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에서 소위 1%에 속하는 사람입니다

회사에서 버텨내는 20년차 워킹맘 이야기

등록 2019.10.01 09:38수정 2019.10.01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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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에서 손을 닦는데 등 뒤로 누군가가 후다닥 들어온다. 회사에 있는 엄마를 찾는 아이를 어르고 달래는 목소리. 옆 부서 선배였다. 수화기 너머로 아이가 징징대는 목소리까지 들렸다.


결혼은 했지만 아이가 없던 시기의 나는 회사로 아이가 전화하는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심지어 나중에 저런 워킹맘은 되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했다. 결혼 후 상황은 전혀 달라졌지만. 

아이들이 유치원에 다니던 시절, 내가 회사를 가려고 하면 아이는 현관에서부터 징징댔다. 아이들에게 제대로 인사를 하지 않고 출근한 날에는 "왜 깨우지 않고 그냥 갔냐"는 전화를 어김없이 받았다. 그땐 옆 부서 선배처럼 아이의 전화를 부드럽게 받아주지도 못했다. 그 시절의 나는 하루하루를 그저 버텨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들었으니까.

육아의 힘겨움을 극복하기 위해 내가 선택했던 취미 생활은 독서였다. 출퇴근 시 지하철을 이용하면서 일주일에 한두 권의 책을 읽어내는 나를 보고 한 번은 후배가 "회사 다니고 애도 키우면서 언제 책을 읽으세요?"라고 물었다.

수면 위에서는 고고해 보이는 백조도 물 아래에서는 숨 가쁘게 물갈퀴를 움직인다고 한다. 내가 바쁘게 일과 육아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것이 미혼인 후배에게는 잘 안 보였던 모양이다. 그들도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면 내가 어떻게 회사 생활을 했는지 짐작하게 될 것이다.

이직을 하기 전 다니던 회사는 여직원이 많아서 화장실과 복도에서 아이들과 통화하는 선후배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아이가 없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그들이 일과 육아에 선을 긋지 못해서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지금은 잘 안다. 그들은 둘 다 잘하기 위해 일터에서는 육아를 조정하고, 집에서는 회사 일을 조정하며 버텨냈던 거다.
 

아이를 키우며 직장생활을 하는 40대 여성, 임원을 제외하고 여자 중에 제일 나이가 많은 여성으로 1%, 아니 거의 톱이다. ⓒ Pixabay

 
지금 다니는 직장은 그간 다녔던 네 군데 회사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작은 곳이지만 급성장 중이다. 내가 입사한 2년 전에 300명이 채 안 되던 조직이 지금은 600명이 넘었으니 말이다.


그 안에서 나는 소위 1%에 해당한다. 아이를 키우며 직장생활을 하는 40대 여성, 임원을 제외하고 여자 중에 제일 나이가 많은 여성으로 1%, 아니 거의 톱이다. 업무 특성상 젊은 사람들이 많아서이기도 하지만, 일과 육아 중 육아를 선택하고 직장을 그만둔 사례가 많다는 것이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실제로 2017년 통계청이 발표한 지역별 고용조사 항목을 보면, 여성이 직장(일)을 그만둔 사유는 결혼(34.5%), 육아(32.1%), 임신·출산(24.9%), 가족 돌봄(4.4%), 자녀교육(4.1%) 순이다. 경력단절을 겪는 연령은 30~39세가 51.2%로 가장 많고, 이어서 40~49세가 32.6%로 많다고 한다.

결혼하고 육아를 하다 보면 직장을 그만둬야만 하는 고비가 수십 번은 생긴다. 아들 녀석이 유치원 화장실에서 친구와 장난을 하다가 미끄러져 이마가 찢어지는 사고로 피투성이가 되어 병원에 간 일, 식탁 의자에서 떨어진 딸이 쇄골뼈가 부러져서 3일이나 고열에 시달렸던 일 등 위기는 수시로 찾아왔다. 이런 아이의 일뿐만 아니라 육아를 도와주던 친정 엄마의 수술로 돌봄 시터와 함께 보냈던 시기에도 다양한 이슈로 회사에서 전화를 붙잡고 복도에서 여러 날을 서성였다.

지금의 나는 사무실에서 아이와 통화하는 일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 사실 이제는 아이들이 제법 커서 통화할 일이 자주 생기지도 않는다. 그래도 아이들과 통화를 하게 되는 경우 당당히 통화한다.

뿐만 아니라, 나는 아이 이야기를 회사에서 자주 하는 편이다. 반대로 집에서는 아이들에게 엄마가 회사에서 하는 일을 설명해 주려고 노력한다. 회사에서 안 좋은 일이 있을 때 짜증을 감추기보다 아이들에게 상황을 설명해주고 불편한 엄마의 감정을 존중해 달라고 요청하기도 한다. 또 휴가를 내서 회사에 오기도 한다. 사무실에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사무실과 카페 등을 구경시켜주었다.

결혼하지 않은 여성 임원 등을 제외하면 마흔 중반으로 아이를 키우며 직장생활을 이어가는 유일한 여자 직원인 나를 보고 누군가가 말했다. "내가 결혼하고 나이가 들면 나연님 같은 모습일 거라고 생각하니 왠지 나쁘지 않다"라고. 그 말을 들으니 조금은 책임감이 느껴졌다.

내가 어릴 때는 닮고 싶은 여자 선배의 모습이 너무 높고 멀었다. 결혼을, 가정을 포기하지 않고서는 쉽게 이를 수 없는 상황의 여성 커리어 우먼은 내가 원하는 바도 아니었다. 평범한 워킹맘의 삶이 후배에게 모범이 될 수 있게 일과 태도를 좀 더 바르게 해야겠다.

인생이 완벽할 수는 없다. 마흔이 넘어 추천으로 이직에 성공했고, 20년이나 직장에 붙어 있을 수 있었던 것, 이제는 엄마가 좋은 회사에 다닌다고 알은 체를 하고, 엄마가 없어도 혼자 숙제하고 학원에 다녀오는 아이들을 보면 직장생활 20년, 워킹맘 10년 차 그럭저럭 둘 다 70점은 되는 것 같다.

그러고 보면 회사에서도 육아에서도 늘 부족하고 미안하다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나도 모르는 어느 순간부터 140점짜리 인생을 살고 있던 게 아닐까?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네이버 개인 블로그(https://blog.naver.com/nyyii)에도 실립니다.
#워킹맘 #직장에서살아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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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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