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행 피해자 '이제야'는 절규한다, 그놈을 죽여서라도 살아남으라고.

[이제야 언니에게] (최진영, 2019,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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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일희(typoon52)등록 2019.10.29 10:26
성폭행범 하면 으레, 복면 아래 긴 칼자국 흉터를 감추고 있을 법한 무시무시한 이미지를 떠올릴 것이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이런 인상의 성폭행범을 클리셰로 소비하고 있기 때문일 터. 그런데 실상 그러할까?
 
최진영의 소설 [이제야 언니에게]는 주인공 '제야'가 너무나도 친근한 친척 당숙에게 성폭행을 당한 그날의 일기로 시작한다. 그날 일기에 쓴 '끔찍한'이라는 단어에 줄이 쭉 그어진 것은, 끔찍하다는 말이 그의 고통을 담기에 깃털처럼 가볍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은 성폭행을 당한 2008 년의 시점과 이보다 앞선 6년 전, 그리고 이일이 있고 난 후의 미래 시점을 오가며 교직된다.
 
2008 년 이전에 나타나는 강간범 당숙은, 초등생 때부터 제야의 경계심을 풀기 위해 주의 깊게 의도한 일련의 과정들을 치밀하게 수행하는 '선량한 어른 남자'로 일상 속에 출몰한다. 당숙은 강간범은 흉악범이라는 이미지를 철저히 배반하며, 친절하고 사려 깊게 미래의 먹잇감을 안심시킨다. 그는 성실함과 책임감을 갖춘 청년으로 가문의 든든한 지지대며, 명망 있는 지역의 유지로 평판을 차곡차곡 쌓아간다. 그렇게 쌓은 명성은 손쉽게 그의 범죄를 세탁하게 한다. "젊고 유능한 사업가가 뭐가 아쉬워서 친척여자애를 건드리겠냐고... 남자는 술에 취하면 그럴 수 있다고... 큰일 하는 남자에게 '여자 문제'는 아주 흔하고, 그건 사실 문제도 아니"(122) 라며 이해시키는 데 성공한다.
 
이는 정치인 A의 성폭력 사건을 연상시키며, 우리 사회가 강간범에게, 특히 명망 있는 강간범에게 얼마나 너그러운지를 적나라하게 전시한다. 그러니 이런 이상한 사회에서 의심받고 외면당하고 사라져야 하는 존재는 범죄자인 당숙이 아니라 피해자 제야가 된다. 강간범 당숙의 범죄성과 그가 범죄를 저지른 이후 사회에서 용인되는 과정을 이해하는 일은, 강간범의 진면모가 괴물도 사이코패스도 아닌 지극히 정상적이거나 혹은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로 포장되고 있다는 소름끼치는 현실과, 강간이 문화가 되는 악마적 남성성에 모두가 어떻게 공모하고 있는지를 알아채는 일이다.

그날 이후 제야는 그 시간 이전으로 절대 돌아갈 수 없다. 남들에겐 '먼지'같은 이일이 그에겐 '태산'처럼 덮쳐와, 일상을 복구할 수 없게 만든다. "있었던 일은 종이가 아니니 찢어도 태워도 없어지지 않고 없던 일이 되지도 않"(49)기에, 제야는 남들이 가십거리로 소비하는 "소문 속 그 여자애가 되었다"(132) 강간범 당숙이 명망과 재력과 문화 자본으로 범죄를 무화 시키고 일상으로 복귀하자, 변방으로 사려져야 할 존재가 된 채, 강릉으로 유배되듯 쫓겨 간 제야.
 
강릉으로 밀려간 제야는 영화 [한공주]의 '공주'를 떠올리게 한다. "저는 잘못한 게 없는데요." 네가 뭔가 틈을 주었으니 강간을 당한 거라는 주변인들의 비수에 수도 없이 베이며, 공주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밖에 없었다. 공주는 떠밀려 간 곳에서도 '소문 속 여자애'를 벗어나지 못했다.
 
제야는 사건이 일어난 탓이 자신에게 있다고 속삭이는 또 다른 내면의 자아에게 잡아먹히지 않으려 안간힘을 쓴다. 그의 싸움은 그래서 사투인 것이다. 하지만 그는 괴물처럼 엄습하는 트라우마를 장롱 속에 가두지 않는다. 끔찍한 괴물을 마주하고 다시 들여다보고 해석하고 진단해내는 제야를 지켜보는 일은 처참하다. 하지만, 공포로 온 정신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사건의 본질에 직면하려 괴물과 싸우기를 포기하지 않는 그의 모습은 숭고하다. 제야가 고통의 기억들을 하나하나 건져 올려 반추하고 분석하는 과정은 독자에겐 범죄자 프로파일링을 실행하는 것과 같다.
 
