 보라산역에 평화를 위한 비석을 세우고 금강산까지 다녀왔다.

'스톤 워크(Stone Walk)'란 미국 평화운동단체들이 전쟁으로 무명의 민중들이 많이 죽은 것을 사죄하기 위해 시작한 반전평화운동이다. 기무라씨는 틈만 나면 경남 합천의 원폭희생자 마을에서 봉사활동을 한다. 그가 서정우씨를 만나 녹취한 내용을 바탕으로 서정우씨의 삶을 재구성했다.

14살에 징용, 군함도에서 일하다 나가사키에서 원폭 피해

경남 의령이 고향인 서정우는 1928년 10월 2일생이다. 소농의 장남으로 태어났지만 4살 무렵 부모님이 나고야로 떠나자 할아버지가 길러주셨다. 할아버지 작고 후 작은 할아버지 댁에 맡겨진 그는 매일 산에 나무하러 가거나 소먹이로 줄 풀 베는 게 일과였다. 14살 되던 어느날 면에서 징용쪽지가 날아와 연행되었다. 면에서 강제로 징용된 2명이 시청에 도착하니 14~20살 정도의 청년들이 수천 명이나 모여 있었다.


부산으로 이동한 일행은 연락선을 타고 시모노세키까지 이동했다. 나가사키에 끌려온 사람은 300명 정도였고 그들은 종착역인 하시마(군함도)로 이동했다. 그는 나고야에 부모님이 계실 뿐만 아니라 사세보에도 친척이 있었기 때문에 탈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군함도에 도착했을 때 꿈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탈출 불가능한 섬 군함도... 007영화의 배경으로도 사용되기도

군함도를 방문해보지 않은 사람은 나가사키에서 가까우니 헤엄쳐 갈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의문을 던질 수 있다. 하지만 필자가 군함도에 내려 섬을 둘러보고 섬에 부딪히는 파도를 보며 "탈출이 불가능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군함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군함도 모습. 여수 오동도의 절반크기 밖에 안되는 조그만 섬에 9층짜리 아파트를 짓고 5천명이상이 살았다는 건 양질의 석탄이 생산됐다는 걸 의미한다. 이곳에서 생산된 석탄은 인근 미쓰비시 조선소에서 사용했다. 서정우씨 기억에 의하면 500명 이상의 조선인 징용자가 끌려와 노역을 했다고 한다 ⓒ 오문수

폐허가 된 군함도 모습으로 조그만 섬에 9층짜리 아파트까지 있었다. 007영화를 촬영하기도 했다. 서정우씨는 운좋게도 이곳을 빠져나갔지만 인근 미쓰비시 조선소에서 원폭피해를 입었다. ⓒ 오문수

군함도는 남북으로 약 480m, 동서로 약 160m, 둘레 약 1200m, 면적 약 6300제곱미터의 작은 해저 탄광섬이다. 여수 오동도의 절반 크기 밖에 안 되는 섬에 9층 아파트가 지어졌다는 건 이 섬에서 양질의 석탄이 나왔다는 뜻이다. 이 섬에서 나온 양질의 석탄은 나가사키에 있는 미쓰비시 조선소에서 사용했다.

1891년부터 1974년 폐광까지 약 1570만 톤이나 석탄을 채굴한 광부들은 해면 아래 1000m 이하 지점까지 파고 들어갔다. 경사는 급했으며 온도 30도, 습도 95%라는 악조건 하에서 가스 폭발 등 위험과 싸워야 했다.

좁은 섬에서 많은 사람이 생활하기 위해 1916년에는 일본에서 최초로 철근 콘크리트의 고층 집합 주택이 건설됐다. 전성기에는 5300명이 넘는 사람이 살아, 인구 밀도가 당시 도쿄 도의 9배나 달했다. 서정우씨가 군함도에 살았던 기억을 더듬어 증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81년 <세계사람들>이라는 영화를 촬영하기 위해 군함도에 가고 있는 서정우씨 모습 ⓒ 기무라

여수 오동도의 절반 크기 밖에 안되는 군함도에 9층짜리 아파트가 있었고 학교와 병원도 있었다고 한다. 아이들이 즐겁게 줄넘기 놀이를 하고 있는 땅밑 지하갱속에서는 한국과 중국에서 끌려온 노무자들이 석탄을 캐고 있었다. ⓒ 오문수

"우리 조선인은 모퉁이 구석 2층 건물과 4층 건물에서 지냈습니다. 한 사람이 다다미 한 장 넓이도 차지할 수 없는 좁은 방에 7~8명 함께 들어가 있었습니다. 저는 쌀자루 같은 옷을 받아 입고 도착한 다음날부터 일을 해야 했습니다. 이 바다 밑이 탄갱입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수직갱도 속 깊은 곳으로 내려가면 이래쪽은 석탄이 착착 운반되어 넓지만 굴착장으로 가면 엎드려서 파낼 수밖에 없는 좁은 곳입니다. 덥고 고통스럽고 피로한 나머지 졸음이 오고, 가스도 쌓이곤 했습니다. 게다가 낙반 사고로 한 달에 4~5명은 죽었을 겁니다."

"중노동에 식사는 콩깻묵 80%, 현미 20%로 된 밥과 정어리를 통째로 삶아 부순 것이 반찬이라 저는 매일 설사를 해서 무척 쇠약해졌습니다. 아파서 일을 쉬려고 하면 관리사무소로 끌고가 '네, 일하러 가겠습니다'라고 말할 때까지 때렸습니다."


