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에 소문난 아산시 송악마을, 그 변화에 그가 있었다

[조화로운 세상을 만드는 사람들] 이종명 목사

등록 2019.10.01 11:43수정 2020.10.19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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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고 싶은 사람들이 있었다. 자신을 내려놓고 자연과 사람들과 조화롭게 살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 그들을 만나고 싶었다. 좀체 자신의 업적이라고 자부하지 않는 그들이 조용히 이끌어온 변화를 기록하고 싶었다.

정신을 가다듬고 깊이 들여다보면 누구나 갈망하는 삶이지만 현실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지는 삶. 그 현실을 딛고 그들이 추구했던 변화는 진정 무엇이었을까. 지구의 살갗을 파먹으며 배불러진 우리는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나 하나의 삶도 조화롭게 가꾸기 벅찬 자본 중심 사회의 그늘 아래서 과연 그들은 어떤 마음가짐으로 자신과 다른 사람의 삶의 변화를 추구했을까. 왜 그랬을까. 통찰의 지혜로 자신을 다스려온 그들 삶의 궤적을 통해, 우리 삶의 때를 닦을 혜안을 구해보고자 한다. <기자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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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악 놀장에서 아이들의 무대. 아이들은 학교만의 무대보다 마을 놀장에서 무대를 더 좋아한다. 마을 어른들 앞에서 끼를 펼치는 것에 거리낌이 없고 어른들도 아이들의 무대를 보는 것이 즐겁다. 마을은 저녁노을을 받으며 그렇게 시나브로 익어갔다. ⓒ 노준희

 지난여름 이야기다. 충남 아산시 송악면 마을에 난리가 났다. 주민들이 기다려온 마을 축제 '놀장'이 열린 것이다. 온 마을 사람들이 쏟아져나온 듯 송악면 주민공동공간 '해유' 마당은 그야말로 주민들의 상기된 화합의 에너지가 하늘을 찔렀다. 송악면 마을에서 매년 2~3회 열리는 놀장을 볼 때마다 나는 느낀다. '이게 진짜 마을잔치'라고.

아이부터 어른까지 모두가 주인공인 마을잔치, '놀장' 

시골마을 잔치라고 노인들이 더 많을 거란 섣부른 추측은 금물이다. 오히려 젊은 청장년층과 학령기 아이들이 해유 마당 구석구석에서 일제히 존재감을 뿜고 있었다.

오후 5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 마을잔치 놀장은 지역의 유기농 먹거리와 농산물 가공품, 주민들의 손재주가 탐나는 수공예품, 잔치의 흥을 돋워줄 생맥주 코너와 각종 안줏거리 판매대까지 없는 거 빼고 다 있는 반짝 장터였다. 또 순식간에 완판 코너가 생길 만큼 장터에 내온 물건들은 인기 만점이었다. 일부러 외지에서 사러 오기도 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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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악놀장의 모습. 면 단위 마을행사인데 정말 주민들이 많이 나왔다. 무대를 중심으로 주민들이 자유롭게 앉아있고 그 주변에는 먹거리 판매 부스가 펼쳐있다. 지역 특산품 판매대와 아이들 판매대와 손재주 많은 주민들의 수공예품 판매 부스까지. 참여자 대부분은 주민들이다. 외지에서 이 마을 축제를 보러오는 경우도 많지만 역시 주민 잔치답게 주인공은 주민들이고 그들은 한껏 즐겼다. ⓒ 노준희

 
 

지난여름 송악놀장 모습 1 아산시 송악면 '놀장'은 마을주민 모두의 잔치다. 이 마을의 특징은 말 그대로 어른 아이 구분 없이 한 자리에서 아무 거리낌 없이 어울리고 논다는 것이다.아이들은 어른을 기피하고 어른은 아이들 틈에서 멋쩟게 느끼는 일이 여기선 전혀 없다. 너무 자연스럽게 잘 융화된다고 말할 정도다. ⓒ 노준희

 
장터만 열린 놀장이 아니다. 날이 어둑해질수록 해유 건물 앞 놀장의 무대는 열기를 더해갔다. 마당극패 '우금치' 초청공연으로 시작한 공연무대는 아이들이 팀별로 준비한 끼 발산의 무대가 이어지자 열화와 같은 함성과 박수갈채가 쏟아져 나왔다. 뒤이어 주민들은 각자 그동안 갈고 닦은 예술재능을 무대에 올리며 함께 놀장을 즐겼다.

