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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루히토 일왕이 아베 견제? 너무 나간 한국언론

[일본 어제오늘] 일왕 즉위를 둘러싼 쟁점들

등록 2019.10.23 17:01수정 2019.10.24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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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루히토 일왕 즉위 선언 나루히토(德仁) 일왕이 지난 22일 오후 1시18분께 도쿄 왕궁의 정전(正殿)인 마쓰노마(松の間)에서 자신의 즉위를 선언하고 있다. 나루히토 일왕은 "국민의 행복과 세계의 평화를 항상 바라며 국민에 다가서면서 헌법에 따라 일본국 및 일본 국민통합의 상징으로서 임무를 다할 것을 맹세한다"고 말했다. ⓒ 연합뉴스

 
일왕의 즉위식 선언은 상당한 비중을 가진 메시지로 국내외에 보도된다. 지난 22일 즉위식을 올린 나루히토 일왕의 메시지는 아래와 같았다.
 
"여기에, 국민의 행복과 세계의 평화를 항상 바라며, 국민에게 다가서면서, 헌법에 따라, 일본 및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으로 임무를 다할 것을 맹세합니다."
[(원문) "ここに,國民の幸せと世界の平和を常に願い,國民に寄り添いながら,憲法にのっとり,日本国及び日本國民統合の象徵としてのつとめを果たすことを誓います。"]
- 나루히토 일왕 즉위 메시지('19.10.22.), 출처: 일본 궁내청 홈페이지

'무난한 표현의 사용, 이슈가 될만한 지점이 없는 평화의 메시지.' - 한국 언론은 대체로 이런 시각에서 나루히토 일왕 즉위식을 바라보고 있는 듯하다. 좀 더 분석적인 보도라고 해도, 일왕의 메시지에 포함된 '헌법'과 '평화'의 가치에 중점을 둔 보도를 하는 정도였다. 

22일 몇몇 한국 언론은, '나루히토 일왕이 헌법을 수호하고 지키겠다는 결의'를 보였으며 이는 '아베 총리의 우경화 행보와 전쟁 가능국으로의 개헌 의지에 제동을 걸만한 의미'를 지닌 것으로 긍정 평가했다. 그중에는 '일왕이 즉위식 선언을 통해 아베를 견제했다' '아베의 개헌 의지와 극명히 대비됐다'면서 나루히토 일왕의 평화의지를 추켜세우는 듯한 보도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언론보도와는 달리, 실제 나루히토 일왕의 선언 원문(궁내청)을 살펴보면, 눈을 씻고 찾아봐도 '헌법 수호· 준수'에 대한 문구가 없다. 마찬가지로 현행 일본 헌법에 내포된 평화의지를 재천명하거나 유지하겠다는 의지가 나타난 부분도 찾을 수 없다.

확대해석

나루히토 일왕은 그저 "헌법에 따라(憲法にのっとり)" 임무를 다하겠다는 말만 했을 뿐이다. 일각에서는 '헌법에 따라', 혹은 '헌법에 의거'라는 표현을 사용했으니 그것만으로 헌법을 수호하겠다는 의지가 나타난 것이라고 하지만, 앞뒤 문장을 읽어보시라. 해석 측면에서 볼 때 이 문장은 '헌법에 명시된 일왕으로서의 임무를 다하겠다'는 의미이지, 일본의 평화헌법을 지키고 수호하는 데 기여하겠다는 의미로는 볼 수 없다.

즉, 대단히 소극적인 의미에서의 헌법 준수를 표현한 것으로 아베 총리의 개헌 의지에 맞서는 적극적인 의미에서의 헌법 수호와는 거리가 멀다.

만약 일본의 평화헌법을 지키겠다는 의미가 들어간 표현을 하려면 최소한 '지키겠다'는 의미나 현행 헌법을 '준수하겠다'는 표현이 직접 들어갔어야 마땅하다. 일례로 나루히토 일왕의 아버지 아키히토 일왕은 자신의 즉위식에서 현행 일본국 헌법을 지키겠다는 의지를 강력히 표현했다.
 
