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신군부 쿠데타세력, 광주 강경진압 지침 하달

[김삼웅의 5·18 광주혈사 / 17회] 시위의 물결은 보다 적극적이고 조직적인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등록 2019.10.10 16:42수정 2019.10.10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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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ㆍ18은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국민저항권의 발동이었다. 박정희의 무소불위한 18년 독재가 그의 암살로 막을 내리고 국민은 ‘서울의 봄’을 맞이하였다.
 

5.18민주화운동 당시에는 가톨릭센터였지만 지금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인 5.18 기록물들을 보존하고 전시하고 있는 5.18민주화운동 기록관 ⓒ 김이삭

광주시내 가톨릭센터는 유신시대 이후 이 지역 민주화운동의 거점이었다. 가톨릭농민회ㆍ노동청년회ㆍ정평 등의 사무소가 모여 있어서 민주화운동의 진원지 역할을 하였다. 학생들이 가톨릭센터로 집결한 것은 이같은 연유에서였다.

가톨릭센터 앞 시위상황은 오후 2시 이후 다시 가열된다. 2시가 넘어서면서 한일은행, 조흥은행 인근을 중심으로 3백여 명이 모여 시위를 시작한 것을 계기로 점차 숫자가 불어나기 시작, 2시 40분께는 1천5백여 명, 오후 3시께는 3천여 명으로 불어난다. (『육군본부 작전상황일지』기록)

5ㆍ18 이후 18일 상황을 분석한 전투교육사령부(전교사)의 『광주소요사태분석교훈집』은 2시 이후 시내분위기를 "14시 경에는 시위행렬이 3백~1천여 명으로 확대, 경찰과 투석전으로 대치하면서 경찰의 가스차 1대를 방화하는 등 경찰능력으로는 저지할 수 없는 상태에 이름"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주석 4)


전투교육사령부의 기록은 사실과 차이가 많다. 경찰의 잔인한 폭력행사가 학생들을 분기시켰고, 갑자기 헬기까지 시위진압에 나서자 시민들도 함께 분개한 것이다.

"처음에는 헬기가 단지 작전을 지휘하는 정도로만 생각했다. 전경들과의 투석전이 계속되면서 시위대들의 숫자가 계속 불어나자 헬기가 직접 시위진압에 투입됐다. 헬기가 저공비행을 하면서 프로펠러의 바람을 이용하여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헬기가 다가오면 세찬 바람과 먼지 때문에 눈을 뜰 수 없어 골목으로 재빨리 피신했다가 재집결하여 투석하기를 여러 차례 반복했다."(구술ㆍ임낙평) (주석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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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 최후 항쟁지였던 옛 전남도청(현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및 분수대 광장과 전일빌딩(왼쪽 큰 건물). 전일빌딩은 계엄군의 총탄 자국이 남아 있는 5.18항쟁 역사의 현장이다. ⓒ 권우성

 
광주시내 곳곳에서 산발적인 시위가 계속되었다. 시위의 지도부가 따로 있었던 것이 아니고, 자연발생적인 것이어서, 그리고 학생들과 시민들이 여러 곳에서 참여했기 때문이다. 오후가 되면서 시위 가담자가 훨씬 많아지고, 연도에서 지켜보던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이날 오후에 시위는 오전보다 훨씬 밀도있게 전개돼갔다. 오후 2~3시를 넘기면서부터 시위대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 시위의 물결은 보다 적극적이고 조직적인 양상을 띠어가기 시작했다.

가로변의 시민들은 시위학생들에게 음료수와 빵 등을 공급, 무언으로 격려했다. 시위대가 점차 불어나고 구호의 내용이 격렬해지면서부터 시민들 중 상당수는 직접 학생들의 대오에 참여하기도 했다.
 
거의 1천5백여 명으로 불어난 시위대는 광주천변을 지나면서 공원 부근에 집결해 있던 5백여 명의 또다른 시위대와 맞닥뜨렸다. 환호성이 터져올랐다. 이들은 합세해서 광주천변 도로를 따라 황금동 입구의 구시청 부근으로 나아가 충장로 입구와 도청앞으로 진출하려 했다.

그러나 경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친 시위대는 도교육위 쪽으로 방향을 선회, 돌을 던지며 '어용교육집단'이라고 규탄했으며, 인근의 호화주택(화천기공사 사장 저택으로서, 개인집으로는 가장 호화주택으로 알려져 있다)에도 일제히 돌을 던지기도 했다. (주석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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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시내 주요 지역마다 공수부대 병력이 투입되어 시민들을 향한 무자비한 진압이 시작되었다.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시내 주요 지역마다 공수부대 병력이 투입되어 시민들을 향한 무자비한 진압이 시작되었다. ⓒ

 
이 시각에 서울의 모처에서 신군부 쿠데타세력은 은밀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뒤 강경진압이 나타났다.

이때 서울에서는 주영복 국방장관, 이회성 계엄사령관, 전두환 보안사령관 겸 중정부장 서리 등 군수뇌부가 모여 광주사태에 관한 대책회의를 열었다.

여기에서 정호용 사령관이 광주 상황에 대한 자세한 브리핑을 하면서 제3공수여단과 제7공수여단을 동시에 증파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전두환 장군은,

"20사단도 함께 진입시키는 게 좋겠어. 계엄군이 집중적으로 나서면 그만큼 이쪽의 시위가 위력적일 테니까."

이때 제9사단장인 백운택 소장이 전두환 장군에게 "제가 광주에서 희생하겠다"고 자기도 보내줄 것을 진언했으나 보류됐음 (제11공수여단 (여단장 최웅 준장)은 정호용 사령관의 특별명령으로 이내 광주에 진주해, 제11여단의 4개 대대가 2개대대 씩 나뉘어 각각 전남대ㆍ조선대에 배치되어 있었다). (주석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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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은 당시 광주를 학살의 근거지로 삼아 시민을 적으로 둔갑, 무참히 살육했다. ⓒ 5.18기념재단

 
쿠데타 세력은 야전군 출신은 없고 대부분 박정희 밑에서 정보나 수사업무로 군력을 가진 '정치군인'들이었다. 이들의 지침은 득달같이 광주에 하달되었다.

오후 1시쯤 유동3거리에 있는 수창국민학교에는 20여 대의 군용트럭이 집결, 공수부대원들을 토해내고 있었다. 그들은 운동장에서 한두 시간에 걸쳐 작전 지시를 받으며 조를 편성하고 있었다. 그들은 완전무장한 채로 얼굴에는 투석방어용 철망이 부착된 철모를 썼으며, 총은 등에다 비스듬히 각개총으로 멘 상태였다. 한 손에는 대검을, 다른 한 손에는 곤봉을 들고 있었다. 이들은 오후 2시가 지나면서부터 시외버스터미널을 시작으로 시내 곳곳으로 진압작전을 펴나가기 시작했다.(주석 8)


주석
4> 『정사 5ㆍ18』, 165쪽.
5> 『광주5월항쟁전서』, 25쪽.
6> 윤재걸, 앞의 책, 93~94쪽.
7> 『월간 말』, 1988년 5월호.
8> 윤재걸, 앞의 책, 93쪽.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5ㆍ18광주혈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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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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