하이라이트 마지막 무대는 아이부터 어른까지 온 마을 사람들의 폭탄 같은 막춤 무대였다. 주민들이 이 시간만 기다렸던 게 아닐까. 그동안 쌓인 스트레스가 있다면 이때 다 풀렸을 거란 생각이 들 정도로 주민들은 무아지경의 댄스 본능 열정을 풀어헤쳤다.

나는 이같이 세대의 벽을 뛰어넘어 주민들이 일시에 쏟아져 나와 온마을을 뒤흔드는 열정의 무대를 본 적이 없다. 무대가 좁게 느껴졌다. 아장아장 걷는 아기부터 백발이 성성한 노인까지 전 세대가 이토록 적극 즐기는 마을잔치가 어디 있던가.

주민화합이란 이름 아래 외부인들이 죄다 무대를 장악하고 주민들은 동원되다시피 객석을 채우고 공공기관의 시업비로 진행하는 마을잔치. 그런 허례 같은 잔치를 보아온 사람들에게 이 마을의 잔치는 매우 신선한 충격이었다.

게다가 송남초 아이들은 직접 들깨를 심고 가꿔서 수확한 깻잎으로 깻잎장아찌를 담가서 이날 놀장에 내다 팔았다. 수익금을 전액 제주 4.3 피해 유가족에게 기증한다는 기특한 의미가 전달되자 깻잎장아찌는 순식간에 완판됐다.

변화의 시작을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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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명 목사. 이종명 목사가 자신의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하는 이호운 목사의 유고집 '목원의 꿈'을 들고 웃음을 지었다. ⓒ 노준희

 적어도 1년에 두세 번은 놀장이란 이름으로 온마을 사람들이 모여 축제를 하는 곳, 바로 아산시 송악면 마을이다. 이토록 자주 마을잔치가 열리고 그때마다 어린아이들과 청장년 노년들까지 서로 한마음이 되어 함께 어우러지는 축제가 열리는 곳은 흔치 않다.

그래서 세상은 일찌감치 이 마을에 주목했다. 놀라운 변화를 가져온 마을이면서 현재진행형으로 마을의 발전을 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마을이 어떻게 이러한 변화를 가져올 수 있었는지, 어떤 협동의 역사가 깔려 있는지, 자주 그들을 찾아 이야기를 들었다. 이내 나는 그들로부터 현재는 그들이 가꿔나가지만, 그 시초에 선 이가 바로 이종명 송악교회 목사라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

그러나 이종명 목사는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 "마을주민들이 함께 한 일"이라고 공을 넘겼다.

"전임 목사들의 말씀으로 다듬어진 성도들이 많았어요. 송악에 와 보니 좋은 사람이 많았고 내 소신과 맥이 같은 선배 목사들이 사람을 많이 길러놨더라고요."

그렇다. 그는 목사였고 자신을 낮추는 겸양을 보이며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며 살기 위해 이곳에 왔다"고 말했다. 그런 그가 말하는 하나님의 뜻은 과연 무엇일까. 어느 한 종교에 탐닉하지 않는 나로서는 우리 사회에 비친 기독교인의 삶과 그가 얼마나 다를지 또한 궁금했다.

'흙에 개어진 말씀'의 참뜻을 깨닫고 

올해 59세인 그도 젊은 시절, 시대가 강제한 아픔 때문에 차마 말할 수 없는 몹시도 힘든 시기를 겪었다. 가장 고난의 시기는 목원신학대학에 다니던 1980년대 초. 하나님을 섬기고자 현실을 인내하며 신학대학을 다니고 있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갈 길은 어렴풋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작고한 학장 이호운 목사의 유고집 '목원의 꿈'을 우연히 선배로부터 건네받아 읽고는 그는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이거구나! 하나님이 날 자꾸 부르신 이유가! 전기충격을 받은 것 같았어요. 내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명확해졌거든요."

책에 쓰인 글의 요지는 '흙에 개어진 말씀'이었다. 그는 "하나님은 농촌에 들어가 그들 속에서 살 일꾼을 기르려고 하는 것"이라며 "대중 속에서 대중과 함께 살며 주님의 말씀과 생활을 오늘날 생활 속에 번역해내자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교회 안이 아니라 교회 밖 세상 속에서 복음을 실천하는 삶, 이게 목회라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이 자신을 대중 속에 들어가 사는 일꾼인 목회자가 되라는 사명을 주었다고 받아들였다. 그 후 그는 당진의 개척교회를 거쳐 1994년 송악마을에 와서 정착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며 살 수 있게 돼서 그는 기뻤다.

