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의 새로운 핫 플레이스 '천년 목사고을' 나주

금성관 찍고 난파·남파고택까지

등록 2019.09.22 11:57수정 2019.09.22 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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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된 옛 나주읍성의 동쪽 동점문. 나주시내에는 옛 나주읍성의 동서남북 4대 문이 복원돼 있다. ⓒ 이돈삼


전라남도 나주가 남도의 새로운 핫 플레이스(hot place)로 떠오르고 있다. 북한산과 한강을 배산임수 지형으로 삼은 한양에 빗대 '작은 한양'으로 불렸던 나주다. 뒤로는 금성산을, 앞으로는 영산강을 두고 있다. 옛 나주읍성의 역사성과 상징성을 지닌 '작은 궁궐' 금성관도 있다.

나주는 오래 전 전라도의 행정과 경제·군사·문화의 중심이었다. 983년 고려 성종 때 설치한 나주목이 913년 동안 유지됐다. 당시 나주는 인구로 전국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혔다. 흥선대원군이 '나주 가서 세금 자랑하지 말라'고 했을 정도로 세금을 많이 냈다. 둘레 3679m의 나주읍성이 그 증표다. 면적이 97만㎡로 수원화성보다도 두 배 넓었다.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닌 나주이지만, 한동안 여행자들의 마음에서 한걸음 비켜서 있었던 게 사실이다. 치장하지 않은 탓이었다. 요즘엔 하나씩 치장을 하면서 남도의 새로운 여행지로 떠오르고 있다. 눈도장 찍고 발걸음 할 데 많은 나주다.
  

금성관의 밤 풍경. 금성관은 옛 나주목의 관아였다. 그 역사성과 상징성으로 최근 보물로 지정 예고됐다. ⓒ 이돈삼

   

목사내아 담장에 서 있는 수령 500년 넘은 벼락 맞은 팽나무. 소원을 들어주고,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나무다. ⓒ 이돈삼

 
옛 나주읍성의 금성관과 목사내아가 첫손가락에 꼽힌다. 금성관은 옛 나주목의 관아였다. 관찰사가 업무를 보고, 조정에서 내려온 사신들이 묵어갔다.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와 궐패를 두고 궁궐을 향해 예를 올리는 망궐례도 행해졌다. 그 역사성과 상징성 덕에 최근 보물로 지정 예고됐다.

금성관 옆 목사내아는 나주목사의 살림집이었다. 지은 지 200여 년 됐다. 건물이 마당의 호두나무를 중심으로 ㄷ자로 배치돼 아늑한 느낌을 준다. 일제강점기에 군수들의 관사로 쓰이면서 변형된 것을 복원했다.

목사내아 담장에 수령 500년 넘은 '벼락 맞은 팽나무'도 있다. 저마다의 소원을 들어주고, 행운을 가져다 준다는 나무다. 옛 읍성의 4대문, 동점문과 서성문·남고문·북망문도 복원됐다.
  

수령 400년 된 비자나무와 어우러지는 나주향교. 옛 나주읍성의 서성문에서 가까이 있다. ⓒ 이돈삼

 
서성문에서 가까운 데에 있는 나주향교의 격도 높다. 앞쪽에 대성전을 중심으로 한 제사공간을, 뒤쪽에 명륜당을 중심으로 공부를 가르치는 이른바 전묘후학(前廟後學)의 모양새를 하고 있다. 전국의 향교 가운데 가장 큰 규모에 속한다. 불에 탄 한양의 성균관을 복원할 때 나주향교를 본떠 다시 지었다고 전해진다.

향교에 사마재(司馬齋)도 있다. 사마재는 생원과 진사 시험에 합격한 유생들이 공부하던, 요즘말로 특별반을 위한 공부방이다. 태조 이성계가 심었다는 수령 500년 된 대성전 앞 은행나무, 수령 400년 된 명륜당 앞 비자나무도 기품 있다.
  

