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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우리 모두를 다 죽여라!" 분노한 시민들이 일어났다

[김삼웅의 5·18 광주혈사 / 23회] 일방적으로 당하다시피 해 온 시민들은 공수부대의 폭압에 적극적인 저항으로 맞섰다

등록 2019.10.16 16:36수정 2019.10.16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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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민주화운동 국민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주검을 이토록 잔인하게 다루는 계엄군들이 과연 이 나라를 지키는 군인이었던가? ⓒ 김민수

 
광주항쟁 셋째날인 5월 20일, 전날 밤부터 내리던 비는 이날 오전 9시 경에 그쳤다. 19일 밤늦게까지 시내 도처에서 시위가 벌어지고 공수부대의 잔인한 진압과 살상이 계속되었다.

광주에서 항쟁과 학살이 일어나고 있을 때 전국의 모든 언론이 침묵했다. 언론기관을 장악한 신군부의 보도통제 때문이었다.

국민들은 20세기 후반 국토의 남쪽에서 며칠째 공수부대에 의해 '인간사냥'이 자행되고 있는데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더러는 풍문이나 소문으로 또는 외신으로 어렴풋이 뭔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은 알았으나, 그처럼 잔인한 사태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꿈에도 상상하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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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차량시위 ⓒ 5.18기념재단

 
신군부는 언론의 통제와 함께 사람의 이동도 막았다. 광주로 가는 대중교통 수단을 차단시키고 광주시민들을 외부로 나가지 못하도록 모든 길목을 막았다. 광주는 고도가 되고 생필품의 유통이 막히면서 생활의 혼란까지 가중되었다.

공수부대의 살육전에 치를 떨던 시민들은 이제는 공포감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적극적으로 싸움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시민들의 참여와 투쟁은 학생시위에서 민중항쟁으로 질적인 변화와 동시에 지금까지 보다 훨씬 치열하고 공세적인 국면으로 바뀌었다.

개머리판과 대검을 휘둘러대며 점점 더 포악해지는 공수부대에 맞서 일부 고등학생까지 합세한 시위대는 비가 오는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죽음을 각오한 싸움을 계속했으며, 한걸음 더 나아가 뒤쳐진 공수를 공격하거나 고립된 차량을 포위하기도 했다.

가톨릭센터에서는 경계가 허술한 틈을 이용해 총과 방패를 빼앗았으며, 광주고 앞에서는 시민들에게 포위당한 장갑차에서 최초의 발포가 있었다.

이날 밤(19일 - 필자) 시내 중고등학교에는 휴교령이 내려졌다. 계엄군이 3특전여단으로 교체되고, 20일 오전부터는 시위진압의 양상이 달라진다. (주석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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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민주화 운동 벗들이 신발....80년대 시위현장에서 흔히 보던 광경이다. ⓒ 김민수

 
공수부대의 행태는 날이 갈수록 더욱 포악해졌다.


상부의 지시였을 것이다.

"대검만으로 모자랐던 걸까? 20일 오후부터는 심지어 화염방사기까지 사용하였다. 2시 30분경 공수부대는 화염방사기를 쏘아 여러 명의 시민들이 그 자리에서 타 죽었다." (주석 2)

시민들은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5월 20일 범시민민주투쟁위원회 학생혁명위원회는 〈결전의 순간이 다가왔다〉는 격문을 살포하면서 시민들이 항쟁에 나설 것을 호소했다. 급박한 시기에 제작된 것이어서인지 내용에는 사실과 다른 부분도 적지 않았다.

결전의 순간이 다가왔다

결전의 순간이 다가왔다!

 〈상황보고〉
 ㆍ 사망자 500명, 부상자 3,000명, 연행자 3,000명!
 ㆍ 놈들의 발포가 시작되었다.
 ㆍ 서울, 대구, 마산, 전주, 군산, 이리, 목포도 봉기!
 ㆍ 전주, 이리서는 경찰이 시민에 가담!
 ㆍ 학생혁명군, 상무대에서 무기 탈취에 성공!

 〈행동강령〉
 ㆍ 무기를 제작하라!
 ㆍ (다이너마이트, 화염병, 사제폭탄, 불화살, 불깡통, 각종 기름 준비)
 ㆍ 전시민 관공서를 불태워라!  
 ㆍ 차량을 획득하라! 
 ㆍ 특공대를 조직 군무기를 탈취하라!
 ㆍ 아! 형제여! 싸우다 죽자! (주석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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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모습 ⓒ 5.18기념재단

 
오전 10시 30분경, 전날처럼 금남로에서는 공수부대원들이 시민들을 잡아서 옷을 벗겨 때리고 기합주는 모습이 여러 사람 눈에 목격됐다.

