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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에 세워진 김일성 초등학교... 세 나라의 흥미로운 인연

[현장] 한국학 교수 출신 초머 모세 주한 헝가리 대사가 전하는 남북한-헝가리 교류사

등록 2019.10.15 19:03수정 2019.10.15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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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머 모세(41) 주한 헝가리대사가 14일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헝가리 아카이브 자료를 통해 본 한국전쟁'이라는 주제로 특별강연을 하고 있다. ⓒ 신상미

 
중부유럽에 위치한 헝가리는 한국에 널리 알려져 있고 익숙한 이름이지만 정작 헝가리에 대해 깊이있게 아는 한국인은 많지 않다. 김춘수 시인의 시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1959)이 알려져 있고, 부다페스트를 배경으로 한 영화 <글루미 선데이>와 그 주제곡이 유명할 뿐이다.

최근 영화 <밀정> 덕분에 푸른 눈의 의열단원 '마자르'가 널리 알려졌다. 반면 헝가리 젊은이들에겐 케이팝과 한국 드라마의 인기가 높다고 한다. 헝가리는 조상인 마자르인들이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이주한 아시아계이기 때문에 신화와 전통문화에서 우리 문화와 많은 친연성을 갖고 있다. 

올해 한-헝 수교 30주년을 맞은 가운데 초머 모세(Csoma Mózes·41) 주한 헝가리대사의 특별강연이 서울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열렸다. 초머가 성, 모세가 이름으로 한국식과 같다. 그는 놀랍게도 헝가리의 한국학자 출신이다. 헝가리 최초로 외트뵈시 로란드 대학(ELTE)에 한국학과를 설치했고 교수로 임용됐다. 부인도 한국인이다.

연세대에서 3차례 어학연수를 한 덕분에 한국어도 유창하다. 그는 지난해 10월 초 주한대사로 부임했다. '남북한 겸임' 대사인 그는 올해 4월 4일 평양에서도 김영남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에게 신임장을 제출해 정식 대사가 됐다. 

지난 14일 역사박물관이 주최한 제2회 해외학자 특강 '헝가리 아카이브 자료를 통해 본 한국전쟁'으로 서울시민을 만난 초머 대사는 헝가리 신문과 공문서 보관소에서 찾은 외교문서 등을 바탕으로 남북한을 아우르는 한반도와 헝가리의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인연을 소개했다.

한국 대통령이 최초로 방문한 사회주의 국가가 헝가리다. 한국과 헝가리가 1989년 정식수교를 맺으면서였다. 이는 공산주의 종주국인 소련보다 1년 앞섰고, 우리나라가 공산 국가와 최초로 맺은 수교였다. 하지만 헝가리가 남한과의 수교 전엔 같은 공산 국가인 북한과 교류가 더 많았기 때문에 헝가리-북한 교류사의 알려지지 않은 뒷얘기들을 먼저 풀어냈다.

'헝가리 혁명' 발발... 다시 북한으로 돌아간 유학생들
   

2019년 7월 9일 초머 모세 Ph.D. 대사가 단국대학교에 개설된 헝가리연구소의 현준원 교수와 장두식 교수를 대사관저로 초청해 자리를 함께했다. ⓒ 주한 헝가리대사관

 
이날 6.25 당시 헝가리로 건너간 북한 고아들과 유학생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언급됐다. 초머 대사는 "1950년대에 헝가리로 유학 간 북한인이 1천여 명이었다"면서 "1956년에 헝가리에서 반소 혁명이 일어나자 (그 파급력이) 한반도까지 연결됐다"고 말했다.


헝가리혁명은 1956년 10월 23일 소련에 대항한 반소혁명으로 전개됐다가 13일 만에 실패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유학생 가운데 6.25 참전 경험을 가진 사람이 많았다. 한 학생은 헝가리 혁명이 일어나자 학과 친구들에게 기관총을 비롯한 무기 사용법을 가르쳤다. 이렇듯 북한 유학생들이 혁명을 도운 구술기록이 헝가리 현지에 많이 남아 있다.