"모든 생명을 하늘같이" 

그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 말씀을 실현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그는 교회가 울타리 안에만 있지 않고 마을 속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에겐 마을이 교회인데 성도인 마을주민에 관심을 갖는 건 당연했다. 교회 안에서 성도들이 마을과 지역사회를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게 했다.

"송악교회 슬로건이 '모든 생명을 하늘같이'입니다. 사람은 다른 생명과 연결돼 있어요. 동물·식물 등 자연은 인간의 건강한 삶과 필연적으로 연결돼 있습니다. 땅도 물도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어요."

그는 주민들이 농사를 보다 친환경적으로 짓도록 알리기 시작했다. 농약을 치더라도 생산성을 높이는 것이 소득과 직결되는 때인 만큼 친환경 농사를 권장한다고 하루아침에 하던 농사를 바꿀 순 없었다. 그러나 "때가 좋았다"고 그는 말했다.

"농사의 본질은 생명을 보듬는 거라고 생각해요. 이 본질을 회복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거죠. 화학비료와 농약, 제초제를 사용하면 때깔이 좋고 수확량은 많으나 농사의 본질은 다 훼손되고 말아요. 자연생태계가 파괴되면 고스란히 우리 인간에게 돌아오잖아요."

교회 안에서는 농부들에게 친환경 농업의 필요성을 이야기하며 자연스럽게 공유했다. 밖에서는 '농민선교특별위원회'가 '송악동네친환경농사연구회'를 조직해 농민들에게 친환경 오리농법으로 농사를 짓게 이끌었다.

농민들은 농약 안 치고 어떻게 농사짓냐고 어깃장을 놓기도 했다. 연구회는 흔들리지 않았다. 강사를 초빙해 교육하고 선진지에 견학을 가고, 책도 소개하며 친환경농업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주지시켰다. 옷자락에 빗물이 스며들 듯 천천히.

또 연구회는 도시소비자들이 농사에 참여하는 행사를 많이 열어 이른바 농촌체험을 활성화하며 도시소비자들에게 송악면의 친환경농업을 알렸다. 이때를 기점으로 송악면이 전국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친환경농업은 돈을 버는 수단이 아니다" 

농사는 판로 개척에 가장 애를 먹는다. 송악면도 그랬다. 때마침 한살림에서 친환경 생산자를 모집했고 '생명을 살린다'는 한살림 정신은 이종명 목사의 지향점과 같았다. 그렇게 송악동네친환경농사연구회는 2002년 '한살림생산자연합회 송악면지회'로 이름을 바꾸며 다시 출발했다. 현재 송악면은 면 단위 한 살림 생산자 중에서 가장 많은 120여 가구 생산자가 있다.

친환경 농업은 돈을 벌어주었다. 한살림에 공급하면 일반 시세보다 훨씬 잘 받을 수 있었기에 친환경농법은 빠르게 퍼져나갔다. 그러나 본질보다 소득에만 목적을 둔 농민도 있었다. 친환경 오리농법은 낮에 오리를 논에 풀어 벌레와 잡초를 먹어치우게 하고 밤에는 오리를 축사에서 쉬게 하는 농법이다.

그런데 유독 한 농가에서만 오리를 보기 어려웠다. 주민들이 의문을 제기하자 마지 못해 오리를 논에 풀었는데 40마리 이상이 싹 다 죽어버렸다. 알고 보니 매일 오리를 풀어놓는 게 귀찮아서 밤에 몰래 제초제를 뿌렸던 것. 제초제를 뿌린 후 며칠이 지나서 오리를 풀었는데도 모두 죽고 만 것이다.

"친환경의 근본 취지는 농민이 친환경 농업으로 농작물을 비싸게 팔아 돈 버는 게 아니에요. 돈도 벌어야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농사의 본질인 생명을 살리고 자연생태를 보존하는 것에 있어요. 생명 회복 운동이 농사의 본질인 거죠."

그래서 그는 "농산물 생산과정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농사짓는 과정이 생태에 부담을 주지 않고 오염을 주지 말아야 해요. 이는 결국 사람에게 돌아오게 돼 있어요. 자연이 살아나니까 몇 년 전부터 송악면에 반딧불이가 서식하게 됐잖아요. '더불어 사는 것'이 바로 친환경 정신의 근본이지요."