한옥의 구들장과 툇마루, 일본식 기와와 창문, 서양식 방갈로를 가미한 목서원 풍경. 마당에 큰 금목서와 은목서가 서 있다. ⓒ 이돈삼

   

목서원의 밤 풍경. 한옥과 일본식, 서양식이 한데 어우러진 집이 색다른 느낌을 안겨준다. ⓒ 이돈삼

 
향교와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뉜, 복합문화공간 '39-17마중'도 특별하고 편안한 공간이다. 옛 건물의 정취를 고스란히 살리고 있다. 건물이 지어진 1939년의 정서와 문화를,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한 2017년이 마중 나가 되살린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여기에 난파고택이 있다. 난파 정석진이 쓰던 정자를, 그의 아들 정우찬이 아버지를 기리려고 다시 지었다. 한옥의 구들장과 툇마루, 일본식 기와와 창문, 서양식 방갈로를 가미한 집도 있다. 마당에 큰 금목서와 은목서가 있다고 '목서원'으로 이름 붙여졌다. 난파의 손자 정덕중이 혼자 된 어머니를 위해 지었다. 당시 전라도에서 유일하게 건축가 자격증을 갖고 있던 박영만에게 맡겼다고 한다. 지금은 게스트하우스와 카페로 활용되고 있다.


난파 정석진은 1894년 동학농민전쟁 때 농민군으로부터 나주읍성을 지켜낸 인물이다. 그 공로로 해남군수를 제수 받았다. 이듬해엔 단발령에 반발해 을미의병을 일으켰다가 참수를 당했다.
  

수령 600년 된 팽나무가 먼저 반겨주는 절집 다보사. 옛 절집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 이돈삼

   

나주성당에 있는 순교자의 기도상. 청동으로 만든 조형물이 천주교 박해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 이돈삼

 
39-17마중에서 가까운 데에 고찰 다보사가 있다. 수령 600년 된 팽나무가 반겨주는 절집이다. 여기에 있는 괘불이 보물로 지정돼 있다. 1745년(영조 21년)에 그려진 것이다.

기해박해와 병인박해 때 나주에서 순교한 천주교도를 기리는 나주성당도 있다. 순교자들이 겪은 사면초가의 상황을 표현한 빈 무덤 형태의 경당이 눈길을 끈다. 청동으로 만든 순교자의 기도상도 있다. 까리다스 수녀회의 한옥 건물도 독특하다.

밀양박씨 청재공파의 종가인 남파고택도 지척이다. 중요민속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남파고택은 1929년 광주학생운동과 엮인다. 당시 일본학생에게 머리채를 잡혔던 여학생 박기옥과, 일본 학생들과 충돌을 일으킨 남학생 박준채가 이 집에서 학교를 다녔다. 한국근대사에서 큰 역할을 했던 사람들이고 집이다.
  

중요민속문화재로 지정돼 있는 나주 남파고택. 밀양박씨 청재공파의 종가로 1929년 광주학생운동과 엮이는 집이다. ⓒ 이돈삼

   

홍기응 가옥의 사랑채 풍경. 가운데에 책을 보관하는 장서실을 따로 두고 있다. 나주 도래마을의 홍기응 가옥은 현존하는 풍산홍씨의 종가다. ⓒ 이돈삼

 
전통의 한옥마을도 있다. 다도면 풍산리에 있는 도래마을이다. 세월의 더께가 묻어나는 기와집이 즐비하고, 고샅은 구부러지는 돌담으로 이어져 있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까지 발길 닿는 곳마다, 눈길 가는 곳마다 예스러운 마을이다.

도래마을은 풍산 홍씨의 집성촌이다.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돼 있는 옛집이 많다. 홍기헌 가옥은 1790년에 지어졌다. 229년 됐다. 현존하는 풍산홍씨의 종가인 홍기응 가옥은 1892년에 지어졌다. 사랑채 한쪽에 책을 보관하는 장서실을 따로 두고 있다. 홍기창 가옥은 1918년에 지어졌다. 한국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이 지정한 시민문화유산 제2호 도래마을옛집도 있다.

마을의 누정도 눈여겨볼 만하다. 영호정은 조선시대에 학문을 익히고 과거시험을 준비하던 학당이었다. 양벽정은 양반들이 풍류를 즐기던 공간이다. 마을 뒷산에는 인공의 흔적을 최소화한 계은정이 있다. 마을 뒷산을 오르는 산책길도 다소곳하다. 달콤한 가을바람을 쐬며 뉘엿뉘엿 걸으면 더 좋은 마을이다.
  

나주 도래마을 풍경. 세월의 더께가 묻어나는 고샅을 따라 뉘엿뉘엿 걷다 보면 가을바람까지도 달콤하게 느껴진다. ⓒ 이돈삼

#도래마을 #난파고택 #남파고택 #나주성당 #금성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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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찰이 일상이고, 일상이 해찰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전남도청에서 홍보 업무를 맡고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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