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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트에서 산 시든 대파, 뿌리째 심었더니

[옥상집 일기] 생명의 경이로움에 감동하는 일상... 왜 모르고 살았을까

등록 2019.10.19 11:49수정 2020.02.18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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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첫째 주에 옥상집으로 이사했다. 비록 얼마 지나진 않았지만 40년 넘는 아파트 생활에서 얻지 못한 경험을 맛보고 있다. 그 이야기를 남기고 싶어졌다. [편집자말]
[이전 기사] 쓰레기에 대처하는 빌라와 아파트의 차이

우리 가족은 마당 있는 집에서 살고 싶었습니다. 저는 열 살 무렵까지, 아내는 결혼 전까지 마당 있는 집에서 살았습니다. 이후로 전 40년 넘게, 아내는 30년 가까이 아파트에서 지낸 거죠.


분당 아파트는 살기 편했습니다. 학교는 가까이에, 학원은 다양하게 있어서 아이 키우기 무척 좋은 환경이었죠. 백화점이나 대형마트도 멀지 않은 곳에 있었고, 서울로 나가는 대중교통도 불편함 없이 다녔습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아파트가 불편해지더라고요. 살기에 답답하게 느껴졌습니다. 옆집은 물론 위아래 집들이 모두 우리 집을 포위하고 있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창문을 열면 화단의 나무들보다는 하늘을 가린 다른 아파트부터 보였고요.

어쩌면 우리나라에서 절반이 넘는 사람들이 선택한 주거 공간인 아파트는 아무런 잘못이 없을 겁니다. 오래도록 아파트에서 살았으면서도 그 환경에, 이웃에 적응하지 못한 저와 제 가족이 문제겠지요. 아무튼, 우리 가족은 생활만을 위한 공간으로는 나무랄 데 없던 아파트가 싫어졌고 그렇게 떠났습니다.
 

전원주택 어느 소설가의 전원주택 마당에는 야생화가 흐드러졌다. ⓒ 강대호

 
마당 있는 집에 살고 싶다는 꿈에 불을 지핀 계기가 있었습니다. 언젠가 용인의 전원주택에 사는 지인의 초대를 받았습니다. 소설가인 그는 마당에 텃밭을 일구고 야생화를 키웠습니다. 마침 해당화가 멋들어지게 피어 있었는데 보기 참 좋더라고요.

"씨를 뿌리거나 모종을 심고는 꽃망울이 올라오길 기다립니다. 마침내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면 내 마음도 활짝 펴진 걸 느끼게 된답니다."

소설가는 야생화로 물든 마당을 자랑스러워했습니다. 함께 간 일행들도 글 쓰는 사람들이라 감수성이 폭발했죠. 난 아름다운 마당에도 감동을 받았지만 소설가가 들려준 생명들이 자라는 이야기가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습니다.


야생화가 자라고 나비가 놀러오는 집

아파트를 떠나기로 결심하고 난 뒤 분당에서 멀지 않은 전원주택을 알아보았습니다. 아무리 가까워도 우리 가족의 생활권인 서울과는 멀었습니다. 전원주택을 알아볼수록 집에서 오랜 시간 생활하는 사람들을 위한 주거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밖에 있는 시간이 많은 우리 가족과는 맞지 않았죠.

그래서 마당을 대신할 수 있는, 옥상이 딸린 다세대 주택으로 이사했습니다. 그리고 옥상을 꾸미기 시작했죠.

야생화부터 시작했습니다. 우선 모종을 구해서 예쁘게 놓아 보기로 했습니다. 화원 주인에게 겨울을 나는 야생화를 추천받아서 종류별로 한 개씩 들여놓았습니다. 더 많이 들여올까도 했지만 우선 이번 겨울을 보내며 경험을 쌓아보기로 했습니다.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먼저 시작해본 거죠.
 

