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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의 소문난 '다주택자'... 왜 이렇게 사냐고 묻거든

[우먼 인 로컬 - 전주편] 전주의 도시재생전문가 고은설

등록 2019.10.28 13:41수정 2019.10.29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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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이 아닌 지방에서 더 나은 삶을 꿈꾸며 살아가는 남성이 아닌 여성들의 이야기를 들어봅니다.[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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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설 도시재생 전문가는 전주 노송동 재개발 지역 빈집을 고쳐 문화 공간과 주민 모임 장소, 게스트 하우스 만들어 마을공동체 복원 작업을 시도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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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과 함께 한 고은설 별의별연구소 대표 ⓒ 고은설

   
"제가 가재 잡는 꿈을 꾸었어요."

지난 여름 전주 워크숍에서 만난 고은설 아트클러스터 별의별 대표가 한 말이다. 가재 잡는 꿈은 길몽, 좋은 꿈이란다. 도랑 치고 가재 잡는다는 그 의미다. 빈손으로 전주에 내려온 지 9년여, 이제 고은설 대표도 가재를 잡는 걸까?


전주의 이름없는 마을, 노송동

고은설 대표는 전주 노송동의 '다주택자'다. 사철나무집, 철봉집, 인봉집에다 고 대표 가족이 사는 집까지 무려 4채를 관리한다. 게다가 노송동은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재개발 열풍이 불던 동네이기도 했다. 

이제 소위 조물주 위 건물주가 되는 걸까? 그런데 또 그건 아니다. 한때 전주시장 관사가 있을 정도로 '뜨르르한' 동네였던 노송동은 불다 그친 재개발 바람에 지금은 이름 없고 힘 없는 동네가 돼버렸다. 주차 걱정 없을 정도로 길도 널찍하고 조용한 동네지만 부족한 편의시설과 단독주택 중심의 동네인 탓에 젊은 사람들이 들어오지 않는다.

게다가 원주민들이 나이가 들면서 건강 상의 이유로 신도심으로 빠져 나가자 비워진 혹은 버려진 집들이 생겨났다. 자식들에게 물려준다고 해도 그들이 이 동네에 들어와 살리는 만무하니, 빈 집이 되어 버린다. 노송동은 빈집이 늘고 있는, 전주의 원도심이다. 그곳에 집이 네 채가 있건 다섯 채가 있건 소위 재테크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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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봉집을 찾은 꼬마 손님들. 이곳도 고은설 대표 혼자가 아닌 동네 사람들의 손길로 완성됐다. ⓒ 고은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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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봉집 전경. 마당에 철봉이 있어서 철봉집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 서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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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전주 완산구 노송동은 재개발 열풍으로 신축 아파트들이 들어섰다. ⓒ 유성호

 

빈집 고쳐 도시재생 프로젝트에 앞장 선 고은설 고은설 도시재생 전문가 전라북도 전주 노송동 재개발 지역 빈집을 고쳐 도시재생 프로젝트에 앞장 선 이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 유성호

 
지난 2014년부터 고은설 대표는 노송동의 구옥을 리뉴얼하고 보존하는 일을 해왔다. 여사님이 혼자 사시던 인봉집은 게스트하우스로, 아들 셋을 키운 가족이 살았다는 철봉집은 공동육아와 주민 모임 장소로, 3대가 같이 살던 사철나무집은 워크숍 등 모임 장소로 사용한다. 남의 집을 빌려서 주민 모임 공간으로 만들고, 빈집이 되지 않게 관리하고, 전주의 구옥에서 묵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빌려주는 것, 그것이 고은설 대표의 일이다. 요즘 말로 하면 도시재생사업이다.

"사람들이 저한데 그래요. 시댁이 잘 사냐고(웃음). 아니거든요. 사실 남편이 따박따박 월급을 받게 된 것도 최근 일이에요. 그 전에는 연극을 했구요."


게다가 고은설 대표가 관리하는 집들은 고 대표 소유가 아니라 대부분 임대 계약을 한 주택들이다. 남의 집을 빌려서 돈을 들여 리뉴얼한다? 보통 사람들의 시선으로 봤을 때는 확실히 미친 짓이다.

"'공공에서 해야 할 일 아니냐, 왜 개인 돈을 꼴아박아서 하냐' 이런 말을 정말 많이 들었어요. 자꾸만 똑같은 건 물어보니까 나중에는 '하면 안 되는 건데 내가 하는 건가' 이런 생각도 들더라고요. 내가 이상한 사람인가, 이런 생각(웃음).

