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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이 저마다 사전을 쓴다면

[책이 나왔습니다] 숲노래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등록 2019.10.09 15:30수정 2019.10.09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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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그림 ⓒ 철수와영희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숲노래 기획
 최종규 글
 철수와영희
 2019.10.9.

 
우리말이 우리말답게 되거나 빛나거나 일어나거나 퍼지거나 날아오를 수 있도록, 한국이란 나라에서 살며 한국사람으로 쓰는 한국말이 슬기롭고 사랑스러우면서 넉넉하고 따사로운 한국말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면서 배움수첩을 씁니다. 그리고 이 배움수첩을 살짝 들추어서 이웃님하고 수다를 떨고 싶어요. 같이 배워 보자고, 어렵지 않다고, 어렵다는 생각이 아니라 즐겁게 처음으로 배운다는 생각을 하자고, 우리는 아직 우리말·한국말을 배운 적이 없는 줄 기쁘게 받아들여서, 이제부터 새롭게 배우자는 수다를 떨고 싶습니다. (7쪽)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철수와영희, 2019)이라는 사전을 써냈습니다. 2019년 10월 9일을 펴낸날로 찍은 한국말사전입니다. 예전에 익히 말한 적이 있습니다만, 저는 '국어사전' 아닌 '한국말사전'이란 이름을 씁니다.

'국어'란 한자말은 일제강점기에 일본 우두머리가 아시아 여러 나라를 군홧발로 내리누르면서 억지로 쓰도록 시킨 말이거든요. 일본 우두머리가 한국 중국 대만한테 쓰라고 시킨 '국어 = 일본말'입니다. 이런 자취가 짙게 밴 '국어'이니 '국어사전'이란 말을 도무지 쓸 수 없기도 하거니와, 국립국어원 같은 곳도 앞으로 이름을 고쳐야 한다고 느껴요. '국민학교'를 '초등학교'로 바꾸었듯 새 이름을 지을 노릇이라고 여겨요.


그나저나 <우리말 꾸러미>('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을 줄인 이름)는 철수와영희 출판사에서 석 자락째 펴내 주는 "새롭게 살려낸 한국말사전"입니다. <우리말 꾸러미>에 앞서 2016년에 <비슷한말 꾸러미>를, 2017년에 <겹말 꾸러미>를 펴내 주었습니다.

석 자락째인 <우리말 꾸러미>에는 '우리말'이란 이름을 넣었습니다. 왜 '우리말'이라 했느냐 하면 '우리가 우리 스스로 지어서 쓰는 우리 생각을 담은 우리 사랑으로 가꾸는 말'을 들려주고 싶었거든요.
 
"이런 가을숲을 보면 다들 '단풍'이라 말하는데, 너무 흔한 말 같아요. 최종규 씨가 좀 다른 말을 지어 줄 수 없나요?" 빙그레 웃었습니다. 제가 왜 '단풍' 말고 새말을 지어 주어야 하는지 알 길이 없으니까요. 다만, 정 '단풍'이란 한자말을 안 쓰고 싶다면 새말을 스스로 지으면 된다고, 가을숲을 바라보는 느낌을 그대로 담으면 된다고 얘기했어요. 그러니 "그래도 좀 지어 주시지요?" 하시기에 "저는 이 가을숲을 보면 마치 무지개가 숲에 내려왔구나 싶어요. 늘푸른나무, 노란나무, 빨간나무, 앙상나무, 참말 '가을무지개' 아닌가요?" (20쪽)

<우리말 꾸러미> 첫 꼭지는 '가을무지개'입니다. 전남 고흥으로 찾아온 어느 방송국 일꾼이 불쑥 한 가지를 물었어요. 미리 알려주지 않고 불쑥 물었는데요, '단풍'이란 한자말이 너무 흔하다 싶어서 가을빛이나 가을맛을 제대로 나타내기 어렵다고 여긴다더군요. 이러면서 저더로 그자리에서 바로 새말을 하나 지어 달라 합디다.

