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 때리기 위해 체 게바라까지 끌어들인 '조선일보'

[역사로 보는 오늘의 이슈] 엮어도 너무 엮은 류근일 칼럼

등록 2019.09.19 14:02수정 2019.09.19 15:37
25
1,000
보수의 위기감이 대단하다. 미군이 나서서라도 지금의 흐름을 뒤집어주기를 바라는 열망을 이따금 표출하고 있다. 지난해 가을 이후에는 예비역 장성들이 9.19 남북군사합의의 파기를 부르짖으며 정치적 항거를 촉구하는 일도 있었다. 뉴라이트(신우익) 인사인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도 <반일종족주의>에서 "망국 예감"을 운운하며 정치권과 학계의 결단을 호소하고 있다.

그들이 정치적 생존을 목적으로 국민과 진보 진영을 갈라놓고자 유포시키는 논리가 있다. '혁명가나 개혁가는, 부유했어도 부유해져도 안 된다'는 논리다. 정치적 변화 이전에 부유하게 살았거나 그것을 계기로 부유하게 된 사람들은 타락한 사이비나 다름없으므로 함께하지 말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퍼트리고 있다.

지난 9월 17일자 <조선일보> '류근일 칼럼'도 그런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 칼럼의 제목은 '1975 사이공이냐, 2019 홍콩이냐'다.

'평균 이상 생활수준 누리는 자가 혁명? 그건 위선'이라는 칼럼 
 
a

9월 17일 치 '조선일보'에 실린 류근일 칼럼 '조선일보_1975 사이공이냐, 2019 홍콩이냐'. ⓒ 조선일보PDF


지금은 호치민으로 불리는 사이공은 친미국가인 남베트남의 수도였다. 1975년 사이공이 함락되면서 남베트남은 북베트남에 흡수됐다. 남베트남처럼 공산주의한테 항복할 것이냐, 아니면 지금의 홍콩인들처럼 공산주의 중국에 맞설 것이냐고 이 칼럼은 묻는다.

칼럼은 당연히 후자 쪽 답변을 기대하고 있다. 대한민국에는 공산주의자는 있어도 공산주의 세력이라 할 만한 이들이 없는데도, 이 칼럼은 대한민국에서 진행 중인 흐름을 공산주의로 간주하고 그에 대한 저항을 촉구하고 있다. "범국민 투쟁 대오를 꾸려야 한다"라고 칼럼은 말한다.

칼럼은 국민들이 저항운동에 나서야 하는 이유를 제시했다. 지금 대한민국을 이끄는 이른바 586 그룹이 '사이비'이기 때문이라는 것. 부유하게 살았거나 부유해지고 있는 이들은 사이비이므로 이들을 따르는 것은 악이요 재앙이라는 것이다. 칼럼 부제목도 '체 게바라가 그랬듯 타락한 혁명은 그 역시 악이요 재앙'이다.

칼럼은 타락한 혁명가 혹은 개혁가가 얼마나 위험한가를 사례로 제시한다. 조국 법무부장관에 비견될 만한 인물로 이 칼럼에서 거론된 이는 두 사람이다.

"조국이란 캐릭터와 삶을 바라보자면, 머릿속에 또 다른 두 인물이 떠오른다. 영국 코미디언 러셀 브랜드, 그리고 그가 존경하는 쿠바 혁명가 체 게바라가 그들이다."

<조선일보> 칼럼이 러셀 브랜드와 체 게바라를 '사이비'로 매도하는 근거가 있다. 그들이 위선자였다는 점이다. 변혁을 꿈꾸면서도 평균 이상의 생활수준을 누렸다는 게 그 위선의 근거. 칼럼은 러셀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러셀 브랜드는 성공한 연예인, 따라서 부유한 사람이다. 그런데도 그는 '세계에서 가장 이름난 반(反)자본주의자'라는 빈정거림을 듣는다. 그는 몇 해 전, 1960년대 미국 흑인 과격파 맬컴 X와 체 게바라가 등장하는 공연물 '구세주 콤플렉스'를 가지고 세계를 돌기도 했다."

러셀이 부자이면서도 자본주의에 대항하므로 위선자라는 논리다. 부자의 특권을 내려놓지 않고 변혁을 외치기 때문이란다. 칼럼은 1959년 쿠바혁명의 2인자인 체 게바라에 대해서도 비슷한 주장을 편다.