그 일이 있고 난 후 마을은 친환경농업의 중요성을 더 깨닫게 되고 진짜 땅을 지키는 농사를 실행해갔다. 물론 아직도 고집스럽게 관행농을 지속하는 농민도 있으나 친환경농업은 송악의 대표농법으로 자리 잡았다.

전국 최초, 주민 스스로 지역아동센터를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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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터 한쪽 모습. 마을잔치가 열려 주민들이 쏟아져나온 것도 있지만 어린이공원이나 엄청 재미난 이벤트가 있는 곳이 아니면 이렇게 많은 아이들이 한곳에 몰려 노는 것을 보기는 힘든 세상인데 송악마을에선 자주 볼 수 있는 풍경이다. ⓒ 노준희

 이종명 목사가 시도한 또 하나의 변화는 '마을 돌봄'이었다.

"우연히 동네 슈퍼에서 술을 훔쳐 달아난 초등학생 아이들을 봤어요. 알고 보니 동네 중고생 형들이 강제로 시킨 거더라고요."

이 목사는 깊이 고민했다. 이 아이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는 방과 후 아이들이 갈 곳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20여 년 전 당시, 부모는 도시에 있고 아이는 할머니에게 맡겨놓은 조손가정 아이들이 많았다. IMF 이후 2004년 송악면엔 조손가정이 70% 이상이었다.

그는 믿음이 가는 두 사람을 찾아가 상황을 설명하고 마을 아이들 돌봄을 해 달라고 부탁했다. 마을의 아이들을 방치해선 안된다는 의견에 공감한 홍승미씨와 김영미씨는 수입이 좋았던 과외를 그만두고 마을을 위한 돌봄 교사로 살겠다는 어려운 결심을 했다.

당시에는 지역아동센터라는 말도 없었지만 송악면은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격언을 진작부터 실천했다. 현재 해유 2층에 자리한 반딧불이지역아동센터의 전신은 바로 이때 탄생한 것이다.

당시는 마땅한 공간이 없어 마을회관을 빌려 썼기에 회관을 기꺼이 빌려준 어르신들을 위해 발표회를 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그동안 배운 활동과 솜씨를 선보이는 자리를 만들었다. 어르신들의 반응은 매우 좋았다. 이후 작은 발표회가 이어져 송악골목예술제로 성장해왔으며 지금은 놀장과 함께 마을의 큰 예술문화로 자리 잡았다.

"학교를 바꾸기가 가장 어려웠어요" 

친환경농업으로 마을의 땅이 살아나고 주민들의 소득도 늘어났다. 또 마을 돌봄으로 아이들이 방과 후 갈 곳도 생겼다. 마을 사람들이 진심으로 즐기고 화합하는 골목예술제가 생기고 마을잔치, 놀장도 열렸다.

하지만 마을살이의 질이 좋아지려면 친환경 농사와 동네잔치만으로 되지 않았다. 교육의 질이 나아져야 했다. 그러나 정작 학교는 변화의 물결에 휩쓸리지 않고 굳건했다. 학교가 진행하는 일방적이고 결과 우선적인 주입식 교육의 병폐는 막을 수가 없었다.

이 목사와 주민들은 고심 끝에 교장을 찾아갔다. 아이들이 행복하고 건강한 교육을 해야 한다고. 주민 참여가 가능한 학교를 만들자고. 교장은 강력히 반발했다. 획일적이고 서열 중심적인 학교 교육제도운영에 마을은 답답했다.

"끊임없이 제도권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았어요. 그래서 송남초 학교운영위원회에 들어가서 적극적인 의사표시를 하기 시작했어요."

이 목사와 주민들은 강경하게 대응하며 물러서지 않았다. 목사라는 이가 주도하고 강경하게 대응하자 교장을 비롯한 주변의 곱지 않은 시선도 밀려 들어왔다. 당시 교장은 주민 갈등을 조장하며 완강히 거부했다.

"전교조와 목사가 마을의 권력을 장악하려 한다고 뒷말이 많았더라고요. 참 어려웠어요. 교육이 바뀌지 않고 아이들이 어떻게 행복할 수 있나요? 이 사회를 떠받칠 아이들이 정말 행복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공부만 우선으로 하는 교육이 아니라 자신의 재능과 끼를 펼치며 다양한 체험을 통해 무엇이 소중한지 알아가는 것이 중요하잖아요? 마을과 함께하는 교육이어야 해요. 우리 마을에 사는 우리 아이들이니까요."

