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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국회 앞 100만 시민... "우리 목소리를 들어라"

[현지 취재] 영국 운명의 날, '브렉시트 반대' 시민들의 외침을 듣다

등록 2019.10.20 18:10수정 2019.10.22 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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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일 오후 영국 국회의사당으로 많은 시민들이 브렉시트 반대 행진을 벌이고 있다. ⓒ 김종철

 
이미 예상했었다. 지난 19일 오전(현지시간) 집을 나서 영국 국회의사당쪽으로 향하는 길은 쉽지 않았다. 영국 지하철(언더그라운드, Underground)은 웨스트민스터를 비롯해 런던 중앙쪽으로 운행을 중단한다고 예고돼 있었다. 대신 런던 시내외를 연결하는 철도는 그대로 운행되고 있었다.

영국 지하철 디스트릭트라인(District Line)의 남쪽 종점인 윔블던 역에는 아침부터 지하철 대신 일반 철도를 타려는 시민들로 북적였다. 일부 시민의 손에는 유럽연합을 상징하는 파란색 깃발이 쥐어있었다. 윔블던 역으로 들어오는 열차는 다른 어떤 주말보다 시민들로 가득찼고, 이들 대부분은 열차 종점인 런던 워터루역에서 내렸다. 다시 국회의사당쪽으로 가려면 지하철로 갈아타야 했지만, 그냥 걷는 쪽을 택했다. 런던의 대표적인 관광명소인 런던 아이(London Eye)를 가로질러 20여 분쯤 걷다보면 닿을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웨스트민스터 다리에 올라섰다. 여느 주말 같았으면, 빨간색 2층 버스와 블랙캡(택시) 등으로 붐볐을 왕복 4차선 도로는 텅 비어 있었다. 다리 위에는 영국 경찰과 차량 등이 도로를 통제하고 있었고, 커다란 크기의 간판이 '도로 폐쇄(ROAD CLSOED)'를 알리고 있었다. 다리 주변의 하늘에는 방송사에서 띄운 것으로 보이는 헬리콥터 2대가 동그란 원을 그리며 날고 있었다.(실제 나중에 알게됐지만, 영국 BBC는 이날 헬기를 동원해 집회 과정을 생중계했다.)

영국의회, '브렉시트' 의회 통과 두고 37년만에 토요일 의사일정 
 

지난 19일 오후 영국 런던 국회의사당 주변 모든 도로의 교통이 통제됐다. 사진은 웨스트민스터 다리 입구에 놓은 경찰의 교통 통제 내용. ⓒ 김종철

 
오후 1시30분께 의사당 앞 광장은 이미 수많은 시민들로 가득차 있었다. 이날 집회는 당초 낮 12시부터 런던 동쪽 파크레인에서 국회의사당까지 행진이 예고됐다. 이날 행사를 주최한 '피플스 보우트(People's Vote)'는 지난 17일 석간신문인 이브닝 스탠다드 전면광고를 통해 브렉시트 반대 집회 일정을 공개하면서,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독려하기도 했다.

이들이 집회 최종 목적지를 의사당 앞으로 정한 이유는 브렉시트에 대한 중대한 결정이 있기 때문이다. 이날 영국 하원은 오전부터 보리스 존슨 총리가 유럽연합(EU)과 합의한 새로운 브렉시트 안에 대한 토론을 진행했다. 토론이 끝나면, 새 합의안에 대한 의회 승인을 묻는 투표도 진행될 예정이었다. 영국 의회가 토요일에 의사일정을 위해 문을 연 것은 지난 1982년 4월 3일 이후 37년만이라고 한다. 영국 정계 뿐 아니라 주요언론 등은 '역사적인 날', '영국 미래가 결정되는 날'이라며 한껏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다.

사실 이날 영국 의회가 문을 연 것은 브렉시트 관련 법안 때문이다. 영국 정부는 19일까지 '브렉시트 합의안'이나 '노딜' 브렉시트에 대한 의회 승인을 얻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EU 집행위원회에 당초 예정된 10월31일 브렉시트를 3개월 추가 연기하도록 하는 편지를 보내도록 법으로 명시했다. 따라서 이번달 말 브렉시트를 공언해 온 존슨 총리는 지난 17일 EU와 진통끝에 새 합의안을 들고 의회를 찾은 것. 존슨 총리는 바로 이전 메이 총리가 3번에 걸쳐 의회에서 브렉시트 합의안이 부결된 점을 들면서, "이번에 진짜 끝내야 한다"며 강력하게 추진해왔다.

이날 광장에 모인 시민들은 한결같이 보리스 존슨 총리를 강하게 비판했다. 존슨 총리를 최근 개봉한 영화 <조커(JOKER)> 에 비유한 피켓부터, 그의 독단적인 의사결정과 추진 방식을 제2차 세계대전 일본의 가미가제식 전쟁에 빗대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영국 남부에서 아침 일찍 기차를 타고 올라왔다는 바바라씨는 "그는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듣지 않는다"면서 "(그는) 국민을 상대로 거짓말만 늘어놓고 있다"고 비판했다.