하지만 소련으로 기울어진 북한은 혁명이 일어나자마자 유학생들을 모두 소환해버렸다. 그 가운데 4명은 서유럽으로 탈출했다. 이중 한 명이 한국으로 건너와 이승만 당시 대통령을 만났다.  

초머 대사는 "이 학생은 헝가리 혁명에 참여했고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으로 한국에 왔다"면서 "당시는 여의도에 공항이 있었는데 거기서 환영 인파에게 환영받는 모습이 사진으로 남아있다. 그는 이 대통령과 자주 만났고 반소 혁명의 내용을 직접 전달했다. 이후 이 학생은 미국으로 건너가 유명해졌다"고 밝혔다. 

그에 따르면 이승만 대통령은 헝가리혁명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는 과연 이런 혁명이 북한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지 점쳐보며 사비로 1만 달러를 헝가리에 후원했다. 이때 국민들이 모은 성금을 대한적십자사를 통해 헝가리에 보내기도 했다. 

당시 한 초등학생이 유엔 사무총장에게 헝가리혁명에 유엔이 개입해야 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썼다. 그가 바로 반기문 전 사무총장이었다. 지난 2006년 헝가리혁명 50주년을 맞아 헝가리정부는 반 전 총장에게 십자훈장을 수여했다. 대학생 신분으로 '헝가리 자유수호 학도의용군'이라는 조직을 만들었던 이만섭 전 국회의장과 유재건 전 열린우리당 의원도 함께 훈장을 받았다. 초머 대사는 "헝가리는 지지운동했던 사람들을 잊지 않고 모두 훈장을 줬다"고 전했다. 

한편 북한으로 돌아간 유학생들은 그 뒤 어떻게 살았을까. 남한의 미국 유학생들이 지도자급으로 성장한 데 반해 소련을 비롯해 동유럽으로 보내진 북한 유학생들은 지방으로 배치돼 평생 감시 속에 살았다. 이것은 외부 정보를 고도로 통제하는 북한사회에선 놀라운 일이 아니다. 

"당시 국제결혼을 한 유학생들이 강제 이혼을 당하는 등 슬픈 일이 많았다. 헝가리 정부는 북한 유학생들과 연락하고자 궁리하다가 공식적으로 '문화친선교류협회'를 만들어 이 단체를 통해 이북으로 책들을 보내려고 했다. 한데 북한이 유학생들이 그 책을 못 보게 했다.

이들은 반소 혁명을 경험했으므로 북한당국은 이 경험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멀리 떨어져 있는 지방으로 보냈다. 그래서 유학생 출신들은 북한 사회에서 큰 역할이 없었다. 미국으로 간 한국 유학생들과는 전혀 다르고 비교할 수 없다." 


다만 그는 "1~2명이 높은 지위로 올라갔고 1980년대 말 헝가리와 북한이 다시 밀착했을 때 헝가리에서 지냈던 전쟁 고아 출신들이 이때 헝가리와 접촉한 예가 있다"고 덧붙였다. 

6.25 당시 헝가리는 사회주의 우방국으로서 황해도 사리원에 병원을 세우고, 전쟁고아를 받아들였다. 고아 및 유학생들의 체류 비용은 모두 헝가리가 부담했고, 북한은 한푼도 내지 않았다. 유학생과 고아들을 받아들인 여타 동유럽 우방국들도 마찬가지였다. 전쟁고아들을 위해 헝가리는 수도 부다페스트에 '김일성 초등학교'를 세웠다. 이때 북한 학생을 가르친 교사가 쇠베니 얼러다르(1914~1980)였다. 