처음부터 뭔가 거창한 걸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철봉집 만들 때는 동네에서 애들이 모일 공간이 너무 필요했어요. 제가 일과 육아를 양립하려면 동네가 필요했으니까요. 제 필요에 의해서 시작한 거죠. 그게 하나 둘씩 집이 늘어났어요. 이런 공간이 필요하다는 걸, 만들고 나서 더 여실히 느꼈어요. 이거 정말 필요했구나."


젊은이들이 돌아다니는 동네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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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설 도시재생 전문가는 전주 노송동 아들 셋을 키운 가족이 살았던 철봉집을 새롭게 고쳐 공동육아와 주민 모임 장소로 만들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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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겨울 전주 한달 살기 청년들과의 모임 모습 ⓒ 고은설


여기에는 동네에 청년을 살게 하는 전주 한달살기, 일년 살기 프로젝트의 덕도 컸다. 작년 겨울 청년 4명이 노송동 사철나무집에 와서 한달 살기를 했다. 도시에서 지친 청년들은 억지로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정말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월세를 받는 대신 고 대표가 청년들에게 준 미션은 동네 어르신 인터뷰하기.

사철나무집 장작 난로에서 고구마 구워먹던 청년들은 날이 풀리면 동네로 나가 어르신들을 만나고 동네 이야기, 어르신 이야기를 들었다. 젊은 사람 보기 어려웠던 동네에 젊은이들이, 그것도 대낮에 돌아다니니 동네 사람들은 마냥 신기해했다. 물론 이때도 재개발 때문에 왔냐는 얘기를 정말 많이 들었다.

그렇게 하루이틀 주민들을 만나가면서 노송동 이야기를 정리하고 노송동 아카이빙을 해갔다. 고은설 대표도, 마을주민들도, 청년들도 모두 신기한 경험이었다.

"노송동은 철거할 곳, 곧 없어질 곳이었어요. 그래서 투자도 없었고 인프라도 없었죠. 주민들 모임 공간, 편의시설들이 들어오지 못했어요. 여기는 떠나기에 완벽한 공간, 떠나야만 하는 공간이었던 거예요. 제가 동네에 처음 왔을 때 애들이 왜 없나 했는데 철봉집 열고 나니 애들이 많았어요.

주민들에게 열려있는 공간이 있으니까 이전에는 나오지 않았던 이야기들이 나오더라고요. 그 분들의 젊은 시절 이야기가 하나 둘 나오고 어떤 분들이 모인 동네구나... 그렇게 동네의 품격이 올라가더라고요. 우리가 잊고 살았던 정서와 관계들을 되찾아주는 게 공간의 힘이구나. 공간에서 끌어주고 모아주고 이야기하게 하고... 그게 나의 역할 같아요."


대체할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것. 한때 고은설의 꿈이었다. 조직의 결정권자가 돼 유일무이하게 살고 싶었다. 조직의 부속품이 되는 삶은 꿈꾸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고향과 부모를 떠나 서울로 유학을 갔고 문화재와 건축 전문가가 되는 꿈을 꾸었다. 그렇게 상경했던 그가 2009년 그야말로 털래털래 전주로 내려왔다. 손에 아무 것도 없이.

"2009년에 '명박산성'이 있었죠. 그때 정말 너무 암울했어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어요. 제가 생각했던 공무원이 된다고 해도 그냥 부속품인 거죠.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으니까. 그냥 시키는 대로 하는... 그건 정말 아닌 것 같더라고요."

아이 셋의 엄마, 고은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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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봉집 옥상에서 고은설씨 가족. ⓒ 송재한

   
서울에서 빈손으로 내려온 자식을 보고 부모님은 무척 상심하셨다. 그후 고은설 대표는 엉뚱하게도 연극판에 뛰어들었고, 그 다음에는 결혼과 출산이 이어졌다. 낙향길에 동참했던 남자가 그의 남편이 되었다. 둘째까지 낳고 나니 3년 세월이 흘렀다. 그리고 야망있는 여자, 대체 불가능한 삶을 꿈꾸던 고은설은 산후우울증 직전의 두 아이 엄마가 되었다.

"그 때는 정말 집을 뛰쳐나오는 심정이었어요. 더 이상은 그렇게 못 살겠더라고요."

아이 둘을 옆에 끼고 고은설은 전주 노송동을 헤집고 다녔다. 사라져가는 동네와 역사를 기록하고 싶었다. 망가지는 걸 찍어야지, 기록해야지, 이 심정이었다. 한옥마을로 대표되는 전주는 소위 조선시대로 대표되는 문화는 잘 보존되지만, 근현대의 건물이나 유산 보존은 상대적으로 소홀한 편이다. 고 대표는 70, 80년대에 지어진 양옥집, 소위 '구옥'에 빠진 사람이다.

