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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위권 아이가 학교를 그만둔 씁쓸한 이유

[아이들은 나의 스승 175] 대학입시 공정성 논쟁이 무슨 의미가 있나

등록 2019.10.28 13:41수정 2019.10.28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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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5일 오전, 2학년생인 한 아이가 '작별 인사'를 드리러 왔다며 교무실에 찾아왔다. 전학을 가는지 물었더니 대뜸 담임선생님께 '자퇴 신청서'를 제출하고 오는 길이라고 했다. 지난 몇 달 동안 여기저기서 상담도 받고 고민 고민하다 며칠 전 결정한 것이라면서, 그저 학교생활이 싫어 홧김에 떠나려는 건 아니라고 강조했다.

검정고시를 거쳐 수능으로 대학 입시에 도전해보겠다는 것이다. 어차피 성적이 최상위권인 그에게 검정고시쯤은 누워서 떡 먹기일 것이다. 그는 이것저것 신경 쓰지 않고 수능에만 '올인'하겠다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학기마다 형식적인 여러 차례의 과목별 수행평가와 별 보람도 없는 동아리활동, 봉사활동 등에 시간을 빼앗기는 게 아깝다는 것이다.

사실 학교생활기록부종합전형(이하 학종)을 준비한다고 해서 수능에 대비하지 않을 수도 없다. 그러나 그가 목표로 하는 몇몇 명문대는 수능 최저 등급을 요구하고 있다. 수시 전형에서 하향 지원을 할 생각이 조금도 없는 그에게 수능은 명문대 입학의 마지노선이니만큼, 내신 성적과 비교과 활동에 연연할 처지도 아니고 마음의 여유 또한 없다.

명색이 교사로서 자퇴라는 그의 선택을 마냥 응원할 수는 없었다. 그가 얼마나 신중한 성격인지, 그동안 얼마나 심사숙고해서 내린 결정인지 모르진 않지만 그런데도 그의 앞날이 순탄치 않아 보여서다. 당장 수능에 사활을 건다고 해도 과연 원하는 대학에 진학할 수 있을지도 불투명할뿐더러 그로 인해 포기해야 할 '기회비용'이 만만치 않은 탓이다.

수능과 학종 중 어느 것이 공정한지 묻는 말은 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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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일 오전 강원 춘천고등학교에서 고교 3학년 수험생들이 전국연합학력평가 응시를 준비하고 있다. 이번 시험은 대입 수능을 한달여 앞두고 마지막으로 치러지는 학력평가다. ⓒ 연합뉴스

 
정시의 비중이 20% 남짓에 불과할 만큼 턱없이 낮은 데다 정시는 재수생들과 특목고, 자사고, 강남 사는 아이들의 독무대라는 것쯤은 그도 잘 알고 있다. 스스로 그들과 수능 점수 경쟁을 벌이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는 말을 선선히 꺼내기도 했다. 사실 상당수의 특목고와 자사고에서는 명문대와 의대 진학을 위해 '재수는 필수'라는 말이 공공연히 회자된다.
  
그가 부러 집을 떠나 기숙사를 갖춘 입시학원, 이른바 '기숙학원'에 들어가려는 이유다. 명문대 진학을 위해 기꺼이 고등학교 생활의 나머지 절반을 입시 준비 외에는 그 어떤 것도 허락되지 않는 그곳에서 보내겠다는 것이다. 만만치 않은 학원비도 그렇지만, 명문 기숙학원에 입사하려면 별도의 학원 입시를 치러야 한다는 걸 그를 통해 알았다.

그는 지금 '기숙학원' 입시 준비를 위해 보습 학원 등록을 알아보고 있다. 원청과 하청, 재하청으로 나뉘는 제조업의 피라미드 구조처럼 대학 입시를 위한 학원이 있고, 그곳에 입사하기 위해 준비시키는 학원이 층층이 존재하는 사교육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어차피 사교육의 도움 없이 명문대 입학이 불가능한 현실이라면, 학교를 떠나는 것도 나름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말하는 교사도 있다.

'고등학교 시절 사귄 친구가 평생을 간다'는 말을 그는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모든 것이 대학 입시로 귀결되는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의 교실에서 '우정'이라는 말은 이미 사어(死語)가 됐다. 그저 농담 삼아 지껄인 말이겠거니 못 들은 척했지만, 그가 자퇴한다는 소식에 내신 등급이 올라가겠다고 좋아하는 되바라진 상위권 아이들이 더러 있었다.


하지만 공부 잘한다고 으스대지 않고 배려심이 남다른 그의 주위엔 친구들이 정말 많았다. 떠나는 그를 위해 전날 따로 작별 파티를 열어줄 만큼 그의 대인 관계는 원만했고 학교생활은 모범적이었다. 학창 시절 친구들과의 추억을 여기서 멈춰야 한다는 것에 내심 안타까워했지만 명문대 입학을 위해선 감내할 수 있다는 눈치였다.