헝가리에 소개된 북한 문화
 

쇠베니 얼러다르가 편찬한 최초의 헝한사전. <조선말 큰사전>이 완간된 1957년에 나왔다. 초머 모세 주한대사가 지난 3월 한글박물관에 기증했다. ⓒ 국립한글박물관

 
북한 학생들과의 만남은 그를 한국학의 세계로 빠져들게 만들었다. 그의 노력으로 1957년에 최초의 헝한사전인 <웽조사전>이 출판됐다. 사전 명칭은 러시아어로 헝가리를 뜻하는 웽그리아(Vengrija)와 조선의 앞글자를 따서 지었다. 

1950년대에 헝가리엔 북한 문화가 활발히 소개됐다. 초머 대사는 "헝가리인, 북한인, 소련인이 쓴 한민족 소개서였다"고 설명했다. 사학자 리청원이 쓴 <조선근현대사>, 시인 설정식의 시집 <우정의 서사시> 등이 예다. 

설정식은 1952년 개성에서 열린 정전협정에서 통역관으로 일하다가 헝가리에서 온 종군기자 티보 머라이를 만난 것이 인연이 돼 헝가리에서 시집을 출간했다. 머라이는 1년 뒤인 1953년 반당분자의 재판을 취재하러 오라는 북한당국의 요청을 받는다. 재판정에 간 그는 친구 설정식이 사형을 언도받는 것을 목격했다. 박헌영 부수상 숙청 때 함께 숙청된 것이다. 

이 일은 헝가리 일간지에 크게 보도됐다. 머라이는 2005년 서울에서 열린 문학포럼에 참가했다가 설정식의 자녀들과 해후했다. 초머 대사는 "임화나 설정식의 작품은 헝가리에 소개가 돼 있었다. 그때 하루아침에 미제 스파이로 숙청당하는 모습을 보고 헝가리 지식인들이 충격을 받았다"면서 "이렇게 소련식으로 사회주의를 하면 안 되고, 우리는 다른 식으로 해야 한다면서 혁명이 일어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날 1989년 2월 1일 한국과 헝가리가 수교를 맺자, 북한이 크게 반발했다는 뒷얘기도 나왔다. 

"당시 북한이 화가 많이 나서 서울에 있는 헝가리대사관을 폭파하겠다고 위협했다. 같은 사회주의 국가인데 이런 식으로 위협하니까 과연 북한이 어디까지 갈 것인지 헝가리 정부가 너무 걱정이 돼 소련에 의견을 구했다. 이에 소련이 '별로 신경 안 써도 된다. 북한의 말투 스타일은 이런 거다. 너무 걱정 안해도 된다'고 답했다. 그해 11월에 노태우 대통령이 헝가리를 방문했다."    

'마자르'는 누구일까?
  

헝가리가 설립한 김일성초등학교에서 북한 전쟁 고아들을 가르치고 있는 쇠베니 얼러다르. ⓒ 노스보스

 
한편 이날 영화 <밀정>의 제작 관계자는 영화에 나온 헝가리인 폭탄 제조 기술자를 조명했다. 이에 초머 대사는 "지난 3월에 주한 헝가리대사관과 단국대 헝가리연구소 공동 주최 세미나에서 교수들과 이 주제를 깊이있게 다뤘다"면서 "마자르라는 이름은 헝가리인이라는 뜻이지만, 헝가리엔 이 성을 가진 사람이 많다. 다른 기록에선 '마짤'이라고도 남아 있다"고 밝혔다. 

그는 "실제 이름이 '마짤 마자르'일 수도 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러시아 연해주 근처에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군대의 전쟁 포로가 많았다"면서 "군대에 속한 폭탄 제조 전문가가 아니었을까 추측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의열단의 폭탄 제조를 도운 마자르는 김산·님 웨일즈의 <아리랑>엔 독일인 마르틴으로, 박태원의 <약산과 의열단>엔 헝가리인 마자알 등으로 기록돼 있다. 현재까지 그의 신상은 알려진 바가 없고, 독립운동의 공로로 훈장을 받은 다른 외국인들처럼 유족이 확인되지도 않았다.
#초머 모세 #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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