7공수여단 35대대는 한국은행 맞은편 가톨릭센터 앞에 배치됐다.

『동아일보』 김영택(金永澤) 광주주재 기자가 목격한 장면이다.

금남로 3가 가톨릭센터 바로 앞이었다. 희한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30명이 넘는 젊은 남녀가 팬티와 브래지어만 걸친 알몸으로 붙잡혀 기합을 받고 있었다.

4열로 줄지어 선 젊은이들, 기자가 좀 더 가까이 다가가 세어보니 어떤 줄은 7명, 어떤 줄은 6명, 어떤 줄은 8명이었다. 정확하진 않으나 그 가운데 여자는 10여 명쯤으로 짐작되었다. 거의가 20대 젊은 사람이었고 두어 명쯤 30대로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여자들의 신발은 굽 높은 하이힐이 많았다. 10여 명의 공수부대원들이 손에 방망이를 들고 이 무리를 빙 둘러서서 지키는 가운데 하사관인 듯한 군인이 줄 가운데서 구령을 하고 있었다.

"엎드려 뻗쳐, 뒤로 누워, 옆으로 누워, 다섯 번 굴러, 쭈그리고 앉아, 손을 귀에 대고 뛰어, 엎드려 기어, 한발 들고 서" 등 수없는 갖가지 동작을 이들에게 강제로 하게 했다.

만약 이들이 조금이라도 구령을 따라 하지 않거나 동작을 느리게 할 경우 몽둥이가 가차 없이 날아갔다. 특히 여성들의 곤욕스러움은 눈뜨고 볼 수가 없었다. (주석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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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군인 앞에 무플을 꿇어야 하는가. 저들이 폭도인가 아니면 저 군인은 북한군특수부대인가? 둘다 아니다. ⓒ 5.18기념재단

 
5월 20일의 시위 중 두 곳의 상황을 살펴보자.

오후 5시 50분, 충장로 입구 쪽의 시위 군중 5,000여 명은 스크럼을 짜고 도청을 향하여 육탄돌격을 감행했다.

계엄군과 충돌한 후 몰려 나온 시위대는 "살인마 전두환은 물러가라", "군은 38선으로 복귀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연좌농성을 벌였다. 싸움은 갈수록 치열해지고 시민들의 피해는 늘었지만 군경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는 도청은 접근하기가 어려웠다. (주석 5)


오후 3시 금남로의 시위 군중은 수만 명으로 불어났다. 유치원 꼬마 손을 잡고 나온 할머니부터 술집 여종업원, 점원, 학생, 회사원, 가정주부, 인근 음식점의 종업원 등등 모든 계층의 전 시민이 쏟아져 나온 것이다.

경찰이 쏜 최루탄이 터지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잠시 물러났다. 몰려들기를 반복했다.

저마다 들고 나온 각목이나 쇠파이프 등으로는 어쩔 수 없는 터라 시민들은 금남로와 중앙로의 교차로 부근에서 연좌농성을 시작했다.

"차라리 우리 모두를 다 죽여라!"

누군가 외치며 준비해 온 태극기를 펼쳐 흔들었다. (주석 6)


전날까지 일방적으로 당하다시피 해 온 시민들은 공수부대의 폭압에 적극적인 저항으로 맞섰다. 하지만 최첨단 무기로 무장한 계엄군에 대적하기란 불가능하고, 그래서 많은 희생이 따랐다.


주석
1> 『광주5월항쟁전집』, 32쪽.
2> 최정운, 앞의 책, 137쪽.
3> 『5ㆍ18광주민주화운동자료총서』, 23쪽.
4> 김영택, 『5월 18일 광주』, 역사공간, 2010, 황석영 외 앞의 책, 135~136쪽.)
5> 김진경 지음, 정호기 해설, 『5ㆍ18 민중항쟁』, 63쪽,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15.
6> 앞과 같음.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5ㆍ18광주혈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5ㆍ18광주혈사 #5.18광주민주화운동40주년 #금남로 #가톨릭센터 #광주민중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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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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