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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과 윤석열, 황교안과 채동욱... 결정적 차이

[대한민국 검찰실록 5] 법무부장관과 검찰총장의 불편한 관계, 그 역사적 기원

등록 2019.11.07 14:57수정 2019.11.07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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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전 법무부 장관과 윤석열 검찰총장 간의 관계처럼, 최근 20년간은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의 불편한 관계가 유독 자주 표출되고 있다. 예전에도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의 갈등은 있었지만, 지난 20년처럼 온 국민이 다 알 정도로 떠들썩한 적은 별로 없었던 듯하다.

노무현 정부 출범 직후인 2003년 3월에는 강금실 법무부 장관이 서열 파괴적인 인사지침을 마련한 일로 인해 김각영 검찰총장을 비롯한 검사들이 불복하는 일이 있었다. 김대중 정부 말년인 2002년에 임명된 김각영 총장은 불과 5개월 만인 2003년 3월에 사표를 던지고 검찰 간부들 역시 줄줄이 사표를 던졌다.

2005년 10월에는 '한국전쟁은 통일전쟁'이라는 취지의 글을 기고한 강정구 동국대 교수에 대한 구속수사로 갈등이 벌어졌다. 지금은 무소속 국회의원인 천정배 당시 법무부 장관이 불구속 수사 지시를 내리자 김종빈 총장은 사표를 내밀어 장관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강정구 교수는 불구속 상태에서 수사를 받았고, 2010년 12월 대법원 선고로 징역 2년 및 자격정지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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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10월 17일, 당시 사표가 수리된 김종빈(왼쪽)검찰총장이 퇴임인사를 하기 위해 정부 과천청사 내 법무부를 방문하여 수사지휘권을 행사한 천정배 법무장관과 악수하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법무부와 대검찰청의 갈등을 지켜봤던 문재인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은 <문재인의 운명>에서 "천 장관의 수사지휘권 발동은 그 사건이 불구속 수사가 타당하다는 판단을 넘어, 우리의 형사소송법 절차가 형사소송법 정신에 따라 불구속 수사 원칙으로 가야 한다는 소신에 따른 것이었다"면서 "그 사건이 불구속으로 수사되느냐 여부가 불구속 수사 원칙으로 가는 데 중요한 분수령이 된다고 본 것"이었다고 말했다.

검찰총장은 법조인 경력(15년 이상)이 있는 사람만 할 수 있지만, 법무부 장관은 법조인 출신이 아니어도 된다. 하지만 이렇게 '출신' 때문에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의 대립이 생겨난 것은 아니다.

이는 과거에도 마찬가지였다. 고려시대 전기에 문관 우위 원칙이 확립된 뒤로, 문민 출신이 일반 정부 기관은 물론이고 심지어 군대에서까지 지휘권을 잡는 양상이 오랫동안 이어졌다. 거란족 요나라에 맞서 귀주대첩을 일궈낸 강감찬 장군도 실은 문관 출신이었다. 6진 개척으로 유명한 조선시대 김종서 장군 역시 그랬다. 이순신처럼 전문적인 무관 출신이 군부 수뇌부에 오르는 일은 흔치 않았다. 대개는 선비 출신 관료들이 군부 지도부를 구성했다.

이렇게 군대에서조차도 문관이 지휘봉을 잡았지만, 별다른 잡음이 생기지 않았다. 사령관과 부하들 간의 '출신성분' 차이가 군의 단결을 저해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의 대립 역시 한쪽은 비(非)전문가이고 한쪽은 전문가라서 생긴 게 아니다.

한국에 영향 준 '일본 검찰 제도' 살펴보니... 
 

‘검사총장’이란 표현을 쓰는 일본 검찰. 검찰청 홈페이지에 실린 사진 속 인물은 현재의 검사총장인 이나다 노부오. ⓒ 일본 검찰청

 
이 갈등에는 역사적인 기원이 있다. 이것은 1945년 패망 이전의 일본에서 생겨난 현상이다. 이것이 식민지 한국을 거쳐 현대 한국에까지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검찰총장을 검사총장이라고 부른다. 처음부터 이 명칭이 쓰였던 것은 아니다. 대검사·검사장·칙임검사 같은 명칭으로 불리다가 1880년부터 검사총장으로 불렸다.

