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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벌쭉 웃는 굴뚝에 담긴 부잣집 양반의 깊은 뜻

[오래된 마을 옛집굴뚝40] 경북 안동④ 안동 하회마을 옛집 굴뚝(1)

등록 2019.10.19 11:48수정 2019.10.19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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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앞마을은 쟁쟁하고 하회마을은 청청하다'라 했다. 유래야 어떻든 오래전부터 전해오는 말이지만 지금도 이 말은 유효하다. 타원형 하회마을을 휘돌아 가는 강물이 청청하고 마을을 에두른 산이 청청하다. 마을 돌혈(突穴)에 우뚝 선 600년 묵은 삼신당 느티나무가 싱싱하고 푸르다. 무엇보다 600여 년 전통을 지켜온 마을사람들 정신이 청청하다.
  

하회마을 전경 돌혈에 심어진 삼신당 느티나무를 꼭짓점으로 안쪽에 주로 기와집이, 바깥쪽에 초가집이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 있다. 초가집은 마을 여기저기 흩어져 있으나 주로 남촌댁과 북촌댁 아래에 몰려있다. ⓒ 김정봉

 
하회의 공간은 살림공간으로 살림집과 학습과 휴식, 의식공간으로 서원, 정자, 정사로 크게 나뉜다. 다행히 선조 가운데 하회구곡(河回九曲)을 조성해 놓은 인물이 있어 서원, 정자, 정사는 하회구곡을 따라가면서 둘러보기로 하고 먼저 살림공간에 들어가 보겠다.

3년 적선(積善) 끝에 얻은 하회마을


태극형, 연화부수형, 행주형 등 명당터에 붙는 온갖 수식어를 달고 있는 하회의 옛 주인은 김해허씨와 광주안씨였다. "허씨 터전에 안씨 문전에 류씨 배판"이라는 말은 이런 근거에서 나온 말이다. 허씨가 처음 개척하고 뒤이어 안씨가 들어와 마을을 이루고 풍산류씨가 이 터전에 잔치를 벌일 만큼 자손이 번성하여 일가를 이루었다는 말이다.

풍산류씨는 풍산 상리에 대대로 살아오다가 600여 년 전, 전서 류종혜가 들어와 터를 잡았다. 입향(入鄕) 과정을 그린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류종혜가 입향하기 전, 마을 고갯길에 원두막을 짓고 3년간 마을사람들과 나그네들, 만인에게 적선을 하였다는 만인적선, 활만인(活萬人) 이야기다. 풍산류씨가 이미 살고 있던 허씨와 안씨들에게 적선을 행함으로써 마침내 그들의 동의를 얻고 마찰 없이 하회에 터전을 이루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양진당 외관 솟을대문, 팔작지붕 사랑채와 연이어 펼쳐진 안채를 보고 있노라면 흠모하지 않을 수 없다. ⓒ 김정봉

 
류종혜가 하회에 터전을 마련한 뒤, 조선 중기 류종혜의 5대손 입암 류중영(1515-1573)에 이어 아들, 겸암 류운룡(1539-1601)과 서애 류성룡(1542-1607)에 이르러 중흥기를 맞았다. 그 후 허씨와 안씨는 점차 마을을 떠나 마을의 중심은 하회류씨로 완전히 옮겨오게 되었다.

견칫돌쌓기 방식이 충효당에?

대종택 양진당은 류종혜가 터를 잡고 겸암이 지은 조선전기 고택이다. 양진당(養眞堂) 당호는 겸암의 6대손 류영(1687-1761)의 아호에서 나온 것이다. 사랑채에 석봉 한호의 글씨, '입암고택(立巖古宅)'의 편액이 달려 있다. 기분을 좋게 하는 집이다. 사랑채와 서쪽 안채외벽 막돌 기단은 오래된 것에서만 느낄 수 있는 푸석한 질감이 있다.
  

양진당 사랑채 높은 기단 위에 ‘一‘ 자형으로 들어서 있다. 한호의 글씨 ’입암고택‘ 편액을 달고 있다. 사랑채와 서쪽안채 외벽의 막돌기단과 돌계단은 어리숙하여 기분을 좋게 한다. ⓒ 김정봉

 
건넛집은 충효당(忠孝堂)이다. 류성룡의 종갓집으로 손자인 졸재 류원지(1598-1674)가 안채를 짓고 증손자 눌재 류의하(1616-1698)가 사랑채를 지어 집을 넓혔다. 12칸 긴 행랑채는 서애의 8세손 류상조가 지었다.