좀 딱했습니다. 어느 말이든 스스로 아쉽다고 여기면 스스로 지으면 됩니다. 남이 지어 줄 노릇이 아니에요. 남이 지어 준 말이 그분한테 얼마나 알맞거나 즐거울는지는 참 모를 수밖에 없어요. 그렇지만 싫은 티를 내고 싶지 않았어요. 갑작스레 묻는 말이었지만, '단풍'이라는 낱말이 한자말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우리 집 아이들도 이 한자말을 못 알아듣겠네 싶더군요.

저는 방송국 일꾼한테 알려줄 새말이 아닌, 우리 집 아이들이 가을빛이며 가을맛을 새롭게 누리기를 바라는 마음이 되어 그자리에서 바로 새말 하나 '가을무지개'를 지었습니다.

가을무지개 : 가을이 깊으면서 숲이나 들에 달라지는 알록달록한 빛깔. '단풍'이란 말처럼 나뭇잎이나 풀잎이 저마다 다른 빛깔로 바뀌면서 곱게 어우러지는 모습
별무지개 : 높다란 하늘에서 알록달록하게 온갖 빛깔이 어우러지면서 흐르는 기운. 이른바 '오로라'라고 한다
밤무지개 : 밤하늘에 뜬 별을 찬찬히 살피면 별빛이 하나가 아니라 다 다른 줄 알아차릴 수 있으니, 노랗고 빨갛고 푸르고 불그스름하고 파르스름한 갖가지 별빛이 그야말로 곱게 어우러지기에, 이러한 별잔치를 가리킨다. '미리내'나 '은하수'라고도 할 수 있다
 
 

창고에서 갓 들어온 사전 ⓒ 최종규/숲노래

 


가을이 깊은 멧자락을 바라보면 온갖 빛깔 나뭇잎이며 풀잎을 볼 수 있어요. 이 잎빛은 무지개 같아요. 제가 보기로는 그렇습니다. 하늘이 아닌 숲에 드리운 무지개가 바로 가을빛이네 싶어서 '가을무지개'란 낱말을 지었고, 이렇게 지은 낱말에 뜻풀이를 처음으로 붙였지요.

이렇게 새말을 짓고 뜻풀이를 붙이고 보니, 덩달아 다른 말이 떠올라요. 밤에 보는 여러 아름다운 빛 가운데 '오로라'가 있어요. 비록 한국에서는 오로라를 못 본다지만, 북극 쪽으로 가면 볼 수 있다지요. 우리 숲집에서는 밤에 늘 미리내를 맨눈으로 봐요. '미리내(← 은하수)'는 텃말이 있으니 굳이 새로 안 지어도 될 테지만, 아이들한테 오로라를 이야기하자니 새말이 더 있어야겠네 싶었어요. 그래서 마치 별처럼 하늘을 채우는 반짝이는 빛이기에 '별무지개'란 이름을 붙여 보았습니다. 이러고서 '미리내'한테도 슬쩍 '밤무지개'란 이름을 더 붙여 보았어요.
 
글을 쓰는 어른으로 살며 '원고지'란"글을 쓰는 종이"일 뿐인 줄 뒤늦게 알아챘어요. '색종이'는 '빛(빛깔)'을 넣었을 뿐이요, '이면지'는 '뒤'를 쓸 수 있을 뿐이더군요. (25쪽)

둘레에서 흔히 쓰듯 저도 그냥그냥 '원고지'란 말을 쓰며 지냈는데, 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라면서 아버지가 하는 일이 궁금해서 물어봐요. 그래서 "응, 오늘은 아버지가 원고지에 글을 써서 보내려고." 하고 말했지요. 아이들은 "원고지? 원고지가 뭐야?" 하고 되물어요.

아차 싶었습니다. 둘레에서 흔히 쓰더라도 우리 집뿐 아니라 모든 아이들한테는 하나같이 낯선 말일 수밖에 없어요. 글쓰는 어버이를 둔 아이라 하더라도 원고지란 말이 낯설 수 있어요. 그래서 바로 말을 바꾸었습니다.

