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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으로 카톡 쓰고, 친구들과 여행... 내겐 새 세상

[루게릭병 환자가 눈으로 쓴 에세이] 설악산 단풍여행, 단풍은 보지 못했지만

등록 2019.10.24 09:06수정 2019.10.24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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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7년여간 루게릭병으로 병상에 누워 있는 신정금씨가 삶의 의욕을 되찾아가는 과정을 담담하게 쓴 에세이입니다. 신정금씨는 온몸이 굳은 상태로 안구마우스를 이용해 눈을 움직여 글을 씁니다. 하루 하루 힘겹게 버티고 있는 단 한 명에게라도 작은 위로와 용기를 줄 수 있기를 바라면서.[편집자말]

가을여행 ⓒ 신정금

  
지난 5월 금오도 여행을 시작으로 7월엔 대학시절 함께 활동했던 '백단학회' 동아리 선후배, 동기들과 안면도로 여행을 다녀왔다. 안면도 여행은 내 신체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더욱 적극적으로 내게 허락된 시간을 살아야겠단 결심을 하게 했다.

그동안 카톡으로 소통하자는 백단 가족들의 권유가 있었지만 건강했던 시절 두고 온 세상이 그리울까봐 선뜻 용기가 나질 않았다. 그랬던 내게 안면도 여행은 세상 속으로 나가 건강한 비장애인들과 더불어 살아가기로 결심하는 계기가 돼주었다. 카톡도 새로 시작해 보기로 했다.

카톡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며 맨 먼저 백단 단톡방과 서판교 성당 1기 지역장 모임인 '두밀회' 단톡방과 소통을 시작했다. 모두 과하게 반겨주고 응원해 주었다. 본격적인 여행 준비를 위해 휠체어를 실을 수 있는 장애인 차량과 숙소 회원권이 우선적으로 필요했다.

남편과 상의 끝에 새 차를 신청하고 숙소 회원권을 알아보던 중에 단톡방에서 내 소식을 접한 두밀회 회원인 크리스티나(성당 세례명) 형님께서 자신의 리조트 회원권을 자유롭게 이용하라는 톡이 왔다. 어찌나 반갑던지 난 마음이 급해져 염치없이 새 차 출고 날짜에 맞춰 설악산 단풍여행을 시작으로 12월 송년 모임까지의 일정표를 만들어 형님께 숙소 예약을 부탁했다.

그리고 정확치 않은 차 출고일이 걱정되어 가끔 이용하곤 했던 호흡기 회사 차량도 만일을 대비해 예약해 두었다. 국내 여행에선 특히 맛집을 찾아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게 큰 즐거움인데, 나 때문에 마음대로 즐기지 못하는 일행들을 위해 솜씨 좋은 친정 고모에게 음식 준비도 미리 부탁해 두었다.

갑작스럽게 결정되어 얼떨결에 다녀온 지난 7월 여행과는 달리 이번엔 내가 적극적인 준비를 해서인지 마치 소풍날을 기다리는 동심처럼 여행 날이 기다려졌다. 10월 12일 태풍 하기비스의 간접 영향으로 영동지방에 비가 올 거란 일기예보에 걱정이 됐다. 차가 막힐 것 같아서 일찍 서두르기로 하고 잠자리에 들었지만 여러 상념으로 좀처럼 잠이 오질 않았다. 잠깐 선잠을 자고 기침을 했더니 활동보조 언니가 일어나서 석션(전동기 등에 연결한 튜브를 이용해 가래 등을 빼내는 것)을 하기 위해 불을 켰다.

설악산까지 왔는데 단풍은 아직


시계를 보니 새벽 3시였다. 서쪽 창밖으로 보름달이 환하게 웃으며 얼굴을 내밀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달이 지고 짙은 어둠 속으로 사물들이 몸을 숨겼다. 이른 아침부터 서둘러 아침 8시 드디어 출발했다. 새 차로 떠나는 첫 여행이다. 차는 공간이 넓어 지난 여행 때보단 한결 편안했다.

잠시 정차 구역이 있었지만 양양까지 새로 뚫린 도로는 예상과는 달리 차가 막히지 않았다. 하지만 만산홍엽의 설악산 단풍 구경은 어려울 것 같아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해졌다. 출발 전날 크리스티나 형님이 카톡으로 설악산에 아직 단풍이 들지 않았다고 귀띔해 주셨지만 이 정도일 줄 몰랐다.