둔하고 어리석다는 졸재(拙齋)와 눌재(訥齋)의 호와는 달리 양진당 막돌의 어리숙함이나 수수함은 없다. 잘 다듬은 사랑채 사괴석 기단이나 대청마루로 올라가는 장대석 계단, 궁궐의 회랑처럼 긴 행랑채 때문에 엄숙하고 절도를 요하는 집처럼 보인다.
  

충효당 사랑채 장대석으로 계단을 놓고 잘 다듬은 사괴석으로 기단 맨 위를 장식하여 격이 높아 보인다. 대청마루에 미수의 글씨, ‘충효당’이 걸려있다. ⓒ 김정봉

 
결정적으로 안채와 사랑채의 견칫돌(犬齒石) 쌓기로 쌓은 기단은 눈을 불편하게 한다. 마름모꼴로 쌓는 견칫돌쌓기(왜식돌쌓기)는 일제강점기에 유입된 것으로 알고 있다. 일제강점기 이전의 석축이 견칫돌쌓기로 되어 있는 경우는 잘못된 개보수일 가능성이 높다. 전문가의 조사와 조치가 필요해 보인다.
  

견칫돌쌓기로 쌓은 기단 새로 만든 붉은 벽돌 굴뚝은 눈을 홀리고 견칫돌쌓기로 쌓은 기단은 눈에 거슬린다. ⓒ 김정봉

 
사랑채 현판은 충효당이다. 미수 허목의 글씨다. 서애의 유언을 전하는 듯 서릿발 힘이 있다. 서애의 충효의 뜻이 서애 후손들에 의해 살아났다. 서애의 10세손 류도발(1832-1910)은 나라를 빼앗기자 단식 순국하였고 그의 아들 류신영(1853-1919)은 고종 장례일에 음독 자결하였다. 이를 두고 세상사람들은 "아버지는 나라를 위해 충에 순사하고 자식은 충효에 순사하였으니 참으로 충효가세(忠孝家世)다"라 했다.


류도발, 류신영을 포함하여 하회에는 독립유공자로 포상된 인물이 10명이나 된다. 만송정 솔밭에 모여 만세를 부른 류점등, 독립자금모집에 힘쓴 류창우, 의열단에 가입하여 무장항일투쟁을 벌인 류병하, 조선공산당재건운동을 벌인 류택하가 있다. 그리고 류소우와 아들 류시보, 조카 류시훈과 류시승은 안동농림학교 조선회복연구단에서 활동하였다.

두 부잣집, 남촌댁과 북촌댁

하회의 지세를 두고 솥을 뒤집어 놓은 형세라 했다. 가운데 불룩한 부분이 돌혈로 거기에 600년 묵은 삼신당 느티나무가 자라고 있다. 이 나무를 중심으로 옛집들이 솥 위 적당한 곳 찾아 동심원을 그리며 빙빙 돌아 맺혔다. 동쪽에 하동고택이, 서쪽끄트머리에 작천고택이 동서 균형을 맞췄고 마을서쪽 깊숙이 두 종갓댁 양진당과 충효당이, 충효당 뒤에 주일재가 중심을 잡았다.
  

삼신당 느티나무 마을 가운데 돌혈에 심어진 600년 묵은 느티나무로 마을사람들이 성스럽게 여기는 나무다. ⓒ 김정봉

 
솥이 뒤집어지지 않게 남쪽 웃하회에 남촌댁(염행당)과 아랫하회에 북촌댁(화경당)이 남북균형을 잡았다. 모두 부잣집이다. 생산을 담당하는 초가집이 두 부잣집 아래에 몰려 있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18세기 이후 허씨와 안씨사람들이 점차 하회를 떠나고 하회마을의 진정한 주인이 풍산류씨가 되면서 지은 집들이다.

남촌댁은 1797년 류치목이 짓고 1905년 류영우가 크게 확장하였다. 1954년 불에 타 문간채와 별당, 사당만 남았다가 최근 재건하였다. 경쟁을 하듯 같은 해 3000석 부잣집 북촌댁이 들어섰다. 1797년 류사춘이 사랑채와 대문채를 짓고 후에 1862년 증손자 류도성이 안채, 큰사랑채와 사당을 지었다.
  

