뽕나무밭은 푸른 바다가 되고

[대전, 그곳이 알고 싶다] 대전형무소 기념 평화공원

등록 2019.09.25 16:48수정 2019.09.25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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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작가회의에서는 '2019 대전방문의 해'를 기념하여 연속기고를 시작합니다. 대전의 볼거리와 즐길거리, 추억담을 독자들과 나누고 대전이라는 도시의 정체성을 생각해보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합니다.[편집자말]

이사를 하는 날은 몹시 추웠다. 진눈깨비까지 질척거리며 내려서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었다. 새집으로 이사하는 기쁨보다 친구들과 헤어지는 슬픔이 더 컸던 열한 살 소녀인 나는 스산한 마음을 추스를 수가 없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휑하니 찬바람이 일었다. 이제 친구들에게 만화조차 그려줄 수 없다는 게 더없이 서글펐다.

이사하기 보름쯤 전부터 반 친구들은 내 옷자락을 붙들고 늘어졌다. 날마다 쉬는 시간이면 나풀거리는 드레스나 원피스를 입은 만화의 주인공을 그려대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건 얼마 있으면 만나지 못할 친구들에게 꽤나 인기 있는 꼬마 만화가이기도 했던 내가 건넬 수 있는 유일한 선물이었다.

아버지는 어린 우리 남매들을 데리고 집짓는 현장에 자주 가셨다. 벽 한쪽에 돌을 붙일 때도, 타일을 붙이고, 기와를 올릴 때도. 물론 상량식은 진심어린 마음으로 정성껏 올리셨다.

생애 처음 당신 이름으로 갖는 집에 대한 애착이자 자부심 같은 것이었을 테지만 따라가는 내 마음은 그리 즐겁지만은 않았다. 우선 동네가 싫었다. 허허벌판에 보이는 것이라곤 온통 채마 밭뿐인 휑뎅그렁한 곳이라니. 게다가 등을 돌려 바라보면 거대한 교도소가 위압적인 자세로 노려보곤 했다. 사람들 북적이고 집들이 촘촘히 들어선 정겨운 동네를 떠난다는 게 어린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오롯이 나만의 방이 생긴다는 기대감으로 버텨왔다.

그런데 막상 이사를 하고 보니 내 방을 갖게 된 것도 큰 위로가 되지 못했다. 도무지 무서워서 뒤를 돌아볼 수가 없었다. 푸른 죄수복을 입은 남자가 어디서든 불쑥 나타나 내 목덜미를 잡아챌 것 같은 공포감에 시달렸다. 새로 사귄 친구들이 들려주는 교도소에 관련된 소문들은 내 공포심에 불을 질렀다. 대개는 '교도소 밭에서 해골이 한 무더기 나왔다.' '담장을 넘어 도망간 죄수가 우리 동네에 숨어 있다' '사형당해 죽은 영혼이 귀신이 되어 학교 화장실에서 살고 있다' 등의 이야기들이었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도 용감하고 씩씩하게 이곳저곳 잘도 다니는 친구들이 몹시 부러웠다. 나는 앞만 보며 집 앞쪽으로만 걸어 다녔으니까. 어쩌다 큰 용기를 내어 뒤쪽을 바라보면 비탈진 능선으로 줄을 지어 걸어가거나, 밭에서 일을 하는 죄수들을 볼 수 있었는데 그때마다 푸른색의 기운이 온 몸을 서늘하게 조여 오는 것 같았다. 한편으로는 뭐라고 표현하기 어려운 슬픔 같은 감정이 마음 안쪽에 가만히 똬리를 틀고 앉아 있곤 했다.

이삼 년이 지나 내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는 드넓은 채마 밭에 모두 집들이 지어져서 더는 교도소 건물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망루는 여전히 음습하고 패악스러운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래도 잘 견디었다. 나는 더 이상 떠도는 괴담을 곧이곧대로 믿는 어린아이가 아니고 날로 쑥쑥 커가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어쩌면 교도소가 외곽으로 이사를 가고 그 자리에 큰 아파트 단지가 들어설지 모른다는 소문이 싹트기 시작할 즈음 우리 가족은 그 동네를 떠났다. 아버지를 잃어버린 곳에서 살고 싶은 의욕도, 살아야 할 이유도 없었다. 그리고 그 동네도 조용히 잊혀졌다. 내가 애써 아버지를 기억에서 지워내듯 그렇게.

*

내가 다시 그 동네를 찾은 건 서울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대전에 정착한 90년대 초반이었다. 딸아이가, 이사하던 때의 내 나이쯤에 가까워지던 무렵이었다.

세월의 간극만큼 '상전벽해'라는 말이 실감날 정도로 동네는 많이 변해 있었다. 두려움과 공포감의 대상이었던 교도소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소문대로 아파트가 들어섰다. 열한 살 소녀 눈에 거인 같아 보였던 망루는 고층아파트 그늘에 가려 초라하기 이를 데 없는 뒷방 늙은이처럼 한 구석에 부서지고 생채기 난 모습으로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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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형무소 기념 평화공원 ⓒ 대전시

 
요즘도 나는 일주일에 한번은 그 동네를 지나간다. 갈 때마다 골목을 꼭 바라보게 된다. 높은 담장 안의 침묵이 견고했던 동네는 무척이나 번잡스럽고 수다스러워졌다. 아파트 한쪽에서 늙어가는 망루와 갈증으로 허덕이는 우물터가 그곳이 옛 교도소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유일한 증거로 남아 '평화공원'이라는 이름으로 보존되고 있다. 내가 천방지축으로 뛰어다니고, 때로는 고뇌하고 아파하기도 했던 중촌동 409번지는 '맞춤패션 특화거리'가 되어 의상실과 직물점이 골목골목 빼곡하게 자리 잡고 있다.

두려움도 아픔도 시간이 지나면 추억이 된다. 아주 가끔은 쓸쓸하기도 하지만 이제는 그 골목과 대면해도 담담하다. 사 층 건물로 변한 우리 집, 의상실의 어느 부분으로 짐작되는, 생의 마지막을 보냈던 아버지의 방도 계절마다 다양한 빛깔로 나를 물들인다.

철도 안 든 자식들과 할 줄 아는 게 살림밖에 없는 아내를 남겨두고 먼 길 떠나야만 했던 아버지의 애통이 어땠을지 조금은 헤아릴 줄 아는 나이가 되어서야 나는, 나를 구속하고 있던 어떤 것들에서 자유로워졌다. 성장기의 대부분을 보냈던 공간이 오랜 세월 변화를 겪으며 풍화되어 가듯이.

조민정

- 2007년 문학마당 등단. 시집 <어디로 가나요, 샬리> 대전작가회의 회원
#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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