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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없는 현장, 시민들이 유인물 제작

[김삼웅의 5·18 광주혈사 / 26회] 시위군중은 더이상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등록 2019.10.19 15:37수정 2019.10.19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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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확 전두환은 물러가라"는 캐치프레이즈는 전국 모든 대학교의 요구사항이었다. 5.18 광주항쟁이 일어나기 직전 대학교수가 앞서고 대학생들이 뒤따르는 평화시위 모습이다 ⓒ 5.18재단

시위군중은 더 이상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이날 20시경 시위대 100여 명이 역전파출소를 점거했다 퇴각하고, 이어서 수문동파출소의 기물을 파손했다. 비슷한 시각 임동파출소와 양동 파출소, 광주역전파출소 등이 파손되었다.

공수부대의 야만성은 이날도 멈추지 않았다.

시외버스공용터미널 앞에도 공수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시외버스공용터미널 앞 지하도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나는 공수들의 동태를 보고 있었다. 바로 그때 지하도로 도망가는 여학생을 보고 공수 한 명이 쫓아가는 것이 보였다. 공수는 여학생을 끌고 지하도 위로 올라온 뒤 곤봉을 사정없이 휘둘렀다.

여학생은 미친 듯이 소리쳤지만 공수는 더욱 악랄하게 굴었다. 대검을 들고 여학생의 옷을 갈기갈기 찢었다. 순식간에 옷은 모두 찢어져 흘러내렸고 팬티만 입혀져 있었다. 여학생의 몸 이곳저곳이 대검에 긁혀 피투성이가 되었다. 공수는 여학생의 가슴에 대검을 들이대고 '찔러 죽여 버려야 해 너는 간첩이야!' 하며 고함을 질렀다.

그 여학생은 머리가 어깨까지 내려와 있었는데 공수는 한 손으로 여학생의 머리를 잡아 뒤로 젖혔다. 여학생은 반항도 못 하고 내팽개쳐졌다. 이 광경을 본 나는 온 몸이 부르르 떨려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세상에…세상에' 할 말을 잃고 서 있는 나에게까지 공수들이 쫓아왔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뛰어 전남대 정문까지 도망갔다. (구술 : 김연태) (주석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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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당시 계엄군에 봉쇄된 광주-송정리 간 도로. ⓒ 5.18기념재단 자료사진

 
박정희 정권기에 광주ㆍ전남의 민주화운동은 치열했다.

홍남순 변호사를 중심으로 하는 재야그룹과 조아라 YWCA 명예회장ㆍ윤한봉 그룹의 종교단체와 사회단체그룹, 엠네스티 중심의 교사그룹, 장두석ㆍ황일봉 등 양서조합, 김민기 등 노래운동팀, 야학운동팀, 노동자 그룹 등 다양한 모임의 형태로 전개되었다.


이들은 대부분 5ㆍ17 계엄확대 조치와 동시에 체포되거나, 간신히 구속을 면한 이들은 피신하여, 5ㆍ18항쟁 초기에는 시위를 이끌 리더그룹이 존재하지 않았다. 광주학생들이 궐기하고 시민들이 일어서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홍남순과 윤한봉이 20일 각각 광주로 돌아오면서 지도부가 차츰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78년 전남대 우리의 교육지표 사건으로 투옥됐다 80년에 다시 복적한 전남대 김윤기ㆍ김선출과 김태종 등은 같은 고교 동기생들로 문화패 광대 활동을 했던 경험으로 문화선전대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자는 데 의견일치를 본다.

이들은 시민들에게 우선 진실을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서 18일 오후 전남대 탈춤반인 전용화와 합류해 유인물 등사에 필요한 가리방, 등사기를 갖춰 곧바로 유인물 작성ㆍ배포작업에 들어간다.