'그깟 대학 입시가 뭐라고 학창 시절의 추억마저 가로막는 걸까.' 인사를 건네고 뒤돌아서는 그를 보며 혼잣말을 되뇌었다. 대학을 나와야 사람 구실을 할 수 있고 명문대 진학이 신분 상승의 유일한 창구라는 뿌리 깊은 편견이 해소되지 않는 한, 그 어떤 것도 미봉책일 수밖에 없고 학교 교육은 결코 정상화될 수 없다는 사실을 그의 뒷모습을 통해 새삼 깨달았다.

끝내 자퇴를 결행한 그의 학교생활을 더듬어가다 보면 기능 부전에 빠진 학교 교육의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교육과정이 대학 입시에 종속되어 존재감조차 상실한 지 오래고, 대학 진학 이외의 진로탐색활동은 학교와는 상관없는 일이 돼버렸다. 학교는 상위권 아이들의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하위권 아이들의 무기력은 더욱 커져만 가는 극단적으로 양극화된 우리 사회의 축소판이기도 하다.

그의 자퇴 사유를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러하다. 지난 1년 반 동안 쌓아온 내신 성적과 스펙으론 그가 바라는 명문대 진학이 힘들다는 판단이 선 것이다. 대학의 입학 담당자들은 성적 변화의 추이와 학교생활 중 쌓은 다양한 경험 등이 중요하다고 떠들어대지만, 이를 곧이곧대로 믿는 수험생은 거의 없다. 그 역시 성적의 추이보다는 결과가 중요하고 학교생활은 스펙으로 증명된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상위권의 내신 등급 경쟁은 '너 죽고 나 살자'는 각자도생의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특히 최상위권 아이들에게는 고작 1~2점 차이로 등급이 뒤바뀌는 경우가 비일비재할 만큼 성적에 민감하다. 100점을 맞는 것보다 50점이라도 1등급을 받는 게 더 중요하고, 통지표가 나오면 자신의 것보다 친구의 성적에 더 먼저 눈길이 가는 것도 그래서다.

 맹목적인 점수 경쟁은 진로에 대한 고민을 사치스러운 것으로 치부하기 일쑤다. 진로에 대한 고민은 대학에 진학한 뒤 해도 늦지 않다고 스스럼없이 말하는 아이들도 적지 않다. 이럴진대 필수 교육과정으로 지정된 진로탐색활동은 시간 때우기 식의 형식적인 활동에 그치고, 그 시간을 차라리 자습 시간으로 운영하자는 주장도 나오는 실정이다.

고등학교에서 2년 가까이 보낸 그 역시 자신이 뭘 좋아하고 잘하는지, 뭘 해야 가슴이 설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의 학교생활기록부(이하 생기부)의 진로희망사항을 보면, 고등학교에 입학한 뒤 마치 널이라도 뛰듯 꿈이 순간순간 변해왔음을 알 수 있다. 여느 아이들처럼 그저 과목별 점수와 등급에 따라 자신의 적성과 재능을 넘겨짚고 있을 뿐이다.

진로에 대한 확신이 부족한 상태에서 최상위권 성적임에도 과목별 내신 성적 분포가 명문대 진학에 불리하다는 판단에 급기야 자퇴를 선택한 것이다. 성적에 따라 인문사회계열에서 전혀 상반된 공학계열로 진로를 바꾸려다 보니 기존에 수강한 과목들이 계륵과도 같은 존재가 돼버렸다고 하소연했다. 결국 학종보다는 수능이 유리하다는 것이다.

2학년 1학기의 내용이 채 마무리되지도 않았는데도 그의 생기부는 A4 용지로 11장에 이른다. 최상위권인 만큼 수상경력을 포함해 자율활동, 동아리활동, 봉사활동, 진로탐색활동 등의 기록만 4장이 넘고, 교과세부능력특기사항은 과목별로 빈틈없이 빼곡하다. 1년 남짓의 분량이 이 정도라면 모르긴 해도 대학 입시 전형자료로 제출할 때쯤이면 40장은 족히 넘을 것이다.

그런데도 생기부를 기준으로 삼는 학종에선 불리하다고 여기는 이유는 뭘까. 명문대 진학을 꿈꾸는 내로라하는 경쟁자들에 견준다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다. 명문대를 중심으로 학종이 보편화하면서 생기부는 어느새 '책'이 되었고, 기재된 내용은 물론 분량 역시 무시할 수 없게 됐다. 생기부가 40~50장은 돼야 명문대 지원이 가능하다는 게 아이들 사이의 불문율이다.

