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퍼링에 걸려 버벅댔던 내 청춘

[저질체력 미대언니의 쿰부 히말라야 기부트레킹 ⑦] 산 넘어 산

등록 2019.10.09 17:40수정 2019.10.09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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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17년 연재를 시작한 '저질체력 미대언니의 쿰부 히말라야 기부트레킹'의 후속 글로 다시 이어 씁니다. - 기자말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 목적지에 도착했다. 에베레스트를 오르기 위한 첫 관문. 5364m 나는 이곳까지 오르겠다고 약속했다. 이타를 후원하는 많은 분들의 응원과 기부에 대한 약속. 기뻐하며 삼바춤을 춰도 모자랄 판인데 왜 이렇게 허망하기만 한 걸까.

베이스캠프 위에 나는 자크가 고장 난 파카를 가져와 매우 추웠고, 비싼 장갑은 독일 정통 브랜드지만 중국에서 만든 이중국적인 녀석이라 착용이 불가능했다. 손은 꽁꽁 얼어서 감각이 없고 손톱 밑까지 쥐가 났다. 조금 더 준비를 하고 올라왔으면 달랐을까? 정상이라고 생각했던 곳이 생각보다 높게 느껴지지 않아 섭섭한 걸까? 상념들이 꼬리를 이어간다.

많은 이들이 도착해 족적을 남긴 곳에서 나도 사진을 찍었다. 이타 현수막을 들고 인증샷을 남겼다. 사진을 찍고 나니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에베레스트 등반을 시작한다면 이곳에 텐트를 칠 텐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돌무덤 주위를 강아지들과 빙빙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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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 ⓒ 한유사랑

 

어디서든 이타를 외칩니다 ⓒ 한유사랑



그러고 보니 대학에 입학했을 때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실기 입시를 위해 서울을 오가며 공부와 그림을 병행했다. 그 시절 대학의 꿈같은 청춘을 얼마나 기대했던가. 캠퍼스에서 하고 싶은 공부를 마음껏 하며 꽃 같은 청춘을 선물로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청춘은 누군가 선물로 주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일 년 동안을 버퍼링에 걸려 버벅댔다. 통학 지하철에서 누워 귀가하고 119대원분들과의 만남이 수차례, 엄마는 택시 기사님들께 구멍 뚫린 지갑이 되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골골대던 와중에도 동아리에는 가입했다. 물론 적응을 못했다.

연애라도 할걸. 썸만 드럽게 탔다. 그때는 썸인지도 몰랐다. 연락 오면 답을 하는 게 예의고 만나자고 하면 만나는 게 예의인 줄 알았다. 마음에 드는 대시에 미적거리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 친구는 군대에 있었다. 밥팅이도 이런 밥팅이가 있나. 동아리도 미팅도 재미가 없었고 음주 가무도 안 했다. 결국 휴학을 하고는 언니가 있던 중국으로 도망을 쳤다.

도망자의 인생이 어디 찬란하겠는가! 학업과 연애, 일상의 파도를 견뎌내지 못한 나는 별 소득도 없이 1년을 채 채우지 못하고 돌아왔다. 소득이 없는 게 아니라 마이너스였다. 중국의 강한 향신료와 매운 기름을 매일같이 소화해주던 신장과 장기들이 망가졌다. 중국 병원을 전전하다 휠체어에 실려 귀국한 내 꼴이 참 우스웠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마이너스로 돌아와서 오랫동안 병원에 누워있다 일어나 보니 모든 게 즐겁고 새로웠다.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실제로 뭐든 했다. 학교를 휴학하고 엄마 대신 유치원 선생님이 되었고, 필리핀으로 날아가 홈스테이 주인아줌마의 제비에게 차차차와 자이브를 배웠다.

복학을 해서는 카페를 빌려 전시를 했고, 학교에서 밤새 그림을 그리다 몰래 쪽문으로 빠져나와 길에 누워서 친구들과 함께 별을 봤다. 청춘이 내 옆에 있었다.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 내 발로 오른 가장 높은 곳. 기대하는 선물은 없었다. 높지 않은 언덕에는 돌무더기에 쌓여있는 족적들이 시끄럽게 놓여있고, 깃발들이 바람에 날리며 옴마니반메훔을 외치고 있었다. 에베레스트를 뒤로하고 네팔리들의 염원과 평화를 함께 바라며 떨어지는 해를 붙잡고 하산했다.

이 험한 길을 오르며 나는 다시 텅 비었다. 과한 것보다는 모자란 것이 낫다고 했고, 난 자리가 있어야 새로운 것으로 채울 수 있다. 이번 버퍼링은 얼마나 갈까. 청춘과 같은 선물은 언제 또 나에게 찾아올까.

-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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