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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오라잍137화

"너 하고 싶은 거 해" 엄마, 사실 그 말이 싫었어요

['김지영'과 나] 죄책감을 갖게 했던 '희생의 아이콘' 엄마에게 쓰는 편지... 저는 좀 다르게 살게요

등록 2019.11.10 11:08수정 2019.11.10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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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82년생 김지영 > 속에서 발견한 저마다의 삶과 사연에 관한 이야기입니다.[편집자말]
*이 글에는 영화 < 82년생 김지영 >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엄마. 그곳에서 잘 지내고 계시나요? 이곳은 이제 제법 바람이 차가워졌답니다. 단풍도 여기 저기 들기 시작했고요.


혹시 소식을 들으셨어요? 영화 < 82년생 김지영 > 소식 말이에요. 몇 해 전 책으로 출간돼 많은 여성들의 공감을 얻어냈던 그 이야기가 이번에 영화로 만들어졌답니다. 얼마 전에 이 영화를 봤는데, 얼마나 엄마 생각이 많이 나던지. 이렇게 보내지 못하는 편지로라도 제 마음을 정리해 보고 싶습니다.

사실은, 그게 싫었어요

엄마, 저는 선명히 기억해요. 엄마가 얼마나 저의 꿈을 응원해주셨는지. 중학교 때부터 키워온 기자의 꿈을 이루기 위해 대학 졸업 후 1년 가까이 취업준비생으로 지냈을 때, 엄마는 단 한 번도 제게 눈치를 주거나 빨리 취업하라고 재촉하지 않았죠. IMF 직후라 그 어느 때보다도 집안의 경제 사정이 좋지 않았는데도 말이죠.

마침내 신문사 합격 통지를 받았던 그날. 정말 뛸 듯이 좋아하시던 엄마의 모습을 저는 잊을 수가 없어요. 몇 년 후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하겠다고 말했을 땐 엄만 기뻐하시면서도 제가 가정에 갇히지 않고 하고픈 일들을 하며 살길 바란다고 하셨죠.

결혼 후 난생처음 살림과 일을 병행했을 때, 교사로 근무하시던 엄마는 방학 때면 저를 위해 '우렁각시'가 되어주셨어요. 복날에 빈집에 오셔서 삼계탕을 끓여 놓고 가시기도 했고, 어느 날엔 우리 집 빨래와 청소를 다 해주고 가셨죠. 제가 하고픈 일에 보다 집중할 수 있도록 돕고 싶은 마음이었음을 이젠 알아요.


제가 뜻한 바 있어 일을 그만두고 대학원에 진학했을 때, 엄만 암투병을 시작했어요. 그리고 전 임신을 했지요. 항암제 투여로 힘들어 하시던 엄만 임신 소식에 힘이 난다 하셨죠.

우연인진 모르겠지만, 그 후 몇 달간은 항암제 효과가 좋았고, 엄마는 다시 일어나실 수 있을 것 같다 하셨어요. 항암제 부작용으로 메스꺼워 하시면서도, 지독한 입덧으로 구토를 달고 살던 저를 위해 음식을 해다 주시고, 몸 상태가 조금이라도 좋은 날엔 집안일까지 해주셨어요.

그런 엄마가 떠나신 건 제 배 속의 아이가 7개월이 되었을 때예요. 갑작스레 나빠진 병세로 하늘나라에 가시기 직전까지, 아픈 당신의 몸보다 남을, 가족들을 더 걱정하셨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근데 엄마 알아요? 전 이런 엄마의 모습이 너무나 싫었어요. 집안의 경제 문제부터 가사와 육아까지 평생 모든 것을 홀로 짊어지셨던 엄마. 제가 설거지라도 할라치면 "이런 건 시집 가서 평생 하는데 지금부터 할 필요 없다. 넌 하고 싶은 공부해" 하며 살림엔 손도 못 대게 하셨던 엄마. 암 투병 중에도 임신한 딸의 살림을 도와주려 했고 아버지 식사를 챙겼던 엄마. 전 그 희생이 정말 지긋지긋하게 느껴졌어요.

희생하는 엄마의 모습을 떠올리면 어느 날은 분노가 치밀고, 또 다른 날은 미안한 마음이 올라와 어쩔 줄 모르고 그랬답니다. 생각해 보면, 죄송한 마음에 더 화를 냈던 것 같아요. 죄책감과 분노는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이기도 하니까요.

엄마가 가까이 계셨다면
 

영화 < 82년생 김지영 >의 친정엄마 미숙(김미경)은 남자형제들의 꿈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채 엄마가 된다. ⓒ 롯데엔터테인먼트

  
그래서인지 영화 < 82년생 김지영 >에서 지영(정유미)이 외할머니로 빙의해 친정엄마인 미숙(김미경)에게 했던 말이 지금도 기억 나요. "엄마가 도와줄게. 너 하고 싶은 거 해"라며 아이를 돌봐주겠다는 미숙에게, 지영은 엄마의 엄마가 되어 "그만 좀 희생하라"고 위로해요. 그 장면에서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눈물과 함께 제 마음 속에선 이런 말이 쏟아져 나왔어요.

"엄마, 이젠 그만 좀 희생하세요. 엄마가 그렇게 희생만 하고 살면, 그런 모습을 마음에 담은 자식들은 미안함과 죄책감에 시달린다고요!"

엄마. 그런데 솔직히 전 친정엄마가 있는 지영이 참 부러웠어요. 한국 사회에서 어린아이가 있는 여성이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고자 했을 때, 진심으로 좋아해줄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친정엄마 말고 또 있을까요?