고속도로의 터널을 하나씩 지날 때마다 신세계가 펼쳐져 주길 고대했지만 숙소인 고성 대명리조트에 도착해서까지 우리동네 나무들과 별로 달라 보이질 않았다. 아쉬웠지만 설악산 단풍 구경은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단풍여행이 워낙 오랜만이라 단풍 시기마저 잊었나 보다. 정오쯤 숙소에 도착해 방을 배정받고 짐 정리를 마친 후 일행들을 기다렸다. 평곤 형네 가족이 도착했다. 우리는 다른 일행들이 오기 전에 숙소 주변을 산책하기로 했다.

울산바위가 한눈에 들어왔다. 어느 예술작품이 이렇게 웅장하고 멋질 수 있을까? 설악산은 여섯 번째인데 울산바위 전경을 마주하긴 처음이었다. 울산바위를 마지막으로 올랐던 게 병 나기 2년 전 친구 부부와 함께였다. 엊그제 같은데 벌써 10년 세월이 흘렀다.
  
우리는 숙소 주변을 한 시간 이상 산책하며 설악산 풍광을 눈에 담았다. 산책 후 숙소에 도착하니 일행들이 먹을 걸 한 보따리 싸 들고 도착했다. 일행들은 술을 곁들인 식사를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못 올 거로 생각했던 용심이와 영미가 온다니 매우 기뻤다.

하지만 나는 전날 두 시간밖에 못 잔 탓에 자꾸만 눈이 감기고 피로가 몰려왔다. 눈 마사지를 해가며 간신히 버티다 11시쯤 잠자리에 들었다. 밖에서는 즐거운 대화가 이어졌지만 금세 잠이 들었다.

일행들은 아침 식사를 하고 전날 남긴 생선회에 약간의 채소를 넣어 회덮밥을 만들어 새참까지 먹은 후 설악산으로 향했다. 권금성케이블카를 타겠다는 야무진 결심을 했었지만 4시간 이상 기다려야 한단 말에 포기하고 사찰 옆 산책로를 걷기로 하고 커다란 불상 앞에서 권금성을 바라보며 인증 사진을 찍고 산책로로 향했다.
       

가을여행 ⓒ 신정금

  
포장이 잘된 폭이 3~4m는 됨직한 긴 산책로엔 생명력을 다한 활엽수의 잎들이 마지막 순간까지 광합성을 하기 위해 힘을 내고 있었다. 졸참나무, 단풍나무, 박달나무, 느릅나무, 은행나무, 옻나무 등의 활엽수와 키 큰 소나무들이 눈에 들어왔다. 나뭇잎들은 며칠 후면 고운 단풍이 들 것 같았다. 단풍 감상을 제대로 못 한 게 못내 아쉬웠다.

설악산에서 평곤 형 가족과 아쉬운 작별을 하고 영미의 홈그라운드인 강릉으로 향했다. 우리 차에 함께 탄 영미는 강릉에 도착한 순간 자신감이 생겨 목소리가 커지고 생기가 돌았다. 화려한 자연 풍광의 속초가 청춘의 도시라면 고즈넉한 느낌의 강릉은 중년의 안정적인 느낌이 드는 도시였다.

태풍 하기비스의 영향으로 바다는 거친 파도로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영미는 바닷가 데크 길로 내 휠체어를 밀며 안내했다. 경포해수욕장엔 데크로 된 산책로가 있어 오랜만에 파도치는 해변을 맘껏 편하게 산책했다. 영미는 날씨가 흐려 푸른 바다를 못 보여준 것을 아쉬워했지만 나는 거친 파도 치는 이 풍광을 오랫동안 기억할 것 같다.

영미와 함께여서 더 좋았다. 영미는 맛집으로 일행을 안내했다. 나도 한자리에 끼어 고소한 순두부를 먹었다. 

늦은 점심 후 용심이가 서울로 떠나고 영미는 허균, 허난설헌 생가로 우리를 안내했다. 북부지방의 전형적인 양반집 모습이었다. 집 주위엔 소나무와 은행나무가 방풍림으로 심어져 운치와 실용을 겸하고 있었다. 행랑채와 창고로 연결된 대문에 들어서니 사랑채가 있다. 영미는 쪽문으로 연결된 안채를 지나 뒤꼍 쪽마루로 우리를 안내했다.

노랗게 단풍이 든 은행나무로 둘러싸인 뒤꼍 쪽마루에서의 경치를 감상하며 허균, 허난설헌 남매의 감성이 이런 자연환경의 영향을 받았겠단 생각이 들었다. 울창하고 멋진 해송길은 경포호까지 연결돼 있었다. 경포호는 생각보다 훨씬 규모가 크고 운치 있었다.

자연과 인공이 조화를 이룬 호숫가에서 우리는 풍광에 취해 기념사진을 찍고 다음을 기약하며 아쉬운 가을 여행을 알차게 마무리했다. 
#가을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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