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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이 엄마 배우 이정은씨의 그 말, 위로가 됩니다

[30대에 알았다면 좋았을 것들] 책이 나오면 달라질 줄 알았는데...

등록 2019.11.09 16:03수정 2019.11.14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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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십 대에 접어드니 지나온 시간이 이제야 제대로 보입니다. 서른과 마흔 사이에서 방황하던 삼십 대의 나에게 들려주고픈, 지나갔지만 늦진 않은 후회입니다.[편집자말]
요즘 되는 일이 없었다. 그럴 때가 있지 않은가. 뭘 해도 사방이 막힌 것 같고,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만 하면 괜찮다'던 삶이 견디기 버겁다고 느껴질 만큼 변주되는 지점. 상황은 그다지 변함이 없는데 내 마음이 변덕을 부려서 그럴 때도 있고, 실제로 일상을 흔드는 무슨 일이 생겨서 그럴 때도 있다.

사십대를 얼마 남겨 두지 않고, 오십이라는 나이는 새로운 무게로 다가오고 있는 중이다. 신체적인 변화도 변화려니와 먹고 사는 문제가 그렇다. 글 쓰는 일로 밥 벌어 먹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진즉에 알고 있었지만 책이라는 걸 내고 보니 다시 한 번 현타가 왔다.


적어도 앞으로 10년은 지금 하고 있는 글 쓰는 일로 밥벌이를 해야 한다는 계획과 바람을 갖고 있었다. 그러려면 최저생계비 정도는 벌어야 하는데, 어찌된 일인지 그조차 못 미치는 때가 있다. 책을 내고 나면 좀 더 나아질까 하는 기대도 있었다. 베스트셀러 작가가 돼서 대박이 나면 좋겠다는 꿈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투잡을 뛰지 않아도 되는 정도만 되어도 좋겠다는 바람이 있었다.

그러나 그조차 얼마나 신기루 같은 소망인지를 깨닫는 데에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이 업계 현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다지 큰 기대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게 막상 현실이 되니, '써서 뭐해, 아무것도 변하는 게 없는데' 하는 생각에 조금 울적해졌다. 소위 말해 슬럼프였다.

책이 나오면 달라질 줄 알았는데

금융기관에서 일하다가 정년퇴직을 한 동네 친한 언니와 점심을 먹다가 아르바이트라도 하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둘이 의기투합해서 제과 프랜차이즈점과 패스트푸드 프랜차이즈점에 아르바이트 지원을 했다. 거짓말 안 하고 15군데 정도 원서를 냈지만 연락이 오는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그러던 차에, 하루는 친구를 만나서 친구가 잘 가는 옷 가게 이야기가 나왔다. 그 가게의 직원이 거의 한 달에 한 번 정도 바뀐다는 거였다. 지금까지 거쳐 간 직원은 대개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 정도. 생각해 보니, 참 기회가 많은 때였다.


지금은 사정이 좀 달라져서 20, 30대도 취업이 어려워졌다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아르바이트건 직장이든 젊을수록 기회가 많은 건 사실이다. 그때는 정말 몰랐다. 나는 그런 거절을 몇 번 당했지만, 언니는 처음이라 멘탈이 붕괴되어 버렸다.

"언니, 나이든 사람에게 세상이 그렇게 친절하지 않더라고요. 그래도 두드리다 보면 열리는 곳이 있지 않을까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 역시 '이만하면 괜찮은 상태'를 벗어나 있었다. 문득 내 모습이 가파른 언덕을 꾸역꾸역 오르고 있는 거북이 같다고 느껴졌다. 아무리 열심히 용을 써도 고작 여기인, 느낌. 드라마 <도깨비>의 은탁이(김고은 역)가 말했던 것처럼 내 인생도 왜 이렇게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지 않는 건지, 내 인생에 봄날은 이제 다시 없는 건가 싶어서 쓸쓸해졌다.

동화 속의 거북이는 그래도 끝까지 완주를 했는데, 과연 승부보다 완주가 더 중요한 걸까. 거북이는 저 멀리 앞서가는 토끼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경주 내내 어떤 내면의 갈등이 있었을까. 완주한 거북이가 얻은 보상은 무엇이었을까. 생각이 꼬리잡기를 했다.
 

<미스터 션샤인>의 함안댁에서 주목받은 그녀는 영화 <기생충> 속 가정부로 연기력을 인정받으며 지금은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 모두 마흔 넘어 일어난 일이다. 사진은 KBS 2TV 그라마 '동백꽃 필 무렵' 한 장면. ⓒ KBS

 
어제는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을 보다가 속 동백이 엄마 이정은씨의 연기를 보며 오열했다. 울고 싶었는데 마침 뺨을 때려 주었다. 그녀도 비혼이라고 하던데 어쩌면 그리도 엄마의 마음과 모습을 잘 표현하는지 그 배우가 궁금해졌다.