검사총장은 처음에는 상징적 존재였다. 그래서 법무부 장관에 상응하는 사법대신이 일선 검사장들을 직접 지휘·감독했다. 검사총장이 실권이 없었기 때문에, 사법대신이 이렇게 한다 해도 둘 사이에 마찰이 생길 일이 없었다.

참고로, 일본의 법무부 장관은 1869년부터는 형부경(刑部卿), 1871년부터는 사법경, 1885년부터는 사법대신, 1948년부터는 법무총재로 불렸다가, 1952년부터 현재까지 법무대신으로 불리고 있다.

그처럼 상징적 존재였던 검사총장이 실권을 갖게 된 계기가 있다. 1900년대와 1910년대 발생한 일련의 정경유착 사건들이 원동력이 됐다. 내각의 명운에 영향을 줄 만한 사건들이 많아지면서, 검사총장이 내각 일원인 사법대신을 제치고 직접 수사팀을 꾸려 검사들을 지휘·감독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문준영 부산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의 논문 '한국적 검찰제도의 형성'에 이런 대목이 있다.

"1900~1910년대에 일련의 정경유착 사건에서 검사총장이 검찰 수사진을 직접 조직하여 수사를 지휘하고, 때로는 검찰수사 결과에 따라 내각이 붕괴하거나 혹은 검찰과 내각이 정치적 거래를 하게 되는 등 검찰권이 정치적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검사총장은 명실상부한 검찰의 수장이 되었다."
- 내일을여는역사재단이 2009년 발행한 <내일을 여는 역사> 제36호.
 

이처럼 검사총장의 위상이 달라지면서 1920년대 후반부터 사법대신과의 갈등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일선 검사들에 대한 지휘권을 놓고 검사총장이 사법대신에게 도전하는 양상이 나타났다. 이는 '검사총장을 거치지 않으면 사법대신이 검사들을 지휘·감독할 수 없도록 해야 한다'는 입법 논의의 등장으로 이어졌다.

일본 검찰 제도의 영향을 받은 현행 대한민국 검찰청법 제8조는 "법무부 장관은 검찰 사무의 최고 감독자로서 일반적으로 검사를 지휘·감독하고 구체적 사건에 대하여는 검찰총장만을 지휘·감독한다"고 규정한다. 구체적 사건과 관련해서는 법무부 장관이 일선 검사에게 직접 지시할 수 없도록 한 것이다. 이 규정이 생겨난 기원이 바로 1920년대 후반의 일본이다. 이 같은 법적 장치는 일본 검사총장이 사법대신에 맞설 수 있는 무기가 됐다.

검사총장이 사법대신을 견제한 것은 출신의 차이 때문이 아니었다. 사법대신의 지휘·감독권이 강해지면 사법대신을 매개로 내각의 입김이 들어올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총리를 비롯한 내각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검찰을 강화할 목적으로 그렇게 했던 것이다.

이런 흐름 속에서 지나치게 막강해진 검찰 권력을 개혁하려는 노력이 1945년 패망 이후의 일본에서 나타났다. 이른바 '검찰 민주화'라는 이름으로 검찰의 힘을 빼려는 노력이었다. 패전 이전에 나타난 전전(戰前) 검찰의 적폐를 청산하려는 시도였던 것이다.

하지만, 제대로 되지 않았다. 점령국인 미국의 전략적 이해관계에 따라 패망 이전의 지배층이 그대로 온존됐으니 개혁이 철저히 이루어질 리 없었다.

가와사키 히데아키 간세이가쿠인대학 교수는 2006년에 한국 학술지 <공익과 인권> 제3권 제2호에 기고한 '일본 검찰제도의 문제 상황과 개혁 과제'라는 논문에서 "검찰 민주화 이념이 배제하려고 한 전전(戰前) 검찰의 실태, 특히 권력 영합성 그리고 노동·민중 운동에 대한 적대성이 형태를 바꾸면서도 여전히 불식되지 않았다"면서 "검찰 민주화는 현대적 과제"라고 탄식했다. 패망 직후부터 추진된 검찰개혁이 여태까지 '현대적 과제'로 남아 있으니, 이 개혁을 성사시키려면 얼마나 피나는 노력이 드는지 절감케 된다.