이 목사와 주민들은 자신의 교육관과 결이 같은 교사들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오랫동안 마을에 올 수 있게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폐교 위기에 직면한 이웃마을 거산초 살리기에도 적극 동참하며 작은 학교의 필요성을 알렸다.

평소 송악면의 마을 특성을 알고 있던 몇몇 교사들은 자발적으로 마을에 들어와 살았다. 점차 그런 교사들이 많아지고 마을의 교육철학을 받아들이는 교장이 오면서 점차 학교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약 7, 8년은 걸린 거 같아요. 학교는 쉽게 바뀌지 않았지만 결국 긍정의 변화 속으로 들어오더라고요."

주민들의 노력은 학교급식까지 바꿨다. 마을에서 생산한 친환경쌀로 아이들 급식 쌀을 공급했다. 전국 최초 사례다. 2004년 당시 친환경쌀은 일반 쌀의 4배 가량 비쌌다. 하지만 이 목사와 주민들은 아이들이 농약에 절은 쌀이 아닌 생명을 생각하는 농법으로 지은 쌀을 먹게 하고 싶었고 해냈다.

그렇게 초등학교는 아이들이 다니고픈 학교로 변화했지만 중학교는 초등학교보다 더 획일적인, 마치 군대와도 같은 중학교였기에 초등 졸업생들은 마을에 있는 중학교 진학을 망설였다. 부모들은 중학교에도 변화의 물결을 잇기로 했다. 특히 아빠들이 머리를 맞댔다.

송남중 학생 수를 늘릴 묘안으로 교복장학금을 생각해냈다. 2014년부터 송남중학교에 진학하는 초등 졸업생 전원에게 교복 비용의 장학금으로 주기로 한 것이다. 비용은 아빠들이 손수 먹거리 장터를 열어 마련했고 마을 사람들은 적극 참여해 마을 내 진학을 도왔다.

이제 어지간한 마을 일은 '송악동네사람들'이란 사회적협동조합이 주도적으로 이끌고 있다. 이 목사는 "마을이 스스로 잘 움직이고 있다"며 관조의 미소를 지었다. 자신은 그저 "그중의 하나일 뿐"이라며.

종교를 내세우지 않고 마을주민으로서 삶을 살다 

아무리 열정과 의지가 넘친다 해도 한 마을이 어느 한 사람의 힘만으로 변화하긴 힘들다. 주민들의 공감과 긍정, 함께 시도하는 열정 없이는 그 무엇도 바꾸기가 힘들다. 더욱이 농사만 짓느라 세상의 변화를 직접 감지하기 어려운 시골 주민들의 경우는 더 그랬다.

그러나 논밭 옆에 물을 가득 채워놓는다고 온 논과 밭에 물이 스며들지는 않는다. 자연의 흐름에 따른 물꼬를 터주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사람의 일도 마찬가지다. 누군가 나서서 바른길로 인도하고 화합의 근간을 마련해주지 않으면 맨날 피 터지게 싸워도 막상 이뤄놓은 것 없는 무상한 세월만 보내고 마는 것이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무조건 전도에 몰입한다거나 매일같이 교회를 들락거리는 것이 아니에요. 송악 마을의 변화는 교회가 주도해서 하지 않았어요. 주민 스스로가 주도해서 하도록 처음 네트워크만 활용했을 뿐이에요. 오랜 기간에 걸쳐 마을이 참 많이 달라졌어요. 행복한 공동체가 되었지요. 이렇게 교회 밖에서 하나님의 복음이 실현된다면 우리가 사는 이 마을이 바로 천국 아닌가요?"

마을의 모든 변화의 공로를 주민에게 돌리는 이종명 목사는 마을이 바뀔 수 있도록 방향을 잘 잡아 물꼬를 터 주는 역할을 했다. 주민들이 해낼 수 있게 끈기 있게 지켜주고 곁에 있어 주었다. 이종명 목사는 지금도 그렇게 그림자처럼 아픈 이들의 손을 잡아주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다.

'흙에 개어진 말씀'대로 마을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는 그에게 또 어떤 변화가 찾아올지 조용히 미래를 그리는 그의 행보가 자못 궁금하다.
#이종명 목사 #송악동네사람들 #아산시 송악면 #송악마을 해유 #송악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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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과 천안 아산을 중심으로 한 지역소식 교육 문화 생활 소식 등을 전합니다. 지금은 출판 분야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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