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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미 많이 살았다" 도망가는 걸 거부한 독립투사

[동행취재] '응답하라 1919, 임시정부 100주년 기념 경기도 중학생 역사원정대

등록 2019.10.18 18:04수정 2019.10.24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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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형 고택에 전시된 사진 ⓒ 이민선



연해주 항일운동의 대부였지만, 아직은 낯선 '페치카 최재형'. 국사책에서도 찾을 수 없는 이름이다. '페치카(난로)'는, 동포 고려인들을 따뜻하게 돌본 덕에 얻은 애칭이다.

그의 흔적은 러시아 우수리스크 '최재형 고택'에 남아 있다. 지난 15일 과천지역 중학생 26명과 함께 '최재형 고택'을 방문했다. 경기도교육청과 경기도청이 함께 진행한 '응답하라 1919, 임시정부 100주년 기념 경기도 중학생 역사원정대(아래 역사원정대)'에 참여한 학생들이다. 역사원정은 지난 14일부터 3박 4일간 진행했다.

고만고만한 중학생 스물여섯 명이 모여 있는 공간이 이렇듯 고요할 수 있는 것일까! 최재형 고택에 들어서면서부터 왁자지껄함이 사라졌다. 처절할 만큼 극적인 그의 삶이 주는 무게감에 눌렸기 때문이었다.
 
극적인 삶이 주는 무게감, 숙연해진 학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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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형 고택에서 최재형에 관해 발표를 하는 학생들 ⓒ 허경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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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형 고택에서 최재형 일대기를 소개하는 학생들 ⓒ 이민선


  
최재형의 러시아 이름은 최 표트르 세메노비치다. 그는 노비와 기생의 아들이라는 신분의 어려움을 딛고 러시아에서 자수성가했다. 

사업가로 크게 성공해 러시아 황제를 만날 정도로 러시아에서 탄탄한 입지를 굳혔음에도, 그 안락함에 안주하지 않고 일본군 총탄에 쓰러질 때까지 독립운동에 매진했다. 

연해주에서 벌어진 크고 작은 항일투쟁사에 그의 이름이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1908년 그는 러시아에서 가장 대표적인 의병조직인 '동의회'를 조직해 총재가 되어 국내 진공 작전을 주도했다. 1910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간되던 '대동공보'라는 신문을 발행, 교포의 계몽과 항일사상 고취에도 힘썼다. 한인 중학교를 설립해 2세 교육에 힘쓰기도 했다.


러시아로 망명한 독립운동가 생계비와 활동비, 군자금 지원도 그의 몫이었다. 이토히로부미를 처단하러 떠나는 안중근 의사에게 자금을 지원한 것도 최재형이다. 동의회 일원이었던 안 의사는 그와 함께 거사를 계획하고 그의 집에서 머물며 사격 연습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1919년에는 상해에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 제1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초대 재무총장에 선임되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노령을 근거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20년 4월 일제가 연해주 지역의 러시아혁명 세력과 한인 독립운동 세력을 무력화하기 위해 저지른 무차별 방화, 학살 사건인 '4월 참변' 때 잡혀 모진 고문을 당한 끝에 죽임을 당했다. 일본군은 그의 시신도 가족에게 돌려주지 않았다. 그의 나이 62세였다.

당시 그의 가족은 일본군이 들이닥칠 것을 알고 "빨리 떠나라"고 재촉했지만, 최재형은 "내가 떠나면 일본군은 어머니와 너희를 체포해 때리고, 고문하고, 나를 배반할 것을 요구할 것이다. 나는 이미 늙었으며 많이 살았다. 나는 죽을 수 있다"며 집을 떠나지 않았고, 결국 일본군에게 잡혀 피살됐다.
 
홍범도 장군처럼 비천한 출신 독립운동가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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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형 고택 전경 ⓒ 허경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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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신한촌 기념비 앞에서 태극기를 펼쳐든 학생들 ⓒ 허경진




남겨진 그의 가족은 스탈린 치하에서 혹독한 고초를 겪었다. 거부의 자식이란 이유로 '딸 올가는 10년 형을 선고받고 7년간 복역했다. 아들도 2년 가까이 감옥에 수감됐던 것으로 알려졌다. 대한민국 정부는 독립운동가 최재형의 공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역사원정대에 참가한 학생들은 미리 조사한 그의 일대기를 '최재형 고택'에서 직접 발표했다. 그의 극적인 삶이 학생들 입을 통해 전해지는 동안 학생들은 물론 인솔 교사 얼굴에도 숙연함이 어렸다.

한 학생은 최재형 일대기를 소개하며 "친구들에게 최재형에 관해서 물었는데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우린 왜 최재형 선생을 몰랐을까?"라며 "앞으로 최재형 선생님을 알리기 위해 노력하겠다"라고 다짐하듯 말했다.

항일 독립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이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존재한다.

후손이 대한민국에서 살지 않아서, 그가 활동하고 묻힌 곳이 이곳 공산주의 국가여서 그렇다는 의견이 있다. 또한 신분이 높던 대부분의 독립운동 지도자와 달리 홍범도 장군처럼 비천한 출신이어서 알려지지 않았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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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곡소리..." 고려인 강제이주 역사 앞에서 숙연해진 학생들
"러시아에 있는 우리 역사를 눈으로 확인해 벅차다"


 
#최재형 #'응답하라 1919 #경기도교육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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