인문사회계열에서 공학 계열로 진로를 바꾼 그가 줄곧 한 우물을 판 다른 친구들과 내신 경쟁이 쉽지 않다는 현실적 고민을 털어놨다. 그 사유가 진솔하게 생기부에 담긴다면 외려 득이 될 수도 있다지만, 일단 교과 성적이 낮으면 비교과 활동에 나타난 잠재성과 진정성을 인정받을 수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예컨대 한국사 성적이 좋아야 교내 역사 동아리활동과 문화재 보존을 위한 지역봉사활동이 유의미해질 수 있다.

그는 남부러워할 생기부를 지녔으면서도 오로지 명문대 진학을 꿈꾸며 학종 대신 수능을 택했다. 그러곤 수능에 '올인'하기 위해 학교를 그만두었다. 주지하다시피 단기간에 수능 점수를 올리기 위해서라면, 그가 '기숙학원'의 문을 두드렸듯 사교육에 의존하는 것만큼 효과적인 방법은 없다. 수능을 선택한 아이에게 학원화하지 못한 학교는 그저 장애물일 뿐이다.

수능과 학종 중에 어느 것이 공정한지를 묻는 말은 틀렸다. 둘 중 어느 것이 자신에게 유리한가의 문제일 뿐이다. 교사들은 물론 대부분의 아이도 둘을 사이에 두고 언론과 정치인들이 대학 입시의 공정성 운운하는 게 어처구니없다고 말한다. 이기적인 욕망이 충돌하는 유불리의 문제를 공정성의 문제로 견강부회하고 있다는 것이다.

저소득층이 수능을 선호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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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오전 정부서울청사에서 교육개혁 관계장관회의가 문재인 대통령과 유은혜 교육부 장관, 홍남기 경제부총리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 청와대

  
얼마 전 문재인 대통령도 언급했듯 학종에 견줘 수능을 선호하는 여론이 높다는 건 사실이다. '조국 사태'가 확산시킨 면도 있지만, 이전부터 학종은 '현대판 음서제'라며 질타를 받아왔다. 하지만 수능을 선호하는 이유를 꼼꼼하게 들여다보면, 정시 비중을 높여 과거로 회귀하는 것이 얼마나 무책임하고 어리석은 일인지 분명히 드러난다.

수능이 자녀를 특목고와 자사고에 보내고 강남에 거주하는 부유층에 유리하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들이 고집스럽게 수능을 선호하는 이유다. 사교육비를 부담스러워하는 저소득층에서도 정시 비중의 확대에 찬성 여론이 높다는 점이 놀랍긴 하지만, 그 이유는 부유층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그들은 학종이든 수능이든 부유층에게 유리한 건 별반 다르지 않다고 여긴다. 대학 입시는 기득권 세습의 수단일 뿐이고, 우리나라는 더 개천에서 용 나는 사회가 아니라고 선선히 동의한다. 그런데도 학종보다 수능을 선호하는 건, 수능이 학종에 비해 '단순하기' 때문이다. 당장 그들에게 대학입시가 교육의 본령에 부합하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당장 자동봉진(자율·동아리·봉사·진로활동)과 교과세특(교과 세부 능력과 특기사항), 행동특성 등 뜻조차 모르는 생기부에 쩔쩔매는 학부모들이 부지기수다.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전국 수십만 아이들이 한날한시에 치르는 수능 점수로 서열을 매겨 당락을 정하는 방식은 전혀 복잡하지 않다. 최근 뜨는 신종 직업이라는 '입시 컨설턴트'의 도움 따윈 필요 없다. 다양한 문제집을 반복해서 많이 풀어보는 것이 유일한 전략이다.

지난 22일, 대통령의 국회 시정 연설 발언으로 정시 비중 확대가 기정사실화된 이후 전국의 시도 교육청과 시민단체는 물론 학교조차 벌집 쑤셔놓은 듯 소란스럽다. 하지만 진정 우리 교육의 미래를 걱정한다면 여론에 일희일비해서는 안 된다. 거듭 강조하건대 학종과 수능의 양자택일의 문제도 아니고, 비율을 조정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도 아니다.

교육의 본령을 내팽개친 얼토당토않은 대학입시 공정성 논쟁을 집어치우고, 서열화한 학벌 구조를 혁파하기 위한 대책부터 마련해야 한다. 그런 이후라야 대학 진학의 통로와 방식을 다양화하는 문제가 논의될 수 있다. 근본적으론 더 공부하고 싶은 아이들이 대학에 가도록 풍토를 조성해야 한다. '대학에 공부하러 가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반문하는 아이들이 대부분인 현실에서 대학 입시 공정성 논쟁이 무슨 의미가 있나.

사제 간의 인연은 이것으로 끝났지만 부디 그의 건투를 빈다. 누구보다 명민한 데다 성실하고 끈기가 있는 그는 명문대 진학이라는 바람을 분명 이룰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노파심에서 당부한다면 끝내 그가 이뤄낼 명문대생이라는 학업 성취가 학벌이 변변찮은 사람들에 대한 특권 의식으로 돌변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대학입시 공정성 #학종과 수능 #정시비중 확대 #학업중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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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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