"아, 그러니까, 글을 쓰는 종이, 그래 '글종이'에 글을 쓰려고. 모든 종이에는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릴 수 있잖니? 그런데 따로 '글종이'라 할 적에는 글씨가 얼마나 되는가도 살피고, 글씨도 또박또박 알아보기 좋으라고 이렇게 칸을 넣어. 이렇게 칸을 넣어서 글을 쓰도록 하는 종이를 '글종이'라고 해."

겉종이 : 겉을 이루거나 싸거나 덮은 종이. '표지 ·겉표지· 겉장'을 가리킨다
그림종이 : 그림을 그리는 종이. 그림을 그리기 좋도록 깨끗한 종이. '도화지'를 가리킨다
글종이 : 글을 쓰는 종이. 글을 쓰기 좋도록 칸을 넣은 종이. '원고지 ·원고용지'를 가리킨다


제가 아이를 낳아 돌보는 살림을 꾸리지 않았어도 이렇게 새말을 지었으려나 하고 돌아보면, 뭐 그래도 그럭저럭 짓기는 했겠다고 느껴요. 그렇지만 대수롭지 않게 지나친 말이 많았으리라 봅니다. 여느 어른으로서는 그냥 쓰는 말이 아이들한테는 모두 낯설거나 어려울 수 있는 줄 깊이 못 살폈겠다고 느껴요.
 

요 몇 해 사이에 꾸준히 마무리를 짓는 '작게 묶어'서 '가볍게 읽으며 스스로 배우는 사전' 꾸러미. ⓒ 최종규/숲노래

 
어느 때부터인가 방송이며 책이며 '리액션'이란 영어가 넘칩니다. 뭔가 커다란 몸짓이나 말씨로 대꾸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듯 여기는 바람이 불기도 하는데, 영어 '리액션'은 한자말 '반응'을 가볍게 밀어냅니다. 그리고 예전부터 우리가 흔히 쓰던 '맞장구'나 '맞장단'이란 말씨를 까맣게 잊어버리게 내몰아요. (82쪽)

저는 집에 텔레비전을 안 둡니다. 1994년부터 텔레비전 없는 살림을 꾸립니다. 바로 1994년부터 스스로 한국말을 처음부터 새롭게 익히는 길을 걸었고 이때부터 '우리말 배움 수첩'을 썼어요. 고등학교 2학년이던 1992년부터 교과서 귀퉁이나 수첩 한켠에 조금씩 '우리말 배움 적바림'을 끄적이곤 했지만, 제대로 틀을 갖추어서 쓴 때는 1994년입니다.

가만히 보니 텔레비전을 제 삶자리에 못 들어도록 하던 그무렵부터 말이랑 글을 한결 깊고 넓게 보는 눈을 틔울 만했구나 싶습니다. 텔레비전이 나쁘다는 소리는 아닙니다. 텔레비전을 켜면 그저 멍하니 들여다보고 말아요. 그러나 책을 손에 쥘 적에는 스스로 종이를 넘기고, 스스로 글줄을 훑어야 하며, 스스로 줄거리를 꿰어야 하고, 스스로 이야기를 갈무리해서, 스스로 모든 슬기를 추슬러야 하더군요.

맞짓 : 누가 하는 말이나 몸짓을 받아서 들려주는 말이나 보여주는 몸짓
맞장구 : 1. 마주보면서 치는 장구 2. 누가 하는 말이나 몸짓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하는 말이나 몸짓. 때로는 더 크게 보여주기도 한다
맞장단 : 1. 마주 쳐 주는 장단 2. 누가 하는 말이나 몸짓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하는 말이나 몸짓. 때로는 더 크게 보여주기도 한다


사람들이 '리액션'이란 영어를 그토록 흔히 아무 데에서나 쓰는지 까맣게 몰랐습니다. 어느 날 서울에 이야기마실을 갔다가 '리액션'이 되게 흔한 말이란 얘기를 듣고서 뒷통수를 긁적였습니다. 이러면서 생각했지요. 누구보다 우리 집 아이들한테 어떤 말씨를 알려주면 좋을까 하고 헤아렸습니다.