남촌댁 고샅 솟을대문집이 남촌댁이다. 길 하나로 생산과 소유의 계층이 분리되었다. 초가집이든 기와집이든 하회의 마을담은 판담이다. ⓒ 김정봉

   

북촌댁 고샅 고샅 끝 솟을대문집이 북촌댁이다. 대문채 외벽은 줄무늬화방벽으로 이 하나만으로 부티가 난다. 마을담은 판담이 대세이나 새로 짓는 경우 흙돌담으로 짓기도 한다. ⓒ 김정봉

 
솟을대문에 줄무늬 화방벽, 북촌유거, 화경당과 수신와, 사랑채만 세 개다. 웅장한 'ㅁ' 자 안채, 반듯한 사괴석 기단 등 한눈에 보아도 부잣집 티가 난다. 그러나 낮은 소작료로 소작인들에게 부담을 덜어주고 홍수 때는 사재를 털어 이웃을 도와 200여년 적선지가를 자랑한다.

종갓집 굴뚝과 부잣집 굴뚝

양진당 서쪽 막돌 기단에 시커멓게 그을린 구멍이 있다. 기단굴뚝이다. 활만인 전설은 양진당 낮은 굴뚝에서 새록새록 피어올랐다. 만인에게 적선을 베푼 선조 류종혜의 선심을 헤아린 듯 굴뚝연기도 밖으로 나가지 않게 조심스러워한 것이다.
  

양진당 굴뚝 기단에 구멍을 내서 만든 원시굴뚝이다. 순박하게 미소 짓고 있다. ⓒ 김정봉

   

충효당 굴뚝 양진당 기단굴뚝처럼 기단에 구멍을 낸 기단굴뚝이다. 해맑게 웃고 있는 모양이다. 사랑채 뒤뜰 두 기의 붉은 벽돌 굴뚝에 홀려 그냥 지나치기 쉽다. ⓒ 김정봉

 
겸암의 동생집, 충효당도 같은 생각이었다. 사랑채 뒤뜰 기단에 입을 헤 벌리고 있는 기단굴뚝으로 형님 겸암의 뜻을 받았다. 사랑채와 안채 뒤뜰에 키가 큰 붉은 벽돌 굴뚝이 있으나 이는 만든 지 얼마 안 되는 것들이다.

남촌댁, 북촌댁 부잣집은 굴뚝을 크게 지어 위세를 과시했다. 북촌댁의 북촌유거 굴뚝은 큰 집채에 걸맞게 크게 만들었다. 하회를 휘도는 강을 빼닮은 굽은 '하회송'과 하늘높이 솟은 곧은 굴뚝이 이 집안의 품격을 높이는 듯하다.

남촌댁 굴뚝은 예전에 빈터에 굴뚝만 남아 유난히 눈에 띄었다. 군데군데 손상은 되었지만 우람한 굴뚝이었다. 사랑채와 안채의 구들연기를 이 굴뚝 하나로 뺐다고 하니 굴뚝 크기만으로도 집 규모를 어림잡을 수 있다. 현재 새 단장한 굴뚝은 검은 벽돌로 새로 만든 굴뚝으로 예전 모습은 사라졌다.
 

남촌댁 굴뚝 불타 없어진 사랑채와 안채를 다시 지으며 굴뚝도 있던 것을 허물고 다시 만들었다. 사랑채와 안채의 구들연기가 이 굴뚝하나로 빠져나가도록 크게 만든 점은 같으나 벽돌을 붉은 벽돌에서 검정벽돌로 바꾸었다. ⓒ 김정봉

   

북촌댁 북촌유거 굴뚝 굽은 소나무, 하회송과 곧게 뻗은 굴뚝은 이집의 격을 높였다. ⓒ 김정봉

 
흔히 가지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배려는 낮은 굴뚝으로 표현된다. 밥 짓는 연기가 담을 넘지 않게 하는 것이 배고픈 이에 대한 배려라 생각한 것이다. 생산을 담당하는 백성을 코앞에 두고 두 부잣집 키 큰 굴뚝은 나에게 아쉬움으로 남았다. 200여년 유지한 적선지가의 면모에 어울리는 북촌댁 굴뚝은 고고하고 '폼나는' 키다리 굴뚝보다는 키 작은 굴뚝이 아닐지 생각해본다.
#하회마을 #굴뚝 #양진당 #충효당 #양진당굴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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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不自美 因人而彰(미불자미 인인이창), 아름다움은 절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인하여 드러난다. 무정한 산수, 사람을 만나 정을 품는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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