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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차별 학살에 자위수단으로 시민 일부 무장항쟁

[김삼웅의 5·18 광주혈사 / 29회] 한국현대사에서 시민이 무장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등록 2019.10.22 16:26수정 2019.10.22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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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18 당시 시민들과 계엄군들이 금남로에서 대치하고 있다. ⓒ 5.18 기념재단

광주일원에서 살육과 항쟁이 계속되고 있을 때 전두환 쿠데타주도세력은 신현확 부총리를 사임시키고 이충훈을 임명했다. 형식은 최규하 대통령의 인사권 행사인 것처럼 보였으나 신군부의 작용이었다.

신현확은 80년 봄 대학가에서 '유신잔당'으로 지목되었으나, 광주의 유혈사태에 실권없는 국무총리를 희생양으로 삼은 총리 교체로 광주의 항쟁이 중단될 요인은 아니었다.

신군부는 총리 교체로 유화책을 쓰는 척 하면서 21일 새벽 20사단 61연대와 62연대를 송정리역을 통해 광주에 파견하는 등 오히려 전력을 강화시켰다. 여전히 무력으로 시민들을 진압시키려는 전략이었다. 시민들은 조금도 겁 먹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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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당시 계엄군에 봉쇄된 광주-송정리 간 도로. ⓒ 5.18기념재단 자료사진

 
시민들은 동이 트자마자 차량을 이용하여 외곽지역 주민들을 시내 중심가로 실어 나르기 시작했다. 금남로에 모여든 사람들의 숫자는 오전 9시쯤 1만여 명으로 불어났다. 금남로는 관광호텔 앞에서부터 한국은행 사거리까지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어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고, 그 뒤쪽 유동 삼거리까지도 차츰 사람들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아주머니들은 주먹밥을 지어 지나가는 시위 차량에 올려주었다. 길거리 상점마다 음료수를 박스째 시위 차량에 제공했고, 주유소에서는 무료로 기름을 넣어주었다. 운송회사나 차량 소유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자발적으로 자신의 차를 시위용으로 내놓기도 하였다.

간혹 시위대가 차량을 강제로 징발하더라도 별다른 저항은 없었다. 분노가 공포심의 임계점을 넘어서자 생존 본능이 거대한 집단적 공명 현상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주석 4)

  

목숨을 위협하는 공포와 두려움 속에서도 양동시장과 대인시장의 상인들이 시민군들과 함께 나누었던 주먹밥은 단순한 밥이 아니었다 ⓒ 5.18 기념재단

 
시민들은 무도한 계엄군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자체 무장을 해야 한다는 무장항쟁론이 나오고 공감되었다. 어디까지 자위수단이었다.

사망자는 대폭 늘어났고 시민들은 남녀노소, 직업을 불문하고 '분노의 일체감'을 이루었다. '무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박감으로 시위군중들은 '총'의 소재지를 향해 떠나기 시작했다. 그들이 목표로 가는 곳은 대부분이 예비군 무기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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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당시 시위대들은 버스를 타고 돌아다니며 시민들의 참여를 유도했다. ⓒ 5.18기념재단 자료사진

 
"총에는 총으로!" "이대로 당할 수만은 없다. 우리도 총을 갖자!" 면서 시외로 빠져나간 흥분한 젊은 청년시위대원들은 텅 비다시피한(대부분이 광주시로 차출되었다) 경찰서와 지서를 파괴하고 무기와 탄약을 모으기 시작했다.

우선 오후 2시경 동양고속버스를 선두로 한 수 십대의 차량이 화순에 진입, 곧장 화순탄광으로 직행하여 광부들의 환영과 알선으로 시위대들은 무기고에 진입, 다량의 총기와 탄약을 획득했다. 처음엔 광부들이 TNT를 내주려 하지 않았으나 광주시의 피비린내나는 살상을 듣고선 곧장 다량의 TNT를 인도해줬다고 한다. (주석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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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당시 시위에 참여하고 있는 광주지역 고등학생들. ⓒ 5.18기념재단 자료사진

 
한국현대사의 반독재투쟁 과정에서 시민이 무장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4ㆍ19혁명, 부마항쟁, 6월항쟁, 촛불혁명 때의 시위에서 시민ㆍ학생들은 포악한 독재세력에 돌멩이와 자체 제작한 화염병을 던지는 수준에 불과했다. 광주항쟁은 그만큼 계엄군의 살상이 극심했던 때문이다. 그나마 촛불혁명 때엔은 돌멩이 하나 던지지 않았다.

같은 민중항쟁사이면서도 1980년의 광주항쟁은 또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3ㆍ1혁명의 경우 그 지도부가 어느 정도의 조직을 가지고 있었으나 자위수단을 가지지 못한 비폭력운동에 한정되었고, 식민지시대의 광주학생운동은 비조직적 비폭력항쟁에 그쳤으며, 4ㆍ19혁명 역시 비조직적 비폭력항쟁에 그친 데 비해 1980년의 광주민중항쟁은 비조직적 항쟁이면서 자위수단으로서의 무장을 갖춘 그 유례가 흔치 않은 항쟁으로 발전했다는 점이다.

광주민중항쟁이 비조직적 항쟁이면서도 무장항쟁으로 발전하게 된 중요한 원인의
하나가 정권측의 무자비한 진압방법에 있었지만, 그러나 우리 근ㆍ현대사에서 일제에 대항한 무장독립운동을 제외한 피지배층의 권력에 대한 항쟁으로서는 또 8ㆍ15 후의 사회주의계 무장항쟁을 제외하고는 19세기 말의 갑오농민전쟁 후 광주민중항쟁에서 다시 나타난 희귀한 현상이었다. (주석 6)


주석
4> 황석영 외, 앞의 책, 186쪽.
5> 윤재걸, 앞의 책, 109~110쪽.
6> 강만길, 앞의 책, 30쪽.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5ㆍ18광주혈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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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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