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독 여자들에게 드러나곤 하는 몹쓸 병

[여자의 소설] 메그 월리처 '더 와이프'

등록 2019.10.06 19:16수정 2019.10.14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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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소설가가 통찰력 있게 그려낸 여성 서사를 통해 여성의 삶에 가까이 다가가고자 합니다. 여성에게 의미 있는, 필요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더 많은 여성 서사가 우리 삶에 스며들길 기대합니다. - 기자말

잡지 <우먼카인드> 2호에서 작가 김하나('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저자)는 세 명의 여자에 관해 이야기한다. 자신들이 일하는 분야에서 탁월한 실력을 인정받고 있던 세 여자들에겐 공통점이 있다면서. 그건 바로 자신의 가치를 내세우는 데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거다.


회사원 A는 승진을 부담스러워했고, 번역가 B는 좋은 조건으로 계약을 하기 위해 협상하는 것을 껄끄러워했으며, 회사원 C는 자신의 성과를 생색내는 것을 귀찮아했다. 김하나는 이들 태도를 통털어 '겸손 병'이라 했다. 유독 여자들에게서 드러나곤 하는 몹쓸 병.

위의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속으로 세 번 웃었다. 세 여자의 이야기가 모두 과거의 내 이야기같아서였다. 회사에서 승승장구하는 것에 관심이 없던 것도 나고, 만약 연봉 협상의 기회가 있었더라면 내 의견을 피력하지 못했을 게 뻔한 것도 나며, 또 무엇보다 나는 내가 한 일에 관해 생색내는 걸 누구보다 못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얼마나 아무도 모르게 숨죽여 일만 했으면 경쟁이 기본인 회사에서 한 선배는 나를 위해 전체 메일을 써주기도 했다. 이번에 터진 그 이슈를 해결한 것이 바로 나라고. 

그렇다면 우리 여자들은 왜 이런 '겸손 병'에 걸려 있는 걸까. 아마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우리 안의 야망이 탄로나지 않길 바라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이 야망 가진 여자를 두려워하면서 어색해하듯, 우리 또한 우리의 야망이 두렵기도, 어색하기도 한 것이다.

세상은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 하고만 말했지, '소녀여, 야망을 가져라!' 하고 말해주진 않았으니까. 세상이 소거한 소녀의 야망이 내 안에서 느껴질 때, 야망을 가진 여성은 여성스럽지 않다는 편견을 마주할 때, 차라리 내 안의 야망을 모른 체 해버리고 마는 여자들. 아직 이 세상엔 이런 여자들이 얼마나 많을까. 위의 세 여자처럼, 그리고 과거의 나처럼. 

모른 체 할 수 없어 갈등하는 여자도 많다. <나는 내 파이를 구할 뿐 인류를 구하러 온 게 아니라고>를 쓴 저자 김진아는 말한다. "유난히 야망이 컸던 나는 누군가의 여자보다 누군가가 되고 싶었다." 자신의 야망과 정면으로 마주했기에 그녀는 유난한 여자가 되었고, 남자들과의 연애도 쉽지 않았으며, 급기야 자기 혐오까지 하게 됐었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긴 시간을 지나 그녀는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내가 남자였다면 나의 야망이 유난한 것이었을까? 중류층 부모의 기대와 지원을 받은 남자아이가 가질 수 있는 일반적인 수준 아니었을까?" 

그녀는 이제 알게 되었다고 한다. "야망이 큰 것과 여성적이지 않은 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여성과 야망을 연결짓지 못하게 된 건, 가부장제가 그것을 원하기 때문이었다고. 여성은 더는 가부장제가 원하는 "착하고 무해"한 여성 역할을 연기할 필요 없다고. 오히려 야망은 여성에게 더 필요한 것이라고. 기울어진 운동장을 기어 올라가기 위해서라도 야망이라는 힘이 필요하다고. 

나는 이제 남자의 야망이 순풍에 나뭇잎 날리듯 자연스러운 것이라면, 여성의 야망 또한 가을에 단풍 드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걸 안다. 자신의 실력을 아무런 의심없이 받아들이며,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야망의 DNA. 내 핏 속에도 이 DNA가 꾹꾹 채워져 있다는 걸 믿어 의심치 않는다.