야생화 옥상에 야생화를 들여놓았다. ⓒ 강대호

 
목공에 취미가 있는 아내는 목공소에서 나무를 잘라오더니 테이블을 뚝딱 만들더군요. 처음에는 가족이 사용할 테이블인가 했는데, 나중에 보니 꽃들을 올려놓았습니다. 예쁜 조명도 더해 낮에는 물론 밤에도 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쑥갓 씨앗도 심었습니다. 사흘쯤 지나니까 싹이 올라왔어요. 너무나 신기했습니다. 그런데 싹은 너무나 천천히 자랐습니다. 쑥갓을 따 먹으려면 아주 멀었습니다. 어쩌면 그냥 망친 건지도 모르죠. 다음에는 모종을 사 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느 날 퇴근하니 옥상에 이상한 화분이 있었습니다. 대파였습니다. 아내가 냉장고에서 여러 날 보관하던 대파를 뿌리째 심었습니다.

"사놓고 먹질 않아서 냉장고에서 시들어가니까 그냥 한 번 심어본 거야. 뿌리는 싱싱해 보이니까."

저렇게 심는다고 다시 자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음날 보니까 전날보다 더 기울어 보이기도 했고요. 점점 더 기울어지더라고요. 아내는 쓰러져 가던 대파를 싹둑 자르곤 송송 썰더니 냉장고에 넣었습니다. 화분에는 대파 뿌리만 남았죠.

그런데 그다음 날 보니 대파 자른 부분이 좀 하얗게 변했더라고요. 우린 설마 했습니다. 또 다음날 보니 잘린 부분에서 뭔가가 살짝 올라왔습니다. 우린 놀랐죠. 대파가 뿌리를 내리고 새롭게 자라고 있었던 거죠.
 

대파 뿌리만 남긴 대파가 새롭게 자랐다. ⓒ 강대호

 
대파는 그렇게 무럭무럭 자랐습니다. 잘렸던 부분이 길게 올라오며 좁아지더니 시장에서 파는 대파처럼 끝이 뾰족해졌습니다. 아내는 또 싹둑 잘라서 송송 썰었습니다. 이제 대파 살 일은 없겠다면서요.

지금이라도 알아서 다행이다

옥상집에 산 지 이제 겨우 한 달 지났지만 아파트에서 겪지 못한 경험을 하며 삽니다. 가을이 깊어가며 잎이 조금씩 떨어지지만 야생화는 꽃의 품위를 놓지 않고 있습니다. 쑥갓은 언제 다 자랄지 모르지만 하루하루 자라며 기쁨을 주고 있습니다. 나비와 산새도 날아와 눈이 심심치 않습니다.

아파트를 떠나면 다들 불편할 거라고 했지만, 저는 옥상집에서 매일 감동하며 삽니다. 예전에 미처 몰랐던 생명의 기운을 느끼며 그 힘찬 모습에 위로를 받는 날이 계속됩니다.

어쩌면 사소한 변화일 수 있는데 우리 가족에게는 큰 기쁨이 됩니다. 그러고 보면 감동이나 기쁨은 먼 곳에 있지 않고 우리 옆에서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예전엔 이것을 왜 몰랐을까요. 하지만 지금이라도 알았으니까 다행입니다. 아직 늦지 않았으니까요.
 

야생화와 나비 남들이 불편하다고 한 옥상집에서 생명의 힘찬 기운을 받고 산다. ⓒ 강대호

 
야생화들이 겨울을 어떻게 날지 벌써 궁금합니다. 무사히 넘기겠죠? 내년 봄이 더더욱 기다려집니다. 야생화를 더 많이 들여다 놓을 예정이거든요. 어쩌면 이런 설렘이 봄을 기다리는 농부의 마음 아닐까 싶네요.

생명을 키우는 마음이 이렇게 설레는 줄 몰랐습니다. 아이를 키우며 느꼈던, 그러나 살면서 잊었을 그런 마음이 되살아납니다. 옥상집이 나와 우리 가족을 변하게 합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강대호 시민기자의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옥상집 일기 #야생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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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 중반을 지나며 고향에 대해 다시 생각해봅니다. 내가 나고 자란 서울을 답사하며 얻은 성찰과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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