내가 이정은씨를 처음으로 인지한 드라마가 <미스터 션샤인>에서의 함안댁이었는데 불과 2년 전이다. 그 전에는 그저 엑스트라 같은 조연 정도인 줄만 알았다. <미스터 션샤인>의 함안댁에서 주목받은 그녀는 영화 <기생충> 속 가정부로 연기력을 인정받으며 지금은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 모두 마흔 넘어 일어난 일이다. 같이 대학에서 공부했던 사람들이 배우로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이제야 꽃을 피운 것이다.

20대 때부터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꾸준히 그 페이스를 유지하며 내가 노력한 만큼 차곡차곡 전진해 나갈 수 있으면 그 이상 좋은 게 없다. 그러나 변수는 늘 있다. 삶은 공식대로 되지 않을 때가 더 많고, 더구나 불가항력적인 파도가 밀려올 땐 뒤로 밀려나갈 수밖에 없다. 도무지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때가 있기 마련이다.

요즘 내 상태가 그랬다. (사실은 그렇지 않겠지만) 남들은 앞으로 순탄하게 잘 가는 것 같은데 나 혼자 뒤처져서 이게 맞게 가고 있는 건지 확신이 들지 않아 길을 잃기도 했다. 세상에 글 잘 쓰는 사람, 똑똑한 사람은 너무나 많은데 거기에 숟가락을 얹기엔 내가 너무나 함량미달처럼 느껴졌다.

글을 잘 쓰지도 못하는 주제에 계속 쓴다는 게 의미가 있을까, 더 늦기 전에 다른 일을 알아봐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마음에 울적해진 요즘이다. 아무도 나에게 더 빨리 가라고, 더 잘해야 한다고 등 떠밀지 않았는데 또 나 혼자 조급해진 탓이다.

그랬던 차에 늦게 핀 꽃은 묘하게 위로가 된다. 배우 이정은씨는 "연기를 못해서 28년 동안 계속할 수 있었다"고 한다. 게임 같으면 한 판 깨면 끝날 것을, 연기는 깨도 깨도 깰 게 너무 많으니까 어깨가 으쓱하다가도 내려오고 앞이 막막하다가도 고개 숙여 보물을 찾을 수 있단 얘기다. 연기를 못해서 계속할 수 있었다니.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인가.

<기생충>으로 주목받은 배우 장혜진씨도 졸업 후 연기를 포기하고 고향 부산으로 내려갔다고 한다. 연기를 해서는 살아가기 힘들다고 생각한 탓이다. 마트 직원으로 일하며 생계형 배우로 살다가 배우로서 뒤늦게 인정받은 장혜진. 그녀가 다시 세상 밖으로 나와 연기를 할 수 있도록 용기를 준 것은 그녀 또래의 늦게 꽃을 피운 동료들, 즉 이정은, 염혜란, 김선영, 라미란 같은 중년 여성 배우들이었다고.

나의 개화 시기는 언제일까

다들 좋아하는 연기를 하기 위해 생계용 일을 해야 했던 시간들이 있었다. 그들은 20, 30대 그런 시간을 지나 마흔 넘어 개화했다. 나의 개화 시기는 언제일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어쩌면 안 올 수도 없다. 그렇다고 '꽃이 안 피어도 괜찮아' 하면서 정신 승리하고 싶진 않다.

내가 원하는 개화란 나의 색깔과 서사와 관점이 살아 있는 글로 인정받는 것. 그리고 그에 대한 보상으로 돈 걱정 안 하고 글 쓰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때까지 나도 꽃을 피우기 위한 시간을 보내야만 한다.

배우 이정은씨에게도 슬럼프가 있었다. 그때 지금은 고인이 된 김영애씨는 작품을 고르는 후배 이정은에게 "너는 경험이 더 있어야 해. 작품을 많이 하라"고 조언했다. 그 조언을 듣고 이정은은 다작 배우가 되었다. 덕분에 슬럼프에서도 벗어나고 지금의 이정은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왕도가 없다. 꽃을 피우고 싶다면 누가 알아주든 아니든 많이 해보고 계속 해보는 수밖에. 늦게 꽃을 피운 이들이 주는 잔잔하지만 힘 있는 위로다. 조급함과 막막함을 잠재워주는.

나라고 별 수 있을까. 내 실력으로는 여전히 깨도 깨도 깰 게 너무 많다. 생계는 여전히 발목을 붙잡는다. 속도도 여전히 거북이다. 그래서 꾸준함으로 늦게 꽃을 피워준 사람들이 고맙다. 그들의 늦은 만개가 경주를 포기하지 않고 더 갈 수 있게 해 주는 용기를 주고 희망이 되기 때문에.
#30대에 알았다면 좋았을 것들 #배우 이정은 #동백꽃 필 무렵 #늦게 피는 꽃 #기생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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