식민지 한국에는 총독부만 있었을 뿐 내각이 없었으므로, 사법대신과 검사총장의 갈등이 벌어질 리 없었다. 하지만, 검사들이 총장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 사법대신과 맞서는 검찰문화가 식민지 한국에도 이식됐고, 이것은 미군정기와 1948년 정부 수립을 거쳐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의 갈등은 이처럼 패망 이전의 일본에서 싹튼 현상이다.

문민정부 들어선 후, '검찰권력'이 강해진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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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검찰총장이 7월 25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 대회의실에서 열린 취임식에서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 ⓒ 권우성

 
그런데 그런 검찰 문화가 들어왔는데도, 이승만 때부터 전두환 때까지는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의 갈등이 수면 위로 잘 드러나지 않았다. 일선 검사들이 검찰총장을 중심으로 똘똘 뭉치도록 만드는 문화와 법제가 있었는데도 그랬던 것이다. 이는 그 시절이 권위주의 정권 때여서다. 검찰총장이 법무부 장관에 맞서는 것은 사실상 대통령에 맞서는 것이다. 그 시절 검찰총장들이 그렇게 했다면 어떻게 됐을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 시절에는 법치주의가 무시됐다. 군대나 경찰을 악용하는 집단이 정치적으로 득세할 때였다. 그래서 법률만을 무기로 하는 법원과 검찰은 힘을 쓰기 힘들었다.

그러다가 1987년 6월항쟁으로 권위주의 정권이 약해지고 국민들이 법치주의를 응원하면서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법률에 규정된 그대로 검찰이 권한을 행사할 수 있게 되면서 검찰 권력이 막강해지기 시작했고, 이 흐름의 결과로 2000년대 들어 검찰총장이 법무부 장관에게 노골적으로 맞서는 일도 잦아지고 있다.

이는 법무부 장관과 검찰의 갈등을 배태한 원인이 한국과 일본에서 비슷했음을 보여준다. 일본의 경우에는, 1900년대 초반부터 일련의 정경유착 수사를 계기로 검찰 권력이 비대해진 결과로 그런 갈등이 나타났다. 한국의 경우에는, 6월항쟁 이후의 법치주의 증진 속에서 검찰 권력이 비대해진 결과로 동일한 갈등이 나타나고 있다. 검찰 권력이 너무 강해진 게 공통 원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갈등을 무조건 부정적으로만 볼 수는 없다. 박근혜 정권 때인 2013년에 있었던 황교안 법무부 장관과 채동욱 검찰총장의 갈등이 바로 그런 경우다.

국정원의 대선 여론조작 사건과 관련해 채동욱 총장은 이명박의 심복인 원세훈 전 국정원장을 구속 수사해야 한다는 입장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이것은 국정원 여론조작의 덕을 입은 박근혜 정권을 적으로 돌리는 일이었다. 이에 채동욱 총장이 혼외자식을 뒀다는 <조선일보> 보도가 갑자기 나왔고, 그러자 황교안 법무부 장관이 총장에 대한 감찰을 지시했다. 결국 채동욱 총장은 옷을 벗었다.

채동욱 총장이 승리하지는 못했지만, 이 경우에 나타난 검찰총장과 법무부 장관의 갈등은 국민들이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정통성 부재를 좀 더 명확히 이해하도록 하는 데 도움이 됐다. 한국 사회의 발전에 도움이 될 만한 갈등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의 갈등은 근본적으로 검찰 권력이 너무 비대해진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국가기관 건전화에 기여하는 적정 수준의 갈등은 몰라도, 검찰총장이 정당한 명분 없이 법무부 장관을 위협하는 현상까지 나타난다면 이는 검찰 권력이 지나치게 막강해진 결과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검찰개혁으로 검찰 권력이 합리적으로 조절되면, 이 갈등 역시 적정 수준으로 조정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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