영화 속 좋은 남편 대현(공유)도 지영이 취직한다고 했을 때 순수하게 기뻐해주지 못하잖아요. 지영이 아이 맡길 곳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할 때도 대현은 지켜보는 게 전부였죠. 물론, 육아휴직을 하고 적극적으로 함께 하는 남편으로 변해가긴 하지만요.

저도 그랬어요. 아이를 낳고, '가끔은 행복하지만 어딘가에 갇힌 것 같은' 기분에 힘들었을 때, 엄마가 곁에 계셨다면 어땠을까 매일 생각했어요. 그 누구의 적극적인 지지도 받지 못한 채 다시 일하기로 결심하고 아이 맡길 곳을 찾아다닐 때, 엄마가 가까이 살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늘 아쉬워했어요.

아이의 하원 시간에 맞춰 종종거리며 퇴근할 때마다 친정엄마의 도움을 받아 여유롭게 일하는 친구들이 부러워서 질투가 나곤 했답니다. 주변에서 "친정엄마에게 애 맡기는 것도 눈치 보이는 일이야"라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엄마가 살아계셨다면' 하는 아쉬움에 눈물을 삼키곤 했어요.

'못된 딸'이 될 수밖에 없는 현실

엄마. 저 참 못됐죠? 엄마가 희생하는 건 미안해서 싫다고 하면서 나 도와주지 않고 먼저 하늘나라에 가신 엄마를 원망하고 있다니. 그런데 엄마. 전 이런 모순되고 양면적인 상황이 바로 지금 이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제 또래의 엄마가 된 여성들이 겪고 있는 현실이라고 생각해요.

1990년대 중반 이후 대학을 다닌, 제 또래의 많은 여성들은 영화 속 지영이나 저처럼 사회에서 당당하게 커리어를 쌓으라고 교육받은 세대예요. 비록 직장 내에 성차별이 만연하긴 하지만, 그런 어려움을 이겨내고라도 자신의 능력을 펼쳐 보이고 싶어 하는 세대죠.

그런데, 결혼하고 맞이한 현실은 너무나 다르다는 거죠. '엄마'가 되는 순간, 사회는 엄마가 아닌 다른 정체감들은 묻어두라고 요구해요. 설령 자신의 일을 계속 하더라도 희생적인 엄마가 되지 못하면 평가절하 되기 일쑤죠.

육아가 여전히 엄마의 전유물로 인식되고 있는 사회에서 '일하고 공부하라'고 배워온 제 또래 엄마들은, 자신의 삶을 지켜내기 위해 또 다른 여성인 친정엄마의 희생에 기댈 수밖에 없는 모순된 처지에 놓여 있는 거죠. 그러니 분노와 죄책감이 함께 생길 수밖에요.
  

"지영아 엄마가 도와줄게. 너 하고픈 거 해" 영화 < 82년생 김지영 >의 한 장면. ⓒ 롯데엔터테인먼트

 
행복한 엄마가 되겠습니다

엄마. 제 생각에 동의하시나요? 저는 다 털어놓고 나니 후련해지는 것 같아요. 그리고 이제는 알 것 같아요. 희생만 하시는 엄마를 보고 느꼈던 분노는 사실은 엄마를 향한 게 아니라 이런 현실을 만들어 낸 세상을 향하는 것이었음을요.

분노의 대상인 가부장 사회의 억압이 너무나 거대하고 뿌리 깊이 박혀 잘 보이지 않기에, 가까이 있는 엄마에게만 투정만 부렸던 것 같아요. 철없는 저의 투정을 다 받아주시고, 딸들의 삶을 지켜주기 위해 평생토록 애써주신 점 이제야 깊이 감사 드립니다.

다짐합니다. 이런 모순적인 상황들을, 양가적이고 힘든 감정들을 제 아이 세대에게는 결코 물려주지 않겠다고요. 그러기 위해서 저는 제 자신의 삶, 엄마가 그토록 희생하면서까지 지켜주고 싶었던 저의 삶을 꼭 지켜낼 거예요. 영화 속 지영이 말했던 '찾아질 듯하지만, 찾아지지 않는 문'을 꼭 찾아내겠습니다.

아이에게 행복하고 당당한 엄마가 되어주겠습니다. 훗날 제가 엄마 곁으로 갔을 때, 제 아이가 미안함에 눈물 흘리기보다 행복한 미소를 지으면서 저를 기억할 수 있도록 말이죠.

"우리 엄만 정말 행복하고 충만하게 사셨어. 나도 그런 삶을 살고 싶어." 아이에게 이런 말을 들을 수 있도록 일상에서 작은 것부터 실천하겠습니다. 습관이 되어 버린 가부장 문화의 소산들이 이런 저를 막아서더라도 결코 갈등을 피하지 않을 거예요.

엄마, 이렇게 제 이야기 들어주셔서 감사해요. 사춘기 시절, 학교에서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엄마와 이야기를 나누고 나면 생각들이 정리되고 날선 감정들이 편안해지곤 했었죠. 꼭 그때 같아요. 엄마에게 털어놓고 나니 한결 마음이 편안해져요. 엄마가 제 곁에서 이야기를 들어주시는 게 느껴진답니다.

늘 저를 지켜주시는 엄마.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필자의 개인블로그(https://blog.naver.com/serene_joo)와 브런치(https://brunch.co.kr/)에도 실립니다.
#82년생 김지영 #친정엄마 #여성 #죄책감 #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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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상담심리사. 심리학, 여성주의, 비거니즘의 시선으로 일상과 문화를 바라봅니다. 모든 생명을 가진 존재들이 '있는 그대로 존중받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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