"제가 그런 집을 보면 흥분을 해요. 빈집을 보면 뭔가 마음이 쓰이고 저걸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가만히 냅두질 않아요. 병인가, 이런 생각도 했어요. 옷이나 화장 이런 거는 관심없는데 이상하게 집이나 공간에는 왜 이렇게 욕심이 나는지 모르겠어요. 이런 것들이 잘 지켜줬으면 좋겠고, 기획적인 걸 가미해서 더 빛났으면 좋겠다, 그걸 내가 하고 싶다, 그런 욕심인 거죠."

그 욕심 덕분에 고 대표는 몸이 힘들다. 인봉집은 셋째 낳고 일년도 안 됐을 때 작업해서 정말 몸이 녹을 뻔했단다.  왜 일을 벌여, 이렇게 생각하며 이불킥을 날리기도 했다. 하지만 노송동 골목에서 이름모를 집을 만나게 되면 다시 초기화돼 버리고 만다. 여기에는 유년 시절 아버지와의 기억, 서울에서 경험한 고시원 생활이 영향을 미쳤다.

"인봉집에 사람이 들면 집에 불이 들어오잖아요. 그럼 다음 날 동네 어머님이 그러세요. 손님 왔어요? 아이고 잘했어. 거기 사람 든 걸 보면 기분이 좋아. 그런 말 들으면 저도 기분이 좋죠."

이제 전주에 온 지는 십 년, 노송동에 산 지는 6년이 됐다. 그동안 돈과는 인연이 없었다는 고은설 대표. 돈 없이 가니까 좋은 사람들만 꼬였다며 자족한다. 이제 고은설 대표는 협동조합을 만들어 노송동에서 뭔가를 본격적으로 해볼 생각이다. 돈도 없고 빽도 없지만,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고은설은 저지르고 볼 것이다. 노송동에 사니까. 동네가 살아있는 노송동이 있으니까.

"집 고칠 때도 주민분들이 그냥 와주셨어요. 철거하고 할 때도 도와주시고. 그런 분들에게 빚진 거죠. 동네 주민들, 청년들. 난로도 빌려주시고, 그릇도 다 갖다 주시고. 집에 필요한 물건들이 그렇게 채워지더라고요. 사람들의 힘으로, 동네의 힘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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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일년살기 프로젝트를 하고 있는 희희당 작업 모습. 오래된 집 희희당을 젊은이들이 고쳐 쓰는 작업이다. ⓒ 고은설


  
"작년 겨울 사철나무집에서 '전주 청년 한달살기'를 했다. 하루종일 장작난로에 불 때면서 지냈다. 여자 셋이 지냈는데 좋았다. 난로에 고구마도 구워먹고. 그때 청년 미션이 동네 어르신들 이야기 아카이빙이었다. 따뜻해지는 오후 두세 시에 나가서 이야기 듣고 들어와서 저녁 같이 해먹고 했다.

참가자 대부분이 아파트에 살았기 때문에 처음에는 마당이 있는 집에 사는 것 자체가 즐거움이었다. 목요일마다 주민모임을 했는데 무거운 주제 아니고 어르신들이 옛날 저기에 뭐가 있었다, 이런 얘기 해주셨다. 노송동 주민분들이 좋아하셨다. 그 분들은 이 동네를 떠나고 싶어하지 않으셨다. 십년 넘게 재개발로 들썩거리던 동네여서 처음 인터뷰할 때는 경계하는 게 많았다. 재개발 때문에 왔냐고 물으시면 재개발 때문에 온 거는 맞는데 하려고 온 거는 아니리고, 동네가 좋으니 재개발하지 말자고 한다고 하면 좋아하셨다. 

학교는 전주에서 다녔지만 서울에 올라갔었다. 서울에서는 항상 공사 소리가 났었다. 조용한 게 너무 필요했다. 여기는 아침에 일어나면 새소리밖에 안 들린다. 나는 평화가 필요했다. 소음이 없는 공간이 너무 절실했다. 그래서 여기가 너무 좋다. 

고은설 대표는 꿈이 많은 분이다. 좋은 일인 것은 명백하나 아주 힘든 일을 하려고 한다. 주변에 좋은 사람이 많으면 수월하지 않을까. 기획자로서 아주 좋은 머리와 상상력을 가지고 계신다. 놀러오는 마음으로 도와드리고 있다."
#고은설 #전주 #도시재생 #별의별아트클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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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사진기자. 진심의 무게처럼 묵직한 카메라로 담는 한 컷 한 컷이 외로운 섬처럼 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징검다리가 되길 바라며 오늘도 묵묵히 셔터를 누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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