처음에는 '맞짓' 같은 말을 지어 보는데, 얼결에 오랜 말이 떠올랐어요. 바로 '맞장구'하고 '맞장단'입니다. 이런 말을 떠올리고 보니 '맞가락' 같은 새말을 지어도 좋겠다고 느꼈습니다. '맞몸짓'이나 '맞말' 같은 말을 써도 어울릴 테고요.
옷을 흔히 물려입으며 '물림옷'이란 말을 써요. 어버이가 물려주는 글씨(글)는 '물림글씨·물림글'이 될 테고, 물려받는 '물림일'도 있겠지요. 2018년 가을에 서울시는 '오래가게'란 이름으로 오래된 가게를 기리는 일을 한다고 밝힙니다. '오래가게'란이름도 좋습니다. (90쪽)
 

사전을 새로 내면서, 그동안 낸 여러 사전을 한꺼번에 알릴 수 있는 알림종이도 꾸며 보았다. ⓒ 최종규/숲노래

 
<우리말 꾸러미>는 1992년부터 맞닥뜨리면서 생각한 새로운 말결을 120갈래로 나누어서 갈무리한 사전입니다.1992년부터 2019년 사이인 만큼 자그마치 스물여덟 해치 '우리말 배움 수첩'을 단출하게 간추린 셈입니다. 몇 만에 이를 우리말 이야기가 있으나 이를 고작 120가지로 추려서 엮었으니까요.

긴 나날을 살아온 만큼 <우리말 꾸러미>를 제법 두툼하게, 그러니까 120가지 이야기를 담은 참 두꺼운 사전으로도 엮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두꺼운 사전이 되면 자칫 '그때그때 알맞게 새말을 짓는 일'을 누구나 하기 어렵다고 여길 수 있겠다고 느꼈어요. 단출하게 엮는 가벼운 사전을 선보인다면, '이럴 때에 이 말을 살려서 써도 좋겠네' 하고 생각할 이웃님이 있을 테고 '나라면 이럴 때에 좀 다르게 말을 살려서 써 보고 싶네' 하고 생각할 이웃님이 있으리라 보았습니다.

물림가게 : 물려받거나 물려주는 가게. 집안에서 물려받을 수 있고 남한테서 물려받을 수 있다
물림일 : 물려받거나 물려주는 일
물림옷 : 물려받거나 물려주는 옷
오래가게 : 오래된 가게. 꽤 많은 나날이 지나도록 물려받거나 물려주면서 이어온 가게
오래집 : 오래된 집. 꽤 많은 나날이 지나도록 물려받거나 물려주면서 이어온 집


'물림'하고 '오래'란 낱말을 놓고서 새말을 차곡차곡 엮던 무렵, 서울시에서 '오래가게'란 이름으로 오래된 가게를 북돋우는 일을 했습니다. 서울시 벼슬아치하고 저하고 아무 끈이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그저 서로 다른 자리에서 서로 비슷한 때에 서로 비슷한 말을 놓고서 새말을 지어야겠다고 생각했구나 싶어요.

자, 생각해 봐요. '오래가게'가 있다면, 이런 오래가게가 모인 곳은 '오래마을'이곤 합니다. 오래마을이라면 '오래골목'이 있을 테고, 오래골목을 걷다 보면, 이 길이 '오래길'이라고 느낄 만해요.

여기에서 생각을 뻗으면 '고전'이란 책을 '오래책'이란 말로 담아내어도 재미납니다. 그리고 '오래마을'이란 이름에는 '장수초' 같은 말도 담아낼 만해요.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는 이웃님이 어느 날 "예전부터 '사회'라는 이름을 잘 모르겠어요. 아이들한테 '사회'가 무엇인지 어떻게 가르쳐야 좋을까요?" 하고 여쭈셨어요. 그래서 '사회(社會)'라는 일본 한자말을 어떻게 풀어내야 하는지 헤아려 보았어요. (120쪽)

저도 어릴 적에 '사회'란 말이 참 아리송했습니다. 도무지 뭐가 뭔지 종잡기 어려웠어요. 어른이란 나이가 되고도 한참 지난 어느 날, 사전이란 책을 한참 쓰던 어느 때, 어느 이웃님이 조용히 물은 한 마디를 듣고서 '사회'라는 일본 한자말이 어떻게 태어났는가를 샅샅이 알아보았습니다.