"국민 여러분과 함께 일본국 헌법을 지키고, 이에 따라 책임을 완수할 것을 맹세..."
[(원문) "皆さんとともに日本國憲法を守り,これに從って責務を果たすことを誓い..."]
- 아키히토 일왕 즉위 메시지(1990.1.9.), 출처: 일본 궁내청 홈페이지

아키히토 일왕의 언급에는 ▲국민과 함께, 일본국 ▲헌법을 지키고, 이에 따라 ▲책임을 완수하겠다는 의지와 표현이 명확히 들어갔다. 적어도 이 정도의 명확한 표현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래야 문장을 의역하든, 의미를 도출해내든 할 수 있다. 그러나 국내 일부 언론은 나루히토 일왕과 아베 총리의 '반대적 이미지' 구축에 급급한 나머지 의역의 수준을 지나 확대해석 수준까지 이른 듯하다.


나루히토는 친한파에 평화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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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루히토(德仁) 일왕이 지난 22일 오전 8시9분께 거처인 도쿄 아카사카 고쇼(赤坂御所)를 나서 즉위식이 열리는 왕궁으로 향하고 있다. ⓒ 연합뉴스

 
한국 언론은 나루히토 일왕에 대해 상당히 관대한 편이다. 특히 이번 즉위식을 즈음해서는 나루히토 일왕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이 담긴 보도를 내놨다. 대표적인 사례가 한국과의 인연, 그리고 평화주의자적 면모다.

나루히토 일왕과 한국과의 관계는 이번 국면에서 집중적으로 다뤄졌다. 그가 한국 음식인 비빔밥과 황태를 좋아한다는 사실과 함께, 왕세자 시절 '한일 우호 특별 기념 음악회'에 참여해 지휘자 정명훈과 함께 비올라 협연을 펼쳤던 에피소드가 소개되기도 했다.

평화주의자적 면모에 대해서는, 왕세자 시절인 2015년 기자회견에서 밝힌 과거사에 대한 언급(과거에 대한 겸허한 자세, 전쟁에 대한 비참함 등)과 학부시절 역사학 전공 관련 이야기가 다뤄졌다. 이를 통해 나루히토 일왕의 역사인식이 남다를 것이라는 추측이 나왔다. 마찬가지로 이번 즉위식에도 세계평화 지향에 대한 의지를 내비쳤다(관련 기사 : 일본 궁내청 관련 페이지).

위의 사례는 모두 사실이다. 하지만, 단지 이것으로(한국음식 선호, 한국 인사와의 인연 등) 그가 지한파·친한파이며 평화주의자일 것이라고 예단할 수는 없다.

이런 논리라면 아베 총리도 대단한 친한파에 평화주의자다. 아베 총리의 부친인 아베 신타로는 유명한 친한파 정치인이었고, 부인인 아키에 여사는 한류팬(<겨울연가>)이다. 아베 총리 자신도 불고기를 즐겨먹는다. 뿐만 아니라, 아베 총리는 자신의 저서 <아름다운 나라로>를 통해 한국의 '한류'를 추켜세우는가 하면, '일본은 한국으로부터 문화를 전해받은 과거가 있다'는 등 우호적인 발언을 쏟아내기도 했다.

평화에 대한 언급 역시 마찬가지다. 아베 총리도 마찬가지로, 입만 열면 평화를 이야기한다. 아베 총리는 이번 일왕 즉위식 축문(壽詞)에서 무려 네 번이나 '평화'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지난 8월 15일 종전기념일 연설에서는 '평화'라는 단어를 다섯 번 사용했다. '전쟁의 참화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언급도 했다.

그러나 실제는 어떠한가? 아베 총리는 평화주의자며 친한파 정치인인가?

나루히토 일왕에 대한 평가도 객관적으로 내려야 함이 옳아 보인다. 물론 그의 행보와 언론에 소개된 언행을 고려해볼 때, 그가 온건한 평화주의자일 가능성은 상당히 높다. 하지만 그것은 왕세자로서의 과거였을 뿐, 일왕으로 어떤 태도를 취할지는 지켜봐야 할 일이다.

정치에 이용 당하는 일왕이 될 가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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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지난 22일 오전 나루히토(德仁) 일왕의 즉위식이 열리는 도쿄 왕궁 규추산덴(宮中三殿) 중 가시코도코로(賢所)로 우산을 받쳐 들고 걸어가고 있다. ⓒ 니혼게이자이신문 대표 촬영=연합뉴스

 
또 한 가지 주시해야 할 것은 아베 총리에 의해 일왕이 정치적으로 이용 당할 가능성이다. 이 부분은 한국과의 외교적 관계로도 직결될 수 있는 부분이다. 그간 아베 총리는 틈틈이 일왕의 존재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시도해 왔다.