단지 DNA를 이기는 어떤 강력한 자장이 긴 시간 내 사고와 목소리를 지배해 온 것이리라. 자신을 끊임없이 의심하라고, 자신을 끝까지 믿지 말라고, 자신을 드러내지 말라고, 매사 겸손하게 행동하라고, 너무 욕심내지 말라고, 그래야 사랑받는다고, 그래야 외톨이가 되지 않는다고, 그래야 욕을 먹지 않는다고. 이런 목소리들로 채워진 강력한 자장은 내가 살아온 내내 내 무의식과 의식을 쥐고 흔들어 왔을 것이다. 

재능은 있지만 야망이 없는 여자 
 

책표지 ⓒ 뮤진트리

 
메그 월리처가 쓴 <더 와이프>의 조안 역시 이런 목소리들에 가차없이 흔들려온 여자다. 그녀는 그녀의 소설이 남편 이름으로 세상에 알려진 첫 순간, 그녀 자신에 관해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온순했고, 용기가 없었고, 선구자도 아니었다. 나는 수줍음을 많이 탔다. 가지고 싶은 것들이 있었지만 그것을 원한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했다. 나는 여자였고, 심지어는 내가 그런 것들을 원한다는 사실조차 경멸했기에 이런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조와 조안은 대학에서 처음 만났다. 조안이 '창조적 글쓰기의 기본 요소'라는 강의를 수강하자 그곳에 교수 조가 있었다. 조는 조안의 재능을 한 눈에 알아봤다. 그녀에겐 재능이 있었고, 동시에 하고 싶은 이야기까지 있었다. 조는 조안이 작가가 되기를 바랐다. 그런데 문제는, 조 역시 작가가 되고 싶어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또 문제는, 조에겐 재능이 없었다. 이런 둘이 사랑에 빠졌다. 

재능은 없으나 야망이 있는 남자 조와 재능은 있으나 야망이 없는 여자 조안의 만남. 조는 야망을 좇아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어쩌면 조안 또한 조를 좇아 소설을 쓸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날 조안은 평생 그녀에게 영향을 미칠 여성 작가 일레인 모젤을 만난다.

일레인 모젤은 조안에게 조언한다. 글을 쓰는 대신 다른 길을 찾으라고. 어차피 남자들은 당신의 글에 관심을 갖지 않을 것이라고. "서평을 쓰고, 출판사를 운영하고, 신문, 잡지를 편집하는 남자들. 누가 정말로 선택될지,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누구를 권좌에 올릴지 결정하는 남자들 말이야." 

조안에겐 일레인 모젤이 말한 남자들의 존재는 넘지 못할 벽이었다. 아무리 뛰어난 작품을 써 낸다고 해도, 어차피 조안은 그들의 벽 앞에서 멈춰서야 할 터였다. 가뜩이나 자신감이 없던 조안이 감히 그 벽을 넘을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하지만 조는 달랐다. 조는 '남자니까' 애써 벽을 넘을 필요가 없었다. 그가 뛰어난 소설을 써내기만 하면, 그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을 터였다. 그는 세상을 소유할 수 있는 남자니까. 그녀와는 다른 입장이니까. 

두 사람의 공모는 두 사람 모두의 이해에 충돌되지 않았다. 적어도 처음엔 그랬다. 조는 자신의 이름으로 된 좋은 작품만 있으면 됐고, 조안은 그가 그녀를 떠나지 않으면 됐다. 조안은 혹시 그녀가 그보다 뛰어나 그가 그녀를 떠날까봐 불안했다. 조는 자신보다 뛰어난 아내를 품어줄 그릇이 되는 남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조는 그의 글을 그녀가 마음에 들어하지 않자 화를 내며 이렇게 울부짖는 정도의 남자였다. "네 하인이나 되라고? 네가 문학계에서 센세이션을 일으킬 동안 나는 여기에 앉아서 세탁을 하고 갈비구이나 만들라고?"
 

