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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도' 운운하면서 왜곡 일삼은 언론에 대한 분노로 방송사 방화

[김삼웅의 5·18 광주혈사 / 25회] 시민들이 분노한 것은 공수부대 학살범들과 그 배후들 뿐만이 아니었다

등록 2019.10.18 16:38수정 2019.10.18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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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18 기간 중 열흘 동안 나오지 못한 <전남매일신문>은 6월 2일 발행 재개를 앞두고 있었다. 사진은 6월 2일자 <전남매일신문> 대장(최종판 이전 검토·편집을 위해 만든 원장부)이다. 계엄사령부가 검열한 '빨간펜'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이날 실릴 예정이던 김준태 시인의 109행짜리 시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는 33행으로 짤려 인쇄됐다. ⓒ 소중한

시민들이 분노한 것은 공수부대 학살범들과 그 배후들 뿐만이 아니었다.

무고한 국민들이 군인들에 의해 무수히 학살되고 있는데도 이를 보도하지 않는 언론기관에 대해 분노가 표출되었다.
 
지역 신문인 『전남매일신문』 기자들은 5월 20일 사장에게 절필을 선언했다.

 우리는 보았다.
 사람이 개 끌리듯 끌려가 죽어가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러나 신문에는 단 한 줄도 싣지 못했다.
 이에 우리는 부끄러워 붓을 놓는다. (주석 9)


시민들은 방송사로 몰려갔다. 모든 TV방송과 라디오는 사람들이 현장에서 맞아죽고 개처럼 끌려가는 데도 한마디 보도는커녕 연일 군사반란자들의 철면피한 얼굴을 뉴스 속보로 보도하고 각종 예능프로를 내보내고 있었다.

저녁 7시 40분경부터 약 50분가량 도청 앞 금남로에서는 격렬한 충돌 이후의 소강상태가 이어졌다. 시위 군중은 금남로 4가 국민은행 앞까지 밀려갔다. 금남로에서 빠져나온 시위대는 제봉로와 충장로 쪽으로 밀려들었다.

계엄군의 완강한 저지에 정면 공격이 불리하다고 여긴 시민들은 제봉로에 위치한 MBC 방송국으로 향했다.
 
저녁 7시 45분경 MBC를 둘러싼 시위 군중 5천여 명은 저녁 '8시뉴스' 시간에 광주 상황에 대해서 "사실 그대로 지금 밖에서 진행되는 모든 참상을 보도할 것"을 거세게 요구했다.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8시 30분경 방송국 건물에 화염병을 던졌다. MBC 직원들과 31사단 96연대 1대대 소속 경계 병력이 달려들어 소화기로 불을 껐다. 이때는 불이 더 이상 번지지 않았다.
 
같은 시각 광주역 부근에 있는 KBS 방송국도 시위대에 의해 점거되었다. 성난 군중에 의해 방송기자재가 파손되는 바람에 방송이 완전 중단되었다. (주석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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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에도 있고 방글라데시아에도 있는 국가폭력에 의한 피해 치료센터가 유엔 인권이사국인 한국엔 없는 실정이다. 다행스럽게도 광주광역시가 한국에선 처음으로 국가폭력에 의한 피해자들을 치료하는 '5.18트라우마 센터'를 오는 6월 개원할 예정이다. ⓒ 5.18

 
광주참사의 원흉이 전두환ㆍ정호용 등 신군부 핵심이라면 하수인들은 물론 공수부대와 경찰이고, 공범들은 언론(인)이었다.

시민들에게 참혹한 구타와 총검에 의한 난자질에도 한국의 언론은 침묵하거나 외면했다. 그리고 군부 반란자들이 나눠준 보도자료를 앵무새처럼 지껄이거나 한술 더 떠서 '폭도' 운운하면서 왜곡을 일삼았다.
 
20일에 시민ㆍ학생들이 다소 과격해진 것은 전날 추가로 투입된 군인들의 잔인성을 직접 겪었거나 구전으로 널리 알려진 때문이었다. 이떄의 상황이다.

1. 11여단의 증강으로 공수대원들의 활동범위는 시내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그들은 시장, 상가, 주변빌딩, 주택가 등으로 무차별 난입하여 기물을 부수고 시위관련 여부에 상관없이 거의 모든 시민을 공격대상으로 삼았다.

2. 이러한 공수대원들의 만행에 자극되어 이날 오후부터는 젊은층을 중심으로 학생 이외의 일반 시민들이 항의시위에 가세하기 시작했다. 일방적이었던 18일과는 달리 19일 상황은 시간이 지날수록 양자간의 대결이 점차 치열해졌고 시위대열의 주변으로는 많은 시민들이 몰려들었다. 그리고 이 때문에 이들 시민 역시 공수대원들에 의해 많은 피해를 당하였다.

3. 시위는 밤이 늦도록 계속되었고 공수대원들은 진압봉뿐만 아니라 대검사용을 상용화하여 자상 피해자들이 대폭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공수대원들은 부분적으로 총격까지 서슴지 않았다.

4. 공수대원들은 마치 시위 가능성을 뿌리채 제거하기 위해서인 듯 주변 주택 가까이 돌아다니며 젊은 사람들을 무조건 구타, 연행해갔다. 특히 어두워지면서 시내 각 지역에 배치된 공수대원들의 일반 시민들에 대한 만행이 극심해지고 있었다.

5. 사상자의 숫자가 대폭 확대되었다. (주석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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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민주화운동기록관일 9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상영회를 통해 공개한 5·18영상기록물. 1980년 5월27일 계엄군의 도청 진압 이후 수습되지 않은 시신들이 찍힌 장면이다. ⓒ 광주드림

 
특히 시민들을 분기시킨 것은 시외버스 공용터미널과 무등경기장 근처에 쌓인 시체들이었다. 공수대원들이 시민들을 무차별 학살하여 이곳에 갖다 버린 것이다.

시외버스공용터미널 주차장에는 7, 8구의 시체가 차곡차곡 쌓여 있었고, 무등경기장 스탠드 아래쪽에는 10여 구의 시체가 즐비하게 늘어져 있었다. 공수대원의 대검에 찔리거나 몽둥이에 맞아 죽은 사람들이었다.
 
특히 시외버스공용터미널 주차장의 시체는 시외버스공용터미널 로터리 광장에서 시위하던 군중들로서 차량으로 수송된 공수대원들에 의해 희생된 사람들이었다. 이 같은 시체들은 "공수대원들이 부녀자나 노인들에게까지 무차별 난타해서 많은 사람을 죽였다", "머리통을 때려 즉사시켰다", "임산부를 죽였다"는 풍문들을 사실로 입증할 수 있는 증거물이 된 셈이다. (주석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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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당시 시위대가 차량을 타고 이동하는 모습. “시민이여 일어서자”라는 문구의 현수막이 차량 앞에 걸려있다. ⓒ 광주드림

 
날이 어두워져도 시위는 계속되었다.

저녁 18시경 광주공원에서는 시민ㆍ학생 수천 명이 집결하여 "전두환 타도"를 외치고, 17시 40분경 광주고속터미널 앞에서 1천여 명이 시위를 하고, 20시경에는 금남로 2가에서 시민과 군인들 사이에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주석
9> 앞의 책, 205쪽.
10> 황석영 외, 앞의 책,  153~154쪽.
11> 정상용 외, 앞의 책, 203쪽.
12> 『광주5월항쟁전집』, 37쪽.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5ㆍ18광주혈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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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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