지난날 일본 지식인은 영어 'society'를 제대로 옮겨내려고 백 해가 넘는 나날을 들였으며, 숱한 일본 지식인이 머리를 맞대어 드디어 '사회'란 한자말을 엮었다지요. 그런데 지난날에 새로운 말을 끝없이 지어내며 새로운 나라를 세우거나 가꾸려 하던 그 일본 지식인은 이제 자취를 감춥니다.

이제 웬만한 한국사람도 다 알다시피 일본은 영어를 '재패니시'로 바꾸어서 말합니다. 스스로 새말을 짓지도 않고, 오랜 일본말을 쓰지도 않아요. 영어로 툭툭 내뱉습니다. 이런 흐름을 한국에서도 고스란히 따르곤 해요.
 

사전은 한 사람이 쓰되, 곁에서 살림꽃이 되어 주는 아이들이 있으니, 새롭고 즐겁게 쓸 수 있다. ⓒ 최종규/숲노래

 
삶터 : 살아가는 터. 삶을 이루는 터. 사람이 모여 삶을 짓거나 가꾸거나 누리는 터. 집, 마을, 두레, 모임, 고을, 고장, 나라, 지구라는 별처럼, 사람이 작게 모이거나 크게 모여서 이루는 모든 터를 두루 아우르는 말
삶자리 : 살아가는 자리. 살아가며 이루는 자리. 사람이 모여 삶을 짓거나 가꾸거나 누리는 자리
삶길 : 살아가는 길. 살아가며 이루는 길. 사람이 모여 삶을 짓거나 가꾸거나 누리는 길
삶켠 : 살아가는 어느 한켠. 살아가며 이루는 어느 한켠. 사람이 모여 삶을 짓거나 가꾸거나 누리는 어느 한켠


수수하게 생각하면 오히려 새로운 길이 나오곤 합니다. 살아가는 터이기에 '삶터'예요. 때로는 '삶자리'라 할 수 있어요. 이 얼거리를 생각하면 '보금자리'라는 말도 '보금터'나 '보금숲'처럼, 때로는 '보금마을'이나 '보금책'처럼 새롭게 살려서 쓰는 길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어른들은 툭하면 '장유유서(長幼有序)'란 말을 꺼냈습니다. 어른들이 슬기롭고 아름다우면서 훌륭하다면, 굳이 이런 중국말을 들먹이지 않아도 '어른먼저'를 몸이며 마음으로 받아들여서 펼 만하다고 느껴요. (142쪽)

어른을 먼저 섬겨야 한다면 '어른먼저' 같은 말을 지어서 쓰면 되어요. 한국말이란 이렇습니다. 한자말이나 영어도 이와 마찬가지예요. 어느 나라 말이나, 수수한 결을 그대로 살려서 새말을 짓습니다. 이리하여 아이를 먼저 아끼려는 마음은 '아이먼저'란 낱말로 담아낼 만해요. 내가 먼저 하겠다면 '나먼저'로, 네가 먼저 해도 좋다면 '너먼저'라 하면 좋아요.

아이먼저 : 아이가 먼저 하거나 가거나 쓰거나 누리도록 자리를 내주는 일이나 몸짓
어른먼저 : 어른이 먼저 하거나 가거나 쓰거나 누리도록 자리를 내주는 일이나 몸짓
나먼저 : 다른 사람보다 내가 먼저 하거나 가거나 쓰거나 누리려고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는 일이나 몸짓
이웃먼저 : 나보다 이웃이 먼저 하거나 가거나 쓰거나 누리도록 자리를 내주는 일이나 몸짓