그나마 나름의 관록과 국민적 지지를 가진 전대 아키히토 일왕은 아베 총리의 의도를 잘 간파해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씩 아베 총리의 정치적 의도에 따라 휘둘리는 모습이 드러났다. 대표적인 사례가 2013년 '주권회복의 날' 에피소드다.

이날은 일본이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의해 주권을 회복한 것을 기념하는 날로 사실상 우익적 성향이 강한 행사였다. 때문에 반전(反戰) 성향의 아키히토 일왕은 이 행사에 참여하는 것을 불편해 했지만 아베 총리가 강력히 일왕의 참석을 추진했다. 결국 아키히토 일왕이 참석한 그 기념식에서는 예상치 못했던 "천황폐하 만세" 소리가 터져나왔다. 일본 우익들이 원하던 그림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는 일왕이 정치에 이용됐던 부정적 사례로도 손꼽힌다(관련 정보 : 일본공산당 홈페이지에 수록된 대담).

하물며 이번에 즉위한 나루히토 일왕은 자신의 아버지보다 그 입지가 훨씬 약하다. 때문에 나루히토 일왕이 아베 총리의 의도에 휘둘릴 가능성은 이전에 비해 훨씬 커졌다고 볼 수 있다. 가장 우려되는 부분은 일본의 전쟁 가능국으로의 개헌을 일왕이 묵인하거나 간접적으로 지지하는 것이다.

아베 총리가 일왕 즉위식을 기점으로 헌법 개정에 다시 한번 시동을 걸 가능성은 커 보인다. 아베 총리는 즉위식이 열리기 직전인 10월 4일, 국회 소신표명 연설을 통해 이같이 밝혔다.
 
"레이와(令和) 시대의 새로운 국가 창조를 함께 추진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 이정표는 헌법입니다. 레이와 시대에 일본이 어떤 나라를 목표로 하는 것인지, 그 이상의 것들을 논의해야 할 장소라면 헌법 심사회가 아닐까요."
- 아베 총리 국회 소신표명연설(2019.10.4.)

'레이와 시대'란 나루히토 일왕 시대의 연호이며, '새로운 국가의 이정표'가 되는 것은 개정된 헌법이다. 레이와 시대의 국가적 목표는 헌법 개정을 통해 시작돼야 한다는 것을 천명한 것이다.

아베 총리의 목소리에 부응하는 듯한 전조들도 이미 나타나고 있다. 일왕 즉위식 당일인 22일, 일본 자민당은 도쿄에서 헌법 개정과 관련한 토론회를 개최했다. <산케이신문>에 따르면 이날 토론회에 유력한 정치인들이 참여, 헌법 개정에 대한 논의가 오갔다. 특히, 자민당 소속 국회의원인 '이시바 시게루' 간사장은 적극적인 개헌 논의의 필요성을 호소하면서 "이 나라를 (진정한) 독립 국가로 만들려면 헌법을 바꿔야 한다"라는 언급까지 한 것으로 알려졌다.

왜 하필이면 일왕 즉위식 당일날 이런 토론회를 열었을까? 심각한 의구심이 남을 수밖에 없는 지점이다. (참고로 이시바 시게루 간사장은 아베 총리의 반대에 서 있는 정적이지만 헌법 개정과 관련해서는 일본의 '교전권(交戰權)'을 인정하자는 등의 주장을 펼치고 있다.)

'허수아비 왕'이라지만... 일왕 존재 무시 못해
 

나루히토 일왕이 마사코 왕후와 함께 지난 9월 24일 고령자센터를 방문하는 모습. ⓒ 일본 궁내청 홈페이지

 
이와 같이 일왕에 대한 논의를 이어가다 보면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는 분들이 눈에 띈다.

"어차피 일왕은 허수아비에 불과하다. 아무런 실권도 없는 존재인 일왕의 한마디 한마디에 대해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있단 말인가?"

사실, 이 논리로 다가가면 앞선 우려들을 단번에 뒤엎을 수 있다. 일견 옳은 말이기도 하다. 일왕은 정치적 실권이 없는 허수아비에 불과하다. 일본 헌법은 일왕이 국사와 국정에 관한 권능이 없음을 명백히 규정하고 있다. 그뿐이랴. 일왕의 생활과 활동들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는 궁내청조차 총리대신 관할 하에 있는 행정기구다.