이들은 16절지 5백여 장의 유인물을 만들어 변두리지역인 산수동, 계림동 일대에 뿌린다. 내용은 "전두환의 마각이 드러나기 시작했으니 광주시민은 총궐기하자"는 것이다. 김선출(당시 전남대 복학생)의 증언에 따르면 "우리는 2개조로 나눠 공용터미널, 증훙동 부근과 산수동, 계림 등 일대에 유인물을 만들어 뿌렸다"고 회고한다. (주석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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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당시 정규 언론들은 광주 시민들을‘폭도'로 매도했다. 신군부의 삼엄한 검열 하에 어느 언론에서도 진실을 접할 수 없었다. ⓒ 5.18 기록관

 
제도언론이 통제되고 타락하여 제 구실을 하지 못함으로써 시민들이 직접 나서 격문과 호소문 등 유인물을 제작하고 살포했다. 지극히 초보적인 행태이지만, 그런 방법 밖에 달리 길이 없었다.

이들 문화선전 유인물팀은 18일 밤 통금이 앞당겨진다는 보도를 듣고 지원동 배고픈다리 근처에 있는 후배 집으로 들어가 19일 아침까지, 또 20일 오전까지 계속해서 유인물을 작성해 학동, 방림동, 서동, 양림동 등에 살포한다.

이들은 이후 광천동 등불야학 팀과 합류해 5ㆍ18 민중항쟁 당시 유일한 언론매체인 『투사회보』 홍보팀이 된다. 5ㆍ18 항쟁기간 중 문화패 광대와 들불야학팀은 가두방송선전과 대자보 부착, 궐기대회 등을 주도적으로 전개, 광범위한 문화선전활동을 벌이게 된다. (주석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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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항쟁 기간중 유일하게 진실한 언론 역할을 했던 <투사회보> ⓒ 5.18 기록관

 
광주항쟁의 리더그룹이라 부르기는 아직 이르지만 벽보와 유인물 제작팀이 생기면서 항쟁은 차츰 자체 홍보 역량을 갖게 되었다.

5월 27일 전남도청에서 공수특공대원들의 집중사격으로 숨진 윤상원은 19일 오전부터 '들불야학'의 정재호ㆍ서대석 등과 전단작업에 들어가 밤새워 제작한 〈선언문〉을 다음날 시위 현장에 살포했다. 뒤에서 소개할 『투사회보』 등도 제작하였다.

이같이 서서히 태동하기 시작한 유인물 홍보팀을 겸한 지도부는 21일을 전후로 강력한 지도부를 형성하는 기초가 된다.

이들이 18일 저녁부터 제작ㆍ발간ㆍ배포하기 시작한 유인물들은 재야민주화운동 지도부의 태반이 예비 검속되고 지하로 잠적해 버린 상황에서 자연발생적으로 터져나온 청년ㆍ학생들의 시위를 조직적으로 지도해 나가기 위한 몸부림의 한 표현이다.

또 이들은 이 유인물에서 학생운동의 지도부였던 당시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이 예비검속되지 않고 건재하고 있다는 것과 재야세력 지도부가 계속 존재한다는 것을 시민들에게 인식시키려고 노력한다. (주석 16)

 

광주 양동 시장 상인들이 시민군들을 위한 밥을 짓고 있다.양동시장은 5·18 민중항쟁 사적 제19호로 지정되어 사적비가 세워져 있다. ⓒ 5.18 기념재단

 
앞장에서 소개한 〈호소문〉과 〈민주시민아 일어나라〉는 등의 유인물은 이렇게 하여 제작되었다.
 
"당시 유인물 팀으로 활동했던 김윤기는 '당시 유인물 발행단체는 실제로 존재했던 전남민주청년협의회나 현대문화연구소. 양서조합, 카톨릭청년회 등의 이름을 넣지 않고, 유인물을 제작하는 팀들 임의대로 이름을 지어 붙였다'며 '책임 소재 추궁과 출처 추적을 방지하기 위해 여러 팀은 각기 임의대로 이름을 붙여 제작ㆍ배포했다'고 증언한다." (주석 17)


주석
13> 앞의 책, 42쪽.
14> 『정사 5ㆍ18』, 184~185쪽.
15> 앞의 책, 185쪽.
16> 앞과 같음.
17> 앞과 같음.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5ㆍ18광주혈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5ㆍ18광주혈사 #5.18광주민주화운동40주년 #윤상원 #투사회보 #광주민중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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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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