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사회는 마르지 않는 저수지일까?

[뉴스 '밖' 사회의 풍경들 ②] 지역 시민사회 생태계 건강하게 할 정책적·사회적 노력 필요

등록 2019.10.11 09:38수정 2019.11.19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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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 터크만(Gaye Tuchman)의 말처럼 오늘날 우리는 뉴스라는 "창"을 통해 사회를 바라봅니다. 더욱이 소셜네트워크의 등장과 확산 속에서 우리가 말하고 행동하는 거의 모든 것들은 뉴스거리가 되곤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어떤 사람들 혹은 이야기는 뉴스라는 창 밖에 머무르며 충분하고도 적절한 조명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공회대 사회과학연구소의 연구진들은 노숙인, 입양인, 난민, 유학생, 청소년, 참사피해자, 여성, 이주민, 비인간적인 것(nom-human) 등 그동안 손쉽게 지나친 혹은 잊혀진 다양한 뉴스 밖 사회의 풍경들에 관심을 갖고 사회학적 분석을 시도하고자 합니다. 총 8분의 사회학 전공자 및 연구자가 아래와 같은 주제로 글을 연재할 계획입니다. - 기자 말.

한 사회의 영역을 구분하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흔히 채택되는 방식은 한 사회를 정부, 시장, 시민사회 3가지로 나누어 보는 방식이다. 시민사회는 흔히 '사회'라고 불리기도 하고, 학술적으로는 '제3섹터'(Third Sector), '비영리영역'(Nonprofit Sector), '자원부문'(Voluntary Sector)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시민사회는 늘 존재해 왔지만, 그것에 대한 논의와 실천이 본격적으로 활성화 된 것은 전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적 경제 질서가 자리 잡고, 서구 공산주의 체제가 대전환을 맞이하던 시기 즈음으로 알려져 있다. 이 시기 시민사회가 부각된 이유는 정부 혹은 시장이라는 영역에 힘을 실어주는 정치·경제적 체제로 해결되지 않는 사회문제들에 직면한 사정과 관련이 있다. 이른바 시장실패·정부실패(Market Failure·Government Failure)라 불리는 현상이다.

그리고 정치적 대표성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시민참여, 고착화 되는 경제적 불평등 구조에 균열을 만들기 위한 사회적 경제, 그리고 복잡·다양해지는 사회적 욕구와 정체성 충족을 담보할 영역으로 시민사회가 부각되기 시작했다.

한국 시민사회의 기원은 멀리 구한말이나 일제강점기 전개된 동학농민운동이나 독립운동, 계몽·봉사활동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런데 한국에 있어서 시민사회의 형성은 서구와 다른 경로를 거쳐 왔다. 시민사회가 오랜 시간 시민들의 자율적인 상호작용에 의해 형성되기 보다는 국가의 강력한 통제가 존재했다. 그리고 국가로부터 시민사회가 분리되는 과정 보다는 시민사회가 국가의 건립과 재건, 그리고 민주화의 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왔다.

한편 한국 시민사회가 본격적으로 활성화된 시기는 전세계적 흐름에 조응하고 있지만, 그 맥락에는 다소 차이가 있다. 1980년대 후반 민주화가 진전되면서 이전부터 존재해온 시민사회단체들(YMCA, YWCA, 흥사단, 여성의 전화 등)에 더해 1989년 경제정의실쳔시민연합(경실련)의 창립을 시작으로 다양한 의제와 활동방식을 지닌 시민사회단체들이 폭발적으로 등장했다. 

한국 시민사회에 나타나는 변화들


2000년 총선시민연대 활동과 2004년 17대 국회 출범에 즈음한 국면에서 한국 시민사회의 영향력은 정점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민주화 이후 지연된 과제들인 정치개혁을 비롯한 다양한 개혁지향적 시민운동이 결실을 맺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2002년 시작돼 2008년, 그리고 최근 2016년 이어진 이른바 '촛불시위'라는 사회적 현상은 한국 시민사회에 성찰과 전환의 계기로 작용했다. 기존에 시민사회단체들의 '지도'나 '지원'을 통해 사회에 참여했던 시민들은 이제 다양한 방식으로 서로 소통하며 새로운 방식으로 스스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2000년대 후반 이후 이어진 보수적 성향의-시민사회에 친화적이지 않은-정권을 거치면서 시민사회의 다양한 활동들의 활력과 시민사회가 지닌 영향력이 현저하게 감소하면서 이른바 '시민사회 위기론'이 회자되기도 했다.

