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한 권을 읽는 데 2년이나 걸린 까닭

[마음으로 읽는 책] 고다 아야 '나무'

등록 2019.09.25 15:19수정 2019.09.25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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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그림 ⓒ 달팽이

 
똑똑 하는 소리가 드문드문 들려왔다. 사방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이 조릿대잎을 두드리는 소리였다. (14쪽)

우리 집에 있을 적에는 언제나 우리 집 나무 기운을 받아들이고, 우리 기운을 나무한테 보냅니다. 우리 집을 떠나 여러 고장을 돌아다닐 적에는 여러 고장을 싱그러이 보듬는 나무가 퍼뜨리는 기운을 헤아리면서, 여러 고장에서 살뜰히 피어나는 나무한테 반갑다는 눈빛을 띄웁니다.

나무 곁에 서서 줄기를 포근히 안으면 포근한 기운이 가슴을 거쳐 온몸으로 흐릅니다. 나무 앞에 서서 줄기에 손을 고요히 대면 고요한 기운이 손을 지나 온마음으로 물결칩니다. 저는 나무한테서 기쁜 웃음을 받고, 저는 나무한테 즐거운 노래를 띄웁니다.
 
나무가 목재로 쓰이기 이전의 살아 있는 모습에도 관심을 가져야 마땅하거늘 왜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 것인가. (47쪽)

<나무>(고다 아야/차주연 옮김, 달팽이, 2017)를 읽으며 생각했어요. 나무 한 그루가 얼마나 깊은 숨을 품고서 우리 곁에 있는가를 느끼고, 나무 한 그루 곁에서 얼마나 깊은 사랑을 지으면서 새롭게 나누는가를 돌아봅니다. 오롯이 나무한테 바치는 글이자, 옹글에 나무한테서 들은 이야기를 담은 책 한 자락입니다.


나무가 있기에 책걸상을 짜고, 집을 짓고, 종이하고 붓을 얻고, 땔감으로 겨울을 나고, 우리 터전을 푸르면서 맑게 돌보는 길을 누립니다. 그렇다면 우리 사람은 나무한테 무엇을 돌려줄까요? 우리 사람은 숲에 무엇을 심을까요?
 
나는 참지 못하고 나뭇조각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자폭한 듯 삼각형으로 갈라진 굽이는 강렬한 편백나무 향기를 내뿜었다. (68∼69쪽)

나무가 살 터를 자꾸 밀어없애거나 짓밟는 사람은 아닌가요? 나무가 자랄 땅을 쉬잖고 밀어붙이거나 짓이기는 사람은 아닌지요? 조그마한 씨앗 한 톨이 우람한 나무가 됩니다. 작은 사람 하나가 아름다운 마을을 이루고 사랑스러운 고을로 피어납니다. 나무도 숲이 되고, 사람도 숲이 됩니다. 이야기도 숲이 되고, 노래도 숲이 됩니다. 모두 숲이면서 빛입니다.
 
삼나무는 도대체 무엇을 양분으로 삼을까? 그것은 태양과 비, 즉 햇빛과 물뿐이다. (90쪽)

<나무>를 두 해에 걸쳐서 천천히 읽었습니다. 퍽 얇은 책이지만 한꺼번에 읽어낼 수 없었습니다. 나무를 이야기하기에, 몇 쪽을 읽고서 덮은 뒤에 우리 집 나무 곁에 다가가 눈을 감고서 줄기에 손을 대고 마음으로 말을 걸어 보았습니다. 어느 날은 골짜기 나무 곁에 맨발로 걸어가서 가만히 안아 보았습니다. 어느 날은 연필자루를 쥐다가 이 연필은 어느 숲에서 어느 나무였을까 하고 그려 보았습니다.
 
나무는 뿌리를 내리고 서 있을 때의 생명과 잘려서 목재가 된 이후의 생명 이렇게 두 번의 생명을 갖는다고 한다. (163쪽)
 

우리 집 나무 곁에 자리를 깔고서 책을 누리는 아이들. 책도 나무요, 나무 둘레에서 흐르는 기운도 고요합니다. ⓒ 최종규

 
도시라는 곳에 살 적에도 나무를 늘 만나고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도시라는 곳에 살 적에도 나무를 늘 만나고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마루'란 집에 널찍하게 있는 자리만이 아니라 '나무로 바닥을 댄 자리'였어요. 이제는 나무로 골마루를 까는 학교는 거의 사라졌으나, 제가 1980년대에 다닌 국민학교는 바닥을 나무로 깐 골마루가 있었습니다. 

나뭇바닥은 겨울에 그리 안 추웠습니다. 나뭇바닥에 가만히 앉거나 누우면, 겨울에도 어느새 따스한 기운이 올라왔고, 여름에는 나뭇바닥에서 시원한 기운이 올라오네 싶었습니다.
 
(나무는) 그저 젊은 목수를 압박하지만은 않는다. 압박하면서 그와 동시에 젊은 목수의 담력과 지혜를 키워 주고 있다. (170쪽)

생각해 보면 모든 책은 나무입니다. 아, 그렇지요. 우리는 이렇게 말해 볼 만합니다. "모든 책은 나무이다"라고요. 또는 "모든 책은 숲이다"라고요. 참말 그렇겠지요? 책이 있으려면 '책이 되어 주는 나무'가 있어야 하거든요.

오로지 이 나무만 생각하는 단출한 이야기를, 이 나무한테서 배운 할머니 이야기를, 나이가 참 많이 들어서 걷기도 힘든 할머니가 깊은 숲에 업혀서 들어가 나무 품에 안겨 눈물이 줄줄 흘렀다는 이야기를 고요히 읽어 봅니다. 우리도 나무 곁에 서기만 해도 나무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마음으로 듣고서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느낄 수 있을까요?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글쓴이 누리집(https://blog.naver.com/hbooklove)에도 실립니다.

나무

고다 아야 (지은이), 차주연 (옮긴이),
달팽이, 2017


#나무 #고다 아야 #숲책 #숲노래 #마음을 읽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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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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