제야는 어릴 적 친구 은비를 떠올린다. 왕따를 당하던 은비가 성폭행을 당하고 왜 사라졌을까에 골몰하는 일은 바로, '너는 나다'라는 당사자성의 시발점이다. "누군가의 기억에서조차 은비는 자유로울 수 없게"(80)되었다는 깨달음은 자신의 피해를 은폐하지 않고 신고하게 한 저변의 동력이 된다.
 
강간은 길을 걷다 느닷없이 들이닥치는 소나기와 같다. 피할 수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불가항력을 이렇게 물으며 책임 지운다. 왜 우산을 준비하지 않았느냐고. 왜 그때 거기 있었느냐고. 언제 닥칠지 모를 소나기를 피할 수 있던 사람은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다. '강남역 살인사건'을 목도하면서 여성들이 이미 절감했듯이, 우리는 우연한 생존자가 아니던가. 강간범이 강간하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이를 피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래서 제야는 2, 3차 가해로 만신창이가 될 것을 알고도 경찰에 신고한다. "나는 후회하지 않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면 나는 또 당했을 것이다. 지속적으로 당하면서... 그의 노예가 되었겠지."(200)
 
제야는 자신이 당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자신이 신고하지 않았다면, 동생 제니가 당했을 테고, 다른 여성이 당했을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래서 제야가 동생 제니에게 강간에 무능해선 안 된다며 쓴 당부의 편지는 이토록 비장할 수밖에 없다. "상대가 그러기로 마음먹었다면, 성범죄를 피할 방법 따윈 없어. 조심하란 말이 아니야. 죽일 수 있다면 죽이라는 말이야. 살아남으란 말이야."(229)
 
제야가 동생 제니에게 쓴 편지는, 강간을 당하고도 자신을 의심하고 자책하고 저주하고 있을 많은 여성들이 살아남은 일을 후회하지 말기를 바라는 발원인 동시에, 강간범 따위에게 목숨과 영혼을 빼앗기지 말고 살아남아 달라는 눈물겨운 부탁이기도 하다. 그래서 제야가 부른 동생 제니는 실상 우리 모두이며, 제야는 호명된 우리 모두를 2008년 그날의 현장으로 소환해, 그 무엇보다 뜨거운 연대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소설의 등장인물인 제니, 승호, 이모는 제야가 긴 고통의 터널을 지날 때 아주 미약하나마 빛이 되어준 조력자다. 그래서 독자는 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다. 만약 제야에게 이 조력자들이 없었다면 어찌 되었을까. 영화 [한공주]의 공주처럼 침몰했을까. 무조건 낙관하는 것도 문제겠지만, 무턱대고 비관할 필요도 없다.
 
제야는 자신의 고통 속에 숨지 않은 용감한 여성이다. 비록 18살의 소녀지만, 자신의 피해자성을 구조 속에 맥락화하고 성찰할 수 있는 냉철한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제야가 조력자들의 도움이 없었더라도, 비록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오느라 분명 더 긴 시간을 소요했을 것이 틀림없겠지만, 반드시 어둠에서 빠져나와 제니에게 편지를 당도시켰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런 제야에게 우리가 할 일은 제야를 말간 얼굴로 바라보며, "그렇게 겉돌 필요는 없지 않나. 다들 네 상처 이해해"(196)라며 이해를 가장한 야유와 조롱을 던질 것이 아니라, 그에게 잔인해지지 않는 것이다. 적어도 타인의 깊은 상처에 소금까지 뿌리는 일 따위는 그만 거두어도 되지 않을까.
 
최진영의 [이제야 언니에게]는 주인공 '제야'가 성폭행당하고 살아남은 생존기이기에, 독자는 필연적으로 이 소설에 상처받는다. 독자가 제야가 되어 같이 상처받는 일만이, 겨우 제야와 '입장의 동일함'에 다다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에, 독자는 이를 거부할 수 없다. 결국 이 상처는 '제야'와 같은 피해자의 고통에 무심했을지 모를, 혹은 무심코 던지는 돌팔매질에 가담했을지 모를 독자의 '잠재적 가해자성'을 상기시키기에, 이 상처는 부끄러움의 다른 면면이기도 하다. 그러니 독자의 부끄러운 상처는, '뭐 어쩌겠어'라며 고통을 가볍게 휘발시키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그 이상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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