"재미있는 것은 러셀 브랜드와 체 게바라가 닮았다는 점이다. 러셀 브랜드가 부자이면서도 자본주의를 매도하듯, 체 게바라 역시 극렬 혁명가이면서도 집권 후엔 엄청 사치스럽게 살았고 지독한 폭군 노릇을 했다고 한다. 체 게바라는 쿠바 최초의 정치범 수용소를 만들었다. 반대자를 500명 이상 처형했고, 쿠바 민생 경제를 사회주의로 파탄시켰다."

피델 카스트로의 증언 
 
a

피델 카스트로의 1959년 모습. ⓒ wiki commons

 
쿠바혁명 직후에도 위와 같은 수용소 이야기가 있었다. 피델 카스트로가 이끄는 혁명정부가 저항세력을 수용소에 감금하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그런데 그 수용소는 실상은 군부대였다. 일반 군복무에 투입하기 곤란한 사람들을 배치하는 곳이었다. 프랑스 교수인 이냐시오 라모네와의 대담집인 <피델 카스트로: 마이 라이프>에서 카스트로는 이렇게 회고했다.

"이 세 가지 범주에 속하는 사람들을 데리고 우리는 생산보조부대를 창설했습니다. 세 범주에 속한 사람들이 가는 부대였습니다. 학업 수준이 낮아서 무기를 제대로 사용할 수 없는 사람들, 종교적 믿음에 바탕을 두고 양심에 따라 병역을 거부하는 사람들, 또는 적절하지 못한 육체적 조건에 있는 남자들, 즉 동성애자들이었죠."

이냐시오 교수가 "수용소가 아니었습니까?"라고 묻자 카스트로는 "그런 부대들은 전국에서 창설됐고, 노동을 했습니다"라며 "주로 농사를 도와주었죠"라고 답했다. 생산보조부대를 수용소로 오인하는 당시의 일부 시각이 <조선일보> 칼럼에 그대로 실린 것이다.

칼럼에서는 수용소 문제 외에 정치범 처형과 사회주의로의 파탄도 비판했다. 하지만 이 비판에는 맹점이 있다. '반대자를 500명 이상 처형했다'는 표현은 혁명 뒤에 의례히 나타나는 구세력 숙청을 의미하는 말이다. '쿠바 민생 경제를 사회주의로 파탄시켰다'는 표현은 '쿠바 경제를 사회주의로 전환했다'로 바꿔 읽어야 한다.

또 칼럼은 체 게바라가 타락한 혁명가였음을 보여주고자 쿠바계 미국인의 증언을 들려준다. 쿠바 망명객 출신의 작가인 움베르토 폰토바의 증언이 그것이다.

"그의 저택엔 보트 선착장이 있었다. 초대형 수영장, 욕실 7개, 사우나, 마사지 살롱, 미국에 특별히 주문해서 만든 대형 TV, 수입 식물이 가득한 정원, 열대어가 헤엄치는 연못, 앵무새 등 진기한 새들, 마치 <천일야화>에나 나올 법한 집이었다."

이 증언을 소개한 뒤 칼럼은 "이게 사실이라면 체 게바라는 다중인격자, 겉과 속이 다르고 언행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 캐비어 좌파였던 셈"이라고 말한다. 움베르토의 증언이 사실이라면 체 게바라는 '강남 좌파'와 다를 게 없다는 이야기다. 철갑상어 알을 즐겨 먹는 호화 생활을 하면서도 입으로만 사회주의를 떠벌리는 위선적 좌파라는 뜻.

하지만, 움베르토의 증언은 사실에 가까울 가능성이 낮은 편이다. 쿠바혁명 당시 그는 다섯 살이었다. 그리고 일곱 살 때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갔다. 쿠바 망명객 자격으로 혁명 2인자의 사생활에 관해 신빙성 있는 증언을 내놓을 만한 조건이 아니었던 셈이다. 그래서 그런 걸까? <조선일보> 칼럼은 '이게 사실이라면'이란 단서를 남겨놨다.