우리는 누구나 사전을 쓸 수 있습니다. 아니, 우리가 미처 못 느낄 뿐, 우리는 언제나 저마다 다르게 사전을 쓰며 살아갑니다. '사투리'가 바로 사전이에요. 글로 옮기지 않더라도 말로 쓰는 사전이에요. 고장마다 결이 다른 말씨가 바로 고장마다 다 다른 사람이 이녁 살림살이를 바탕으로 '입말로 쓴 사전'이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말결은 사람마다 다르니, 누구는 '아쭈?'라 하고 누구는 '어쭈?'라 하며 누구는 '어쭈쭈?'라 할 수 있어요. "밥을 먹다"를 놓고도 "밥을 묵다"나 "밥을 무욱다"처럼 달리 말하지요.
사전을 보면 '큰사람'이란 낱말이 나옵니다. 이와 맞물려 '작은사람'은 없어요. 사전에 '큰이·작은이'는 나오는데 피붙이 사이를 가리키는 뜻으로만 풀이합니다. 그렇지만 됨됨이나 마음결이나 솜씨나 재주가 뛰어나거나 훌륭한 사람만 있지 않아요. 널리 기리거나 섬기는 '큰사람'도 있으나, 앞으로 피어날 '작은사람'도 있어요. (189쪽)
 

작은 출판사에서 '작지만 알찬 사전'을 펴내 주기로 하면서, 어느덧 석 자락째에 이르는 "읽는 사전"이 태어났다. ⓒ 철수와영희

 
큰사전을 쓰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 사전을 우리 슬기로 조그맣게 쓰면 되어요. 다만 우리가 쓰는 사전은 어떤 전문사전이나 백과사전이 되기보다는, 살림사전이나 사랑사전이 되면 좋겠습니다. 생각사전이나 마음사전이 되면 더 좋겠어요.

더 크게 엮지 않아도, 더 많이 담지 않아도 좋아요. 더 작게 엮어도 좋으며, 조촐하게 엮는 말 한 마디마다 짙고 푸지게 즐거운 사랑을 담으면 좋겠어요. <우리말 꾸러미>는 이 나라 모든 이웃님이 저마다 다른 사전을 즐겁게 쓰는 길에 징검다리가 되기를 바라는 사전입니다.

큰별 : 1. 커다란 별 2. 솜씨나 재주가 뛰어나거나 훌륭해서 널리 섬기거나 기리는 사람
작은별 : 1. 작은 별 2. 솜씨나 재주가 살짝 뛰어나거나 훌륭한데 아직 널리 알려지거나 도드라지지 않은 사람. 앞으로 솜씨나 재주가 자라서 널리 알려지거나 도드라질 사람


저는 언제나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말을 짓고 뜻풀이를 붙이며 보기글을 씁니다. 우리 집 아이들도 바라보고 이웃집 아이들도 마주합니다. 때로는 열 살 아이 눈높이로 새말을 엮으려 합니다. 때로는 여덟 살이나 다섯 살 아이 눈빛으로 새말을 지으려 해요.

아이들은 언제나 그자리에서 바로바로 새말을 스스로 엮어요. 어른들처럼 '알거나 들은 낱말이 많지 않'거든요. 아이 나름대로 아는 몇 가지 바탕말을 이모저모 엮어서 나타내어요.

이런 아이들 말놀이를 눈여겨보고 귀담아듣는다면 한국말이 한결 산뜻하면서 쉽고 이쁘리라 생각해요. 국어 전문가 몇몇 사람이 지어서 퍼뜨릴 한국말이 아닌, 나라 곳곳에서 수수한 우리들이 저마다 다른 살림을 바탕으로 '저마다 같은 사랑'으로 지은 말이 넘실넘실할 날을 기다리는 마음이에요.
'무침'은 양념을 한 곁밥입니다. 양념을 해서 풀을 무쳤으면 '풀무침', 양념을 해서 나물을 무쳤으면 '나물무침'이에요. '콩나물무침·시금치무침·떡무침·톳무침'을 할 만해요. 양념을 안 하고 섞으면 '버무리'입니다. '풀버무리'도 '나물버무리'도 즐길 만해요. (213쪽)