그는 멀리 고향 쪽 바다를 바라보며 몇 번이나 바닷물에 뛰어들어 죽으려고 했었다. 동료들 가운데 자살한 사람이나 헤엄쳐 도망가려다 익사해 죽은 사람 등이 40~50명 정도가 됐다. 천운이었을까? 그는 5개월 후 미쓰비시 기숙사로 이동 명령을 받아 섬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미쓰비시 중공업에서 서정우씨가 맡은 일은 기구 등의 이음매를 단단히 조이는 일이었다. 중노동이었지만 군함도 시절과는 딴판이었다. 흰쌀밥에 말고기, 고래고기도 나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전 7시 반경에 일렬로 줄세워서 조선소로 향하는 도중에는 사방에 헌병이 따라붙어 대열을 벗어나면 가차없이 발길질을 했다. 게다가 담으로 둘러싸인 기숙사에도 감시하는 사람이 빙빙 돌고 있으니 탈출할 수 없었다.

점차 공습이 심해지고 소이탄이 떨어지며 사이렌이 울리면 방공호에 숨었다가 나오기를 몇 번 반복하던 8월 9일, 커다란 미군 비행기 B29가 날아와서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번쩍하고 빛이 나던 순간 천지가 진동하는 폭음소리가 들렸다.

유리가 깨지고 막사가 무너지고 , 여기 저기서 불길이 치솟으며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의 엄지발가락에도 철판이 날아와 부상을 입었다. 운이 좋았다고나 할까? 그는 출근했기 때문에 살았고 기숙사에 남아있던 100명은 죽었다.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직후 살아남은 여학생이 자신이 살았던 집을 찾아왔지만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기무라씨 설명에 의하면 검게 타죽은 시체가 어머니였을 것이란다 ⓒ 오문수

도로정비 명령을 받은 그가 현장에 가니 타죽은 동물이 개인지, 돼지인지, 말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어 있었다. 도시에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사람이나 동물의 사체 냄새가 가득했다. 불타서 허물어진 전차에는 완전히 타버린 사체가 뒹굴고 있었다.

1945년 8월 15일 천황의 방송이 나온 후 그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동료들은 하나 둘 귀국행 배를 탔다. 지인이 서씨에게 귀국을 권했지만 작은할아버지도 돌아가셨고 부모님이 나고야에 계셨기 때문에 거절했다.

그는 포장마차를 운영한 자금으로 밑천을 마련해 양복점을 열기도 했지만 일본인 점원한테 사기를 당해 무일푼이 됐다. 돈을 벌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하던 어느날 기침을 하다 세숫대야 절반을 채울 정도로 피를 쏟았다. 그의 몸이 이렇게까지 된 것은 군함도의 탄갱, 조선소의 강제노동, 원자폭탄 후유증 때문이었다.

객혈은 반년 만에 멈췄지만 같이 입원했던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 그 후 31년 동안 여러 요양소를 전전하고 있었다. 죽으라는 법은 없는가 보다. 그에게도 아내가 생겼다. 8년 전 병원에서 알고 지내던 일본인 여성과 결혼해 쌍둥이를 낳았다. 그가 그의 처지를 말했다.     

"아이들은 저를 아버지, 아버지 하며 따랐지만 호적은 집사람에게 올려두었어요. 이유를 아시죠? 학교에 가면 '조선인의 자식'이라고 따돌림당할 게 분명해서요."

조선인들이 차별받는 것에 분개하는 서정우

일본에 끌려와 군함도 탄갱, 미쓰비시조선소의 중노동 , 원자폭탄 피폭 희생자 등 수많은 시련을 겪었던 서정우씨는 일본인들이 조선인들을 차별하는 것에 대해 분개하고 있었다.
 

기무라씨와 쌍둥이 아들 모습. 기무라씨는 서정우씨의 큰아들(오른쪽)마쓰무라 아사오씨와 함께 서정우씨의 고향인 의령을 방문해 성묘할 예정이다. ⓒ 기무라

"일본인들이 조선인을 차별하는 것에 대해 할 말이 많아요. 조선인들을 차별하는 것은 전부 일본 정부의 책임이라고 생각해요.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고 우리를 강제 연행했잖아요. 게다가 원폭까지 맞게 했어요. 이런 사실을 잘 아는 일본 정부가 왜? 앞장서 차별을 없애도록 노력하지 않는 겁니까? 왜? 가까이 있는 조선인들에게 친절하게 대하라고 지도하지 않는 겁니까? 관동대지진 때 돌았던 악질적인 소문이나 조선인 학살에 대해서도 얼마나 반성하고 있습니까?"

"차별없는 세상,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죽을 때까지 운동하고 싶다"던 그는 54세의 나이에 영면(2001. 8. 2.)했다. 기무라씨와 큰아들 마쓰무라 아사오씨는 의령에 처음으로 방문해 한많은 생을 살다간 서정우씨 묘소에 술 한 잔 올릴 예정(19일)이다.
덧붙이는 글 여수넷통뉴스에도 송고합니다
#서정우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교육과 인권, 여행에 관심이 많다. 가진자들의 횡포에 놀랐을까? 인권을 무시하는 자들을 보면 속이 뒤틀린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검찰 급했나...'휴대폰 통째 저장', 엉터리 보도자료 배포
  2. 2 재판부 질문에 당황한 군인...해병대 수사외압 사건의 퍼즐
  3. 3 [단독] 윤석열 장모 "100억 잔고증명 위조, 또 있다" 법정 증언
  4. 4 "명품백 가짜" "파 뿌리 875원" 이수정님 왜 이러세요
  5. 5 '휴대폰 통째 저장' 논란... 2시간도 못간 검찰 해명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