그러나 일왕을 단지 허수아비로만 볼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압도적인 일본 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점에 있다.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지난 4월, 일본 왕실에 친밀감을 가진다고 대답한 사람은 76%로 역대 최고치를 달성했다. 새로 즉위한 나루히토 일왕에 대해서는 일본인의 82.5%가 친밀감을 가진다는 <교도통신>의 보도도 있었다(관련 기사).

이렇듯 강력한 지지를 가진 일왕이기에, 그의 언행 하나하나는 일본 사회에 상당히 큰 파급력을 가진다. 바로 전대 일왕이었던 아키히토 일왕은 특유의 평화주의 행보를 통해 일본의 평화헌법 유지나 전쟁 범죄 찬양 분위기를 억제시키는 데 기여했다. 역사 수정을 앞세우고 과거사에 대한 반성을 멀리했던 극우 아베 총리와 많은 부분에서 부딪혔던 것도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그나마 아키히토 일왕의 파급력은 평화 헌법 수호, 전쟁 찬양 반대, 전몰자 위령이라는 비교적 겸허한 역사적 시각을 일본 사회에 전파하는 데 기여했기에 큰 갈등이 일어나지 않았다. 문제는 일왕과 총리가 '한 마음으로' 극우 성향이 되거나, 일본 총리의 정치적 의도에 일왕이 이용되는 것이다.

반대로 생각해보자. 만약 일왕이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고 헌법 개정에 긍정적인 메시지를 냈다면 지금의 일본은 어떻게 변해버릴까?

근본은 내셔널리즘 상징... 견제와 비판 잊지 말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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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루히토(德仁) 일왕이 지난 22일 오전 도쿄의 왕궁 규추산덴(宮中三殿) 중 가시코도코로(賢所)에서 즉위 예식을 끝낸 뒤 걸어가고 있다. 가시코도코로는 일본 왕위의 상징인 삼종신기(거울·검·굽은구슬) 중 야타노카가미(八咫鏡)라는 거울을 모셔둔 곳이다. ⓒ 아사히신문 대표 촬영=연합뉴스

 
메이지 유신 이래 일본은 일왕을 중심에 두고 국민의 개념을 확립하고 국가의 모습을 만들어왔다. 일왕을 만세일계(일왕의 전통이 단 한 번도 단절됨 없이 흘러왔다는 주장)의 현인신으로 상정했고 일본을 상징하는 존재로 높였다. 즉, 일본이라는 국가의 성립은 일왕의 존재와 함께해 왔으며 떼려야 뗄 수 없다.

물론 2차 세계대전 이후 연합군사령부(GHQ)에 의해 일왕의 신격화가 사라지고 상징으로 전락했다고 하지만, 이는 타인에 의해 결정된 시스템이지 일본 국민의 정치적 견해가 성장해 스스로 혁신한 영역이 아니다. 즉, 시스템에 의해 일왕의 신격화는 사라졌지만 아직도 일본 국민들의 정서 깊숙한 곳에는 일왕을 받들고 위시하는 복종심이 깃들어 있다.

올해 초 문희상 국회의장의 '일왕 사죄 촉구' 발언에 대해 일본 정부와 여론이 보인 반응만 봐도 그렇다. 일본 정부는 문희상 국회의장에게 "말조심하라"는 도발적 발언까지 동원하며 공격했고, 일본 언론의 격정과 비난의 십자포화는 상상 이상이었다. 일왕에 대해 무엇인가 언급하고 요구한다는 것 자체를 '신성불가침'이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이처럼 일왕이라는 존재의 근본 정체성은 일본이라는 국가를 만들어내는 내셔널리즘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왜 국민의 대표가 일왕의 아래에서 만세삼창을 하겠는가? 한국은 한쪽으로 경도된 '천황제 파시즘'의 위험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고 그 잔혹함을 경험한 국가다. 미래에도 일본과 마주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가진 한국은 이를 견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내셔널리즘은 언제든 폭발할 수 있다. 냉정을 잃지 말아야 할 때다.
#나루히토 일왕 #일왕 즉위식 #일본 천황 #아베 #개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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