체 게바라가 위선자인지 아닌지 판단하려면, 일곱 살 때 부모 손을 잡고 쿠바를 떠난 움베르토의 말을 들을 게 아니라, 혁명 성공 뒤에 체 게바라가 어떤 행로를 보였는지를 우선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체 게바라, 혁명의 여정 
 
a

체 게바라의 1959년 모습. ⓒ wikimedia commons

 
그는 혁명 6년 뒤인 1965년,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고 새로운 혁명을 찾아 길을 떠났다. 쿠바에 이어 콩고와 볼리비아에서도 혁명에 도전했다. 그랬다가 1967년 39세 나이로 전사했다. 이 행적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열정적이고 진심 어린 혁명가였는지를 충분히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점은 혁명 동지인 카스트로도 잘 알고 있었다. 혁명 후에도 체 게바라는 카스트로에게 새로운 혁명을 끊임없이 제안했다. 위의 대담에서 "승리를 거둔 후에 체 게바라는 쿠바를 떠나 아르헨티나에서 혁명을 하고 싶다고 고집했습니까?"라는 질문이 나오자 카스트로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 약속은 유지됐고, 나는 항상 '그 약속은 지켜질 테니 걱정 마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체는 혁명에 대한 거대한 열정으로 가득 싸여 있었습니다."

체 게바라는 혁명 후에 장관급이 돼 국가 경영에 참여했다. 그랬기 때문에 그의 생활수준은 일반 국민들과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움베르토가 말한 수준은 아닐지라도, 상당히 괜찮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생활 수준이 그의 열정을 식히지는 못했다. 그는 또 다른 혁명들로 뛰어들었고, 그로 인해 숨이 끊어졌다. 따라서 혁명 이후의 생활수준을 근거로 그를 타락한 혁명가로 몰아붙이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조선일보>의 진짜 의도는 무엇일까

지금까지의 역사를 돌아보면 상당수의 혁명가 혹은 개혁가들은 중산층 이상의 경제적 배경을 갖고 있는 이들이 많았다. 변혁을 이끄는 세력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리나라를 보면, 남북국시대(발해·신라) 말기에 등장해 후삼국 시대를 열었던 지방 호족, 고려 말에 등장해 조선을 건국한 신진사대부, 조선 중기에 등장해 300년간 지배한 사림파(유림파) 등을 사례로 꼽을 수 있다. 서양사는 어떨까. 프랑스혁명 이후의 부르주아를 생각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들은 기존의 주류 집단을 전복하기 위해 민중의 지원을 받았다. 그랬기 때문에 그들은 새로운 세상 하에서 민중의 지위를 어느 정도 향상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 인류가 이제껏 정치적으로 진보해온 방식 중 하나다. 
  
만약 지금 우리 눈앞에서 표출되는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대중의 열망이 한층 더 심화되고 그것의 실현을 뒷받침할 만한 기술적 변화가 수반된다면, 나중에는 민중이 독자적으로 혁명을 일으킬 수 있게 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적어도 현재까지는 중산층 이상의 개혁그룹과 민중, 두 계층의 분업 하에 변혁이 이뤄져 왔다. 그렇기 때문에 혁명가나 개혁가가 부유했었다, 혹은 변혁 뒤 부유한 생활을 누렸다는 점을 근거로 위선적이라고 비판하는 건 설득력이 떨어진다. 

<조선일보>의 칼럼의 진짜 의도는 무엇일까. 변혁하려는 사람의 배경을 곡해해 변혁에 대한 편견을 조장하는 것 아닐까. 개혁 그룹과 민중을 분리하려는 것 아닐까. 나아가 이 사회의 발전과 진보를 막는 데 있는 것 아닐까.

'1975년 사이공'이냐 '2019년 홍콩이냐'를 따질 상황이 아니다. 그냥 '2019년 서울'만 고민하면 된다.
 
a

지난 17일 국회를 방문한 조국 법무부 장관이 기자들의 질문공세를 받고 있다. ⓒ 남소연

댓글25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000 응원글보기
원고료주기
네이버 채널에서 오마이뉴스를 구독하세요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FM101.9 (목)11시25분경. (저서) 역사 추리 조선사, 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 못하나,발해고(4권본,역서),패권 쟁탈의 한국사,신라 왕실의 비밀,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상고사(역서),조선노비들,왕의 여자,철의제국 가야,최숙빈,한국사 인물통찰,동아시아 패권전쟁 등. www.kimjongsung.com

AD

AD

인기기사

  1. 1 문재인 정부의 역대급 국방비, 한숨이 나온다
  2. 2 지뢰 묻혔는데 직진 명령? 중국인 병사는 이렇게 한다
  3. 3 여자의 몸은 어디까지 음란한 걸까
  4. 4 "지금 딱 한 사람 설득하라면... 윤석열이다"
  5. 5 윤석열 총장, 정녕 이것보다 조국 먼지떨이가 더 중한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