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듣기

"좋은 연주는 상대의 소리를 잘 듣는 것"

[명랑한 중년] 재즈 드러머 김정훈씨가 알려준 살아가는 지혜 하나

등록 2019.10.10 09:11수정 2019.10.10 09:11
1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본격 재즈 드라마를 구상 중이다. 어디서 써달라고 주문받은 것은 아니고 나 혼자 좋아서 일단 써보려고 한다. 그동안 시험 삼아 단편 몇 개를 썼고 이제 본격적인 집필을 위한 자료를 수집하는 단계다.


나는 클래식이든 재즈든 공연 좀 보는 사람이다. 하지만 현재 음악 하는 사람들의 삶을 깊숙이 알지 못한다. 그곳에서는 어떤 언어들이 통용되고 어떤 눈빛들이 교환되는지, 또 그들은 어떤 경로로 재즈라는 장르에 몸을 담게 되었는지 등등 말이다.

자료 수집을 위해 일단 알고 있는 연주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하지만 잠깐의 인터뷰로는 한계가 있었고 내게는 더 깊이 들여다볼 시간이 필요했다. 요즘 드라마는 이야기 전개 면에서 잘 짜인 허구도 중요하지만, 또 얼마나 '핍진한가(문학에서 리얼리티를 추구하는 것)'가 생명이다.

성공한 미니시리즈를 살펴보면 자료 수집 기간부터 집필까지 3~4년의 세월이 걸리는 건 예사다. 풍부한 자료에서 좋은 글이 나온다. 지인 찬스를 써서 우리나라 최고의 재즈 드러머 김정훈씨를 소개받았다. 내가 개인적으로 완전 팬이기도 한 연주자다.
 

김정훈씨는 국내에서 드럼을 전공하고 네덜란드에서 4년 공부한 실력파 드럼연주자다. ⓒ 김정훈

 
김정훈씨는 국내에서 드럼을 전공하고 네덜란드에서 4년 공부한 실력파 드럼연주자다. 낮에는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밤에는 클럽에서 연주하거나 크고 작은 행사, 아트홀 같은 곳에서 공연한다. 아마 재즈 공연을 좀 보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봤을지도 모른다.

내가 그의 연주를 처음 본 것은 2014년 크리스마스이브, 영화 <주홍글씨>에 나왔던 청담동의 그 재즈 바에서였다. 처음 본 그의 드럼 연주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외모를 굳이 설명하자면, 북쪽에 있는 위원장 동지와 매우 흡사한 비주얼에 엘비스 프레슬리도 울고 갈 '삘'을 가졌다. 영화 <위플래쉬>에 나오는 드러머는 그에 비하면 장난이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아주 온몸으로 연주한다.
 

그가 무대 위에서 드럼을 세팅하는 동안 나는 무대가 잘 내려다보이는 2층의 한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 문하연

 
그의 공연 일정표를 받은 다음 날, 논현동의 재즈바에서 그의 연주가 있었다. 바로 출동. 인근 주차장에 차를 대고 휴대폰 지도를 보며 장소를 찾던 중, 길에서 그를 만났다. 지난 5월 그의 공연에서 잠시 스치듯 인사했는데, 눈썰미가 좋은 그는 단박에 나를 알아봤다. 여러 번 봐도 사람을 잘 기억을 못 하는 나는 속으로 좀 놀랐다. 안으로 들어가 그가 무대 위에서 드럼을 세팅하는 동안 나는 무대가 잘 내려다보이는 2층의 한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손님들이 시간 맞춰 하나둘 입장하고 있었다. 친절한 매너가 몸에 밴 사장님으로 추정되는 중후한 장년의 남자가 손님들을 테이블로 안내하고, 주문을 받았다. 그 연배에 흔히 볼 수 없는 세련된 분위기를 풍겼다. 나는 운전도 해야 하고 술을 못 마시기에 무알코올 음료는 없는지 물었고, 그분은 커피나 주스도 있으니 편한 거 시키라고 하셨다.


재즈바에서 커피라니. 술은 못 하지만 재즈는 듣고 싶은 나 같은 사람을 위한 공간으로 딱이다. 드러머 김정훈씨가 세팅을 끝내고 내 테이블로 왔다. 그의 말에 의하면 주문을 받으시는 분이 여기 사장님 맞고 탤런트 황정음 아버지라고 했다. 뜨아, 황정음이 아버지를 닮았구나.