할리우드 영화 <더 와이프>에서의 조안과 조. ⓒ (주)팝엔터테인먼트

 
결국, 조안이 하녀가 되기로 했다. 조안은 남편과 아이들을 살뜰이 챙기는 아내이자 엄마의 삶을 살기로 한다. <더 와이프>를 원작으로 한 할리우드 영화 <더 와이프>에선 조안이 조를 뒤치닥거리하는 모습이 더 구체적으로 그려진다. 조의 수염에 빵부스러기가 묻었는지, 코털이 삐져나왔는지까지 조안의 관심 안에 있다. 장소에 맞게 안경을 바꿔주고, 시간에 맞춰 약을 챙겨주고, 뒤에 서 있다가 코트를 받아주고, 조가 사람들 앞에서 쿠키를 먹으며 말을 할 땐 입술에 뭐가 묻었는지까지 먼 곳에서 알려준다. 

아내의 역할에 충실한 동시에 그녀는 그의 이름으로 글도 쓴다. 첫 소설을 함께 쓴 이후로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공모를 이어간다. 조가 아이디어를 제공하면 조안이 그 아이디어를 소설화하기. 그녀의 탁월할 재능은 그의 이름을 세상에 알린다. 그는 크고 작은 상을 섭렵해 나가며 수많은 독자를 거느린 유명한 작가가 된다. 그의 태도, 말투, 행동은 이제 영락없는 소설가다. 그는 유명한 소설가답게 끊임없이 바람을 피워 조안을 속을 뒤집어 놓으면서도 당당하다. 그는 명예라는 옷을 입고 지적인 소설가라는 신발을 신고 세상을 지배한다.

그리고 어느 순간 조안은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고 느낀다. 이젠 이 모든 걸 끝내야겠다고 생각한다. 

자기 자신을 인정하다 

괜찮은 척 했지만 사실 조안은 늘 불만족스러웠을 것이다. 남자들이 세상에 관해 이야기할 때, 그들의 아내들과 쇼핑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 탐탁지 않았을 것이다. 생각해봤다.

퓰리처상을 포함해 유수의 상을 수상한 소설가가,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헬싱키상까지 수상하게 된 소설가가(소설에 나오는 헬싱키상은 존재하지 않는 상이다. 영화에선 헬싱키상이 아닌 노벨문학상으로 나온다), 끝내 '아내처럼만' 행동해야 했을 때 그녀가 느꼈을 박탈감은 얼마나 컸을까.

세상에 말하고 싶지 않았을까. 그녀가 이번 소설에선 어떤 새로운 형식을 시도했는지를. 그녀가 궁극적으로 세상에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를. 그리고 세상에 알리고 싶지 않았을까. 나라는 존재가 여기 있음을. 

그녀는 여자라서 자신의 가능성을 축소시켰고, 여자라서 재능을 지웠으며, 여자라서 세상에 나서지 않았다. 그녀는 아내라서 남편을 떠받들며 살았고, 바람을 피워도 눈 감아줬으며, 허세를 부려도 인정해줬다. 그가 기분이라도 상할까 봐 그녀가 글을 썼음에도 마치 그가 쓴 것마냥 그를 대우해줬다. 그녀는 이런 삶이 수모스러웠다. 하지만 이런 것이 여자의 삶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어쩌면 아닐 수도 있다는 걸 느낀다. 여자라고 해서 이렇게 살 필요가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녀가 그더러 시상식에서 자신을 언급하지 말라던 이유, 내조하느라 고생한 아내가 되고 싶지 않다던 이유는 이제 진실을 직시하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그녀는 내조하느라 고생한 아내가 아니었다.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소설을 쓰느라 고생한 소설가였다. 그녀는 이제야 자신이 지닌 탁월한 재능을 오롯이 받아들이기로 결심한다.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사라고 하면 단연 이 대사일 것이다. 조안이 조에게 외치는 말. 

"난 뛰어난 작가야, 조, 엄청나게 대단하다고. 그거 알아? 난 헬싱키상도 탔어!"

조안이 처음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작가로 인정한 순간이었다.

더 와이프

메그 월리처 (지은이), 심혜경 (옮긴이),
뮤진트리, 2019


#더와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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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처음 킥복싱>, <매일 읽겠습니다>를 썼습니다. www.instagram.com/cliannah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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