최근 한국 시민사회의 의미와 역할에 큰 변화를 가져 온 중요한 기제는 시민사회와 정부·시장 영역간 중첩되는 부문과 관련이 있다. 2011년 당선된 박원순 서울시장을 필두로 2010년대 치러진 세 차례의 지방선거에서 눈에 띠는 현상은 '개혁적'-때로는 진보적이라 불리는-정치인들이 대거 당선된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기존에 시민사회에서 주창하고 실험해 온 다양한 활동들을 적극적으로 정책에 반영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것이 서울시인데, 박원순 시장 재임 시기에 마을만들기, 갈등조정, 도시재생, 사회혁신, 주민자치 등 이른바 '주민주도 협치기반' 정책과 실천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아울러 시장과 시민사회 간 중첩부분에서는 시장의 기제가 충족시키지 못하는 시민들의 다양한 경제적 욕구를 충족하고, 경기침체에 대응해 새로운 경제적 활로를 찾기 위한 방편으로 사회적 경제가 활성화 됐다. 사회적 기업, 협동조합, 공정무역, 지역화폐, 공유경제, 비영리 스타트업 등의 정책들이 여기에 포함된다. 

한국 시민사회에 대한 관점 다시 생각하기

시민사회와 정부·시장간 중첩부분 활성화 통해 얻어지는 공과 과에 관해 다양한 사회적 논의들이 교차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한국 시민사회 자체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특히 최근 일련의 변화 속에서 시민사회를 바라보는 무의식적 관점을 다시 생각해 볼 것을 촉구하고자 한다.

정부·시장과 시민사회간 중첩부분이 활성화 된다는 것은 시민사회 주체들이 할 일이 급격하게 많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시민주도 협치기반' 정책들이 새로운 시민들의 사회참여 통로로서, 민주적 역량 훈련의 기회로서 긍정적인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 주로 '공모사업'이라는 수단에 기반 해 시민들의 참여를 '동원'하는 맥락이 존재한다. 이런 종류의 사업이 많아지고 더 많은 지역으로 확산될수록 '동원' 역시 심화된다. 즉 시민사회라는 저수지에 물을 대는 속도보다, 물을 퍼다 쓰는 속도가 훨씬 빠른 상황에 비유할 수 있다. 

서울은 전국에서 가장 많은 시민사회단체들이 입주해 있지만, 이중 70∼80% 가량은 서울 지역이 아닌 전국적 의제에 관심이 있는 단체들로 서울 지역 시민사회는 생각보다 '허약'하다. 서울 각지에서 오랜 시간 풀뿌리 운동을 통해 어렵게 형성된 활동가나 주민리더들은 각종 중간지원조직이나 관련 일자리들로, 그리고 주민참여형 정책사업에 인입되고, 정작 지역 시민사회는 공동화(空洞化)되고 있다는 호소들이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서울시가 추진하는 다양한 협치기반 정책들의 속도와 규모는 너무 빨리 증가하는데 비해, 지역 시민사회의 성장은 더디기만 하다. 정책에 참여해온 주체들도 처음에 느꼈던 신선함 보다는, 이제 너무 많이 떠맡는 역할에 피로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리고 서울시의 이런 정책 모델들은 우수사례로 평가되며, 다른 지방자치단체들로 확산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다른 지역에서도 서울 지역 시민사회가 지금 겪고 있는,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이런 상황들은 반복될 가능성이 크다.

시민사회라는 저수지의 물을 퍼다 쓰는 단기적인 일보다, 그것의 물을 채우는 장기적인 관점이 요구된다. 현재의 협치기반 정책들이 지속가능하기 위해, 그리고 지역의 정치권력이 바뀌더라도 시민사회의 활발한 참여가 계속되기 위해 늘 그 자리에서 시민들과 상호작용하고 시민들의 사회참여를 북돋우는 지역 시민사회 생태계를 조성하고 그것을 건강하게 할 정책적·사회적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아직 우리는 시민사회에 관해 모르는 것이 더 많다. 동네의 치킨가게, 분식집의 통계는 있어도, 지역 시민사회단체나 모임의 통계는 없다. 시민사회에 관한 무지 위에서, 시민사회의 적극적인 참여가 강조되고, 관련된 정책이 활성화 되고 있다. 이런 흐름은 시민사회는 마르지 않는 저수지일 것이라는 무의식적인 관점에 기대고 있다. 하지만 현실에 있어서 시민사회는 마르지 않는 저수지가 아니다. 
#시민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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