2019년에 <우리말 꾸러미>를 선보인다면, 새로운 2020년에는 <손질말 꾸러미>를 선보이려고 한창 애씁니다. <우리말 꾸러미>는 새로 맞아들이는 삶자리에서 어떻게 우리말을 살려서 쓸 만한가 하는 대목을 이야기로 엮고서, 뜻풀이를 모았다면, <손질말 꾸러미>는 숱한 자리마다 흘러넘치는 '이 말씨로는 좀 아쉽네' 싶은 대목을 살살 긁어 주는 사전이 되도록 엮으려 해요.

풀무침 : 양념을 하고서 풀을 고루 섞은 먹을거리. '샐러드'를 가리킨다
풀버무리 : 양념을 안 하고서 풀을 고루 섞은 먹을거리. '샐러드'를 가리킨다
과일무침 : 양념을 하고서 과일을 고루 섞은 먹을거리
과일버무리 : 양념을 안 하고서 과일을 고루 섞은 먹을거리

 

큰아이가 종이두루미를 접어 준다. 아버지더러 더 즐겁게 기운을 내라는 뜻이라고 한다. ⓒ 최종규/숲노래

 
'무침'이 있고 '버무리'가 있어요. '범벅'도 있고 '비빔'도 있지요. 다 다르게 누리는 살림입니다. 이 다 다른 살림을 오늘날 우리 사전은 얼마나 살뜰히 담아내었을까요? 어쩌면 아직 하나도 안 담아내지는 않은 모습 아닐까요? 국립국어원을 비롯해 모두들 백과사전으로만 치닫고 '한국말사전' 하고는 멀어지는 모습은 아닌가요?
모든 한국사람이 모든 자리에서 아주 말끔하도록 오로지 한국말만 써야 할 일은 없다고 여깁니다. '한국말'이란 바구니에 깃들 말을 너무 솎아낼 수 없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이제는 이 물결이나 흐름을 멈추어 놓고서 곰곰이 생각할 때라고 여겨요. 새물결로 나아갈 길목이라고 여겨요. 우리는 여태 어느 하루도 우리 나름대로 생각을 지어서 우리가 즐겁게 나눌 말을 지으려고 애쓰거나 힘쓰거나 마음쓴 적이 없는 줄 깨달아야지 싶어요. 이제부터 우리 나름대로 우리가 쓸 말을 우리 손으로 짓는 길에 힘이나 마음을 쓸 뿐 아니라, 사랑도 쓰고 돈도 쓰고 생각도 쓰고 슬기로운 눈빛도 쓰면서 틈틈이 '즐겁게 나누며 곱게 빛낼 한국말'을 짓는 일도 하면 훨씬 좋으리라 봅니다. (327쪽)

초·중·고등학교 열두 해에 걸쳐서 '국어' 수업을 하고 시험을 치릅니다. 그러나 이런 수업이나 시험으로는 한국말을 알거나 익히기 어렵다고 느낍니다. 언제나 맞춤법이며 띄어쓰기이며 말법에만 얽매이고 시험점수를 더 잘 따는 데에 기울고 말아요.

이제는 한국말을 '생각을 담아내어 마음을 주고받는 그릇이자 씨앗'이라는 대목으로 바라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어렵게 꼬는 말이 아니라, 즐겁게 나누는 말을 찾아나서면 좋겠어요. 온갖 딱딱한 말법으로 묶는 말이 아닌, 어깨동무하는 싱그러운 살림자리에서 길어올리는 따스하고 고운 말로 거듭나도록 마음을 쓰면 좋겠어요.

이제는 한국말을 가르치고 배울 때라고 느껴요. 국어가 아닌 한국말을, 이 나라 바람이며 햇볕이며 흙이며 숲을 담아내는 말을, 차근차근 되새기면서 가꾸고 누릴 때라고 느껴요. 고맙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글쓴이 누리집(https://blog.naver.com/hbooklove)에도 함께 올립니다.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숲노래 사전 #숲노래 #한국말사전 #국어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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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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