나는 준비해간 질문들을 하나하나 꺼내놓았다. 그는 글을 쓰는 나보다 표현력이 월등히 좋았다. 그가 생각하는 '재즈란 무엇인가'에서부터 드럼을 하게 된 계기나 동기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연주할 시간이 되었다.

그가 연주하는 동안 나는 연주를 들으며서 인터뷰 내용을 잊어버리기 전에 꼼꼼히 메모했다. 요즘은 어떻게 된 게 기억력이 붕어랑 대결해도 질 판이다. 몇 곡의 연주를 하고 나니 여자 재즈 보컬리스트가 무대 위로 올라왔다.

그는 허스키한 목소리로 'I'm a fool to want you'를 불렀다. 노래도 연주도 너무 좋아서 푹 빠져서 들었다. 노래가 끝나자 그는 "누구나 살면서 바보 같은 사랑 한 번쯤은 하잖아요, 그러지 말자고 하는 노래예요" 했다. 거기에 대고 나는 "한 번이면 다행이죠, 바보 같은 사랑이라도 할 때가 좋은 건지도 몰라요" 중얼거렸다. 세상에, 어렸을 때 엄마가 드라마를 보면서 혼자 대꾸를 하면 어이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나도 늙었나 보다. 맘속으로 해야 할 소리가 밖으로 나오다니.

3부 연주까지 끝나자 그와 나는 바를 나와 자리를 옮겼다. 늦은 시간이라 마땅한 카페를 찾지 못했고 편의점 테이블에 앉았다. 밤바람이 시원하고 좋았다. 그가 생각하는 재즈는 '대화'라고 했다.

"그러니까 재즈는 연주자들끼리의 대화, 관객과의 대화라고 생각합니다. 상대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잘 들으면서, 동시에 즉흥적으로 내가 만들어 낼 리듬을 결정하고 대화하듯이 주고받아야 좋은 연주가 나와요. 대화가 없는 연주는 무미건조하고 막노동이나 다름없죠. 그러니 어쩌면 좋은 연주의 첫 단추는 상대의 소리(이야기)를 잘 듣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대화하면서 내 이야기만 고집하면 원만한 대화가 될 수 없듯이, 솔로 연주가 아닌 한 재즈도 같다는 거다. 그도 미숙할 때는 '상대의 소리가 틀렸다'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리듬만 고집했다. 지금은 그 사람의 소리를 듣고 틀리든 맞든 맞춰 준다고 했다. 일단 공감 먼저. 그러다 보면 상대도 느낀다고. 그러면 마침내 화합하는 소리가 만들어진다고. 인간 관계의 기본인 대화도, 재즈도, 기본은 하나였다. 상대의 이야기를 '잘 듣는 것'. 어리석게도 이 기본을 지키지 못해 나는 얼마나 많은 불협화음을 만들어냈는지.

짧았지만 유익한 시간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겨우 몇 시간 타인의 삶을 들여다본 것뿐인데도 뭔가 큰 깨달음을 안고 온 듯한 생각이 들었다. 생각의 품이 1㎝만큼 넓어진 듯한. 한 가지 일을 오랫동안 한 사람들은 자기 일에 철학이 있다. 일과 철학이 있는 사람은 외모나 경제력과 상관없이 매력적이다.

그리고 그런 매력적인 사람들이 주변에 많을수록 나도 매력적인 사람이 될 확률이 높아진다. 흘러넘치는 매력이 내게도 묻을 테고, 나 또한 그런 사람이 되려고 노력할 테니까. 오늘 다시 그를 만나 인터뷰 한다. 그가 또 어떤 재즈 이야기를, 삶의 이야기를 들려줄지 설레고 기대된다.
덧붙이는 글 이글은 개인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오조 트리오 #송준서 트리오 #재즈 앨범 우물 #드러머 #재즈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AD

AD

AD

인기기사

  1. 1 검찰 급했나...'휴대폰 통째 저장', 엉터리 보도자료 배포
  2. 2 재판부 질문에 당황한 군인...해병대 수사외압 사건의 퍼즐
  3. 3 [단독] 윤석열 장모 "100억 잔고증명 위조, 또 있다" 법정 증언
  4. 4 "명품백 가짜" "파 뿌리 875원" 이수정님 왜 이러세요
  5. 5 '휴대폰 통째 저장' 논란... 2시간도 못간 검찰 해명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