영국 각지에서 모여든 시민들, "존슨은 거짓말장이, 스톱 브렉시트"
 

국회의사당 주변에 모인 수많은 시민들이 각자 준비해 온 피켓 등으로 보리스 존슨 정부의 브렉시트 합의안을 반대하고 있다 ⓒ 김종철

 

국회의사당 주변에 모인 수많은 시민들이 각자 준비해 온 피켓 등으로 보리스 존슨 정부의 브렉시트 합의안을 반대하고 있다 ⓒ 김종철

 
이날 집회에는 초등학생을 비롯해 10대, 20대 등 젊은층 뿐 아니라 가족 단위와 중장년층도 눈에 많이 띄었다. 자신을 초등학생이라고 소개한 한 소녀는 자신이 직접 만든 피켓을 손가락으로 보여주며, "우리는 저기(EU)에 머물고 싶어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의회 광장 정면에 대형 스크린에서 보리스 존슨의 브렉시트 관련 영상이 나오자, 시민들은 일제히 '우~'라며 야유를 하기도 했다. 오후 2시께부터 브렉시트를 반대해 온 시민사회단체의 발언이 이어지면서, 집회 참가자들은 박수를 치면서 호응하기도 했다. 2시 50분께 의회에서 보리스 존슨의 브렉시트 합의안이 표결에도 들어가지 못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광장은 환호로 가득찼다.

이날 의회는 새로운 브렉시트 합의안 대신 보수당 출신 무소속 올리버 레트윈 경이 발의한 수정안에 대해 표결을 붙여 통과시켰다. 이 수정안은 브렉시트 이행법률이 마련될때까지 합의안에 대한 최종 승인을 유보하는 내용이다. 이날 존슨의 새 브렉시트 합의안이 통과되더라도, 31일까지 관련 이행법률을 만들기가 쉽지 않다는 지적도 꾸준히 나왔었다. 결국 하원은 수정안만 통과시키고, 존슨의 새 브렉시트 합의안 승인을 보류했다. 의회의 이같은 결정은 영국 BBC 방송을 통해 전국에 그대로 생중계됐다.

방송을 지켜보던 '피아카스틸로'라는 이름의 여성은 해맑게 웃으면서 기자에게 악수를 청하기도 했다. 그는 이어 "수정안이 통과되면서 결국 이번달 말 브렉시트는 안될 것"이라고 말했다. 자신을 스코틀랜드 출신이라고 소개한 그는 "나의 남편은 스페인 사람"이라며 "나의 아들 딸 모두 영국 사람이지만 유럽 다른 나라를 다니면서 생활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브렉시트는 사회적으로 매우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라며 "이럴 때 일수록 국민들의 목소리를 듣고 신중하게 처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영국 녹색당 피켓을 들고 나선 한 청년은 "존슨의 브렉시트에 국민의 절반은 반대하고 있다"면서 "정말 나라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국민들이 다시 직접 선택할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피플스 보우트'쪽은 브렉시트에 대한 국민 여론이 변하고 있다면서, 제2 국민투표를 요구하고 있다.

존슨, 브렉시트 3개월 연장 요청... "국민의 목소리를 들어라"
 

보리스 존슨 정부의 브렉시트 합의안에 반대하는 시민들이 거리 곳곳에 놓은 팻말들. ⓒ 김종철

 

이날 하원의 결정으로 존슨 총리는 EU쪽에 브렉시트를 2020년 1월 31일까지 연기해달라는 편지를 보내야 한다. 영국 하원은 지난달 야당 주도로 유럽연합(탈퇴)법을 만들어, 새로운 브렉시트 합의안이나 '노딜' 브렉시트에 대해 의회 승인을 얻지 못하면, 브렉시트 3개월 추가 연기를 담은 편지를 총리가 EU쪽에 보내도록 명시해 놨다.

존슨 총리는 이날 의회표결이 끝난후, "10월31일 브렉시트를 위해 준비를 할 것이며, 법이 나로 하여금 EU에 연기 요청 편지를 강제하는 규정은 없다"고 반발하기도 했다. 이에 제러미 코빈 영국 노동당 대표 등은 "총리가 법을 정면으로 어기고 있다"면서 반박했다. BBC 등에 따르면, 결국 존슨 총리는 이날 밤 늦게 EU쪽에 편지를 보내, 브렉시트 3개월 연기를 요청했다.

오후 4시께 집회에 참가한 시민들은 국회의사당 광장에서 해산한 후, 내셔널 갤러리와 트라팔가 광장 등으로 자리를 옮겼다. BBC는 주최 쪽의 말을 빌려, 이날 런던 중심가를 가득 메운 참가자들의 수가 100만 명에 달한다고 보도했다. 실제 방송사 헬기에서 찍은 영상을 보면, 이날 행사에 참여한 시민들은 웨스트민스터 국회의사당 주변 뿐 아니라 총리 관저가 있는 다우닝가, 트라팔가 광장 주변과 이어지는 도로를 가득 메웠다.

이날 저녁, 그들이 지나간 도로 곳곳에는 다양한 목소리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트라팔카 광장 한켠에 놓인 피켓에는 '국민의 목소리를 들어라(Hear Our Voice)'가 큼지막하게 씌여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런던 워터루역에서 휴대폰은 윔블던으로 떠나는 기차 시각을 알려주면서, 서울의 집회 뉴스 소식도 함께 전해왔다. '응답하라, 국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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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일 런던 중심가에서 벌어진 브렉시트 반대 집회에 사상 최대 규모의 시민들이 참여했다. 사진은 영국 BBC 항공화면 캡처. ⓒ BBC 캡처

 
#보리스 존슨 #영국 브렉시트 #국회의사당 #제러미 코빈 #유럽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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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황의 원인은 대중들이 경제를 너무 몰랐기 때문이다"(故 찰스 킨들버거 MIT경제학교수) 주로 경제 이야기를 다룹니다. 항상 배우고, 듣고, 생각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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