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1.13 08:25최종 업데이트 19.11.13 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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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라밸이라는 건 저희와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에요."

언감생심 그런 생각을 어떻게 하겠느냐는 맥락이 아니다. 그런 단계는 이미 지나갔다는, 아니 처음부터 그와 다른 차원의 고민을 하면서 살아왔다는 말이었다.


지난 주말, 제주도에서 열린 '제이커넥트데이'(J-Connect Day)라는 행사에 참석했다. '로컬 크리에이터'라고 부르는, 전국 각지에서 지역의 자원을 활용하는 방식으로 창업을 했거나, 도시재생, 사회혁신 등 분야에서 일하고 연구하는 사람들 50여 명이 경험을 공유하고 서로 연결할 방법을 찾아보기 위해 모인 자리였다. 

참가자 대부분이 20~30대 청년들인 가운데 그중 예닐곱 명과 둘러앉아 한시간 반 남짓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지역에서 일하려는 청년들에게 좋은 일자리의 의미는?'이라는 주제에 대해서였다.

일과 삶은 구분되지 않는다

서울의 대학에서 그래픽디자인을 전공하고 큰 회사에서 인턴 생활도 했지만 고향에서 살고 싶어서 강릉에 디자인 회사를 차렸다는 여성은 지역에서 필요로 하는, 강릉의 특징을 담는 디자인 작업들을 하고 있다. 그는 "큰 회사에 다니는 것보다 여기서 일하는 것이 나만의 경력과 경쟁력을 쌓는 데 더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부산과 거제도에서 또래 청년들과 도시재생, 커뮤니티를 주제로 다양한 사업을 벌이고 있는 여성은 "우리는 일을 하기 위해 지역에서 사는 게 아니라 '지역에서 살아가기'를 일로 만드는 사람들"이라고 설명했다.

제주도에서 청년 협동조합을 만들어서 일해온 남성은 "제주도에는 이미 일년 중에 몇 달만 일하는 사람, 일주일에 며칠만 일하는 사람, 하루에 몇 시간만 일하는 사람, 직장에서 떨어진 곳에서 '리모트 워크'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전했다. 어떤 관점에서는 불안정 노동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그는 "그런 말로는 정의할 수 없다"면서 "다양한 삶의 방식을 선택한 사람들이 그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일하는 것뿐"이라고 말했다.

이 사람들이 말하는 '내가 지금 하는 일을 선택한 이유', '내가 지금 있는 지역을 선택한 이유' 등을 듣다보니 이야기는 한 방향으로 수렴됐다. '일과 삶은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떻게 살고 싶은지에 대한 생각이 어떤 일을 어떻게 할지, 어디에서 살지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는 의미다.

이것은 소수의 특수한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일까? 그렇지 않다는 증거를 여기저기서 발견할 수 있다.

<TV 손자병법>의 시대, <미생> 이후의 시대
 

지난 1987년부터 1993년까지 방영됐던 TV드라마 . ⓒ KBS-TV


한때 우리는 정장을 입고 지하철을 타고 시내 중심지 큰 건물의 직장에 출근하는 사람들을 가장 멋지다고 생각했다. 언제부터일까? 아마도 <TV 손자병법> 드라마가 인기를 끌던 시절 즈음부터일 것이다. 

1987년부터 6년여 동안 KBS에서 방영됐던 이 드라마는 종합상사를 무대로, 부장 과장 대리 사원 등 구성원들이 겪는 일상을 보여줬다. 그들이 무슨 업무를 하는지는 잘 드러나지 않았다. 그저 '회사'라는 크고 안전한 세계의 질서와 규칙, 인간관계에만 집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로 그려졌다.

그런 이미지는 오랜 시간 우리 사회를 지배했다. 그런 직장에 취업이 잘 되는 학과의 커트라인이 높아지고, 그런 학과에 학생들을 더 보내기 위한 방식으로 공교육이 재편됐다. 기업들은 서울의 종로, 여의도, 강남 등에 높은 건물을 지어서 본사로 삼았고, 이를 중심으로 주택가가 방사형으로 서울 외곽까지 뻗어나갔다. 그리고 통근자를 실어나르기 위한 목적으로 대중교통망이 생겨났다. 그 세계 속에서 일하며 살아가기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지방 소도시나 농어촌에서의 삶, 동네에서 일하는 자영업자나 기술자, 농부, 이런저런 소일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실패자, 패배자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이어질 것 같던 구도는 조금씩 깨져 왔다. 모순적이게도 사람들을 매혹시키던 점들이 거꾸로 사람들을 짓눌렀다. 조직이 커질수록 그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업무에 대한 결정권, 선택권을 가지기 어려워졌다. 매뉴얼대로 일하는 직원들은 쉽게 다른 직원으로 대체될 수 있었다. 아웃소싱업체, 파견업체 인력으로 대체되거나 아예 기계로 대체되기도 했다.

대기업은 지금도 높은 임금과 안정성, 부모님을 만족시켜드릴 수 있다는 점 등으로 볼 때 독보적인 우위를 가진 직장이다. 그러나 청년들의 시각은 좀 다르다. 큰 조직은 신입사원이 기본적 업무 능력을 가지도록 교육해줄 자원과 여력이 있기 때문에, 일단 들어가서 어느 정도 성장한 뒤에 다른 길로 가겠다는 식으로 지원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대기업 신입사원 3명 중 1명이 1년 이내에 퇴사한다는 통계에서도 이 흐름을 엿볼 수 있다.

심지어 공기업, 공무원을 지원하는 청년들에게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듣는다. "경쟁률 높은 시험에 통과했다는 자체가 하나의 '자격'이기 때문에", "일반 기업은 어떤 기준으로 뽑는지 알 수가 없으니 일단은 시험으로만 뽑는 조직에 들어가서 숨을 돌린 다음에 다른 길을 찾으려고" 지원한다는 것이다.

그러고보면 비교적 최근작인 드라마 중에서도 <TV 손자병법>과 같은 업종인 종합상사를 무대로 한 작품이 있었다. 2014년 tvN에서 방영된 <미생>이다. 그 주인공 '장그래'는 신입사원으로 입사해 어느 정도 성장한 뒤에 회사를 그만뒀고, 그 뒤에야 비로소 자신감과 전문성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으로 그려졌다.

아파트 공화국에서 <구해줘! 홈즈>의 의미
 

MBC-TV <구해줘! 홈즈>의 한 장면. ⓒ MBC


직장 밖에서의 삶에 대해서도 같은 흐름이 있었다. 서울 도심 기업에 다니는 사람들은 야근도 잦은데다 서울 외곽이나 수도권 집으로 출퇴근하는 데 길게는 하루 네 시간을 써야 한다. 그러다보니 집에 많은 시간을 들일 수 없다. 그들에게 최적의 주거 공간이 바로 아파트다. 대부분 관리사무소의 서비스로 해결되기 때문에 사는 사람이 크게 손댈 곳도, 시간 들일 일도 없다.

아파트는 그렇게 대한민국 사람이면 누구나 살고 싶어하는 공간으로 자리매김한 것 같지만, 가만히 보면 꼭 그렇지는 않다. '사려면 서울의 아파트를 사라'는 말은 주거 공간으로서의 아파트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되팔 때 손해를 보지 않는, 도리어 돈을 더 벌 수 있는 '투자처'로서의 아파트를 지칭하는 것이다. 승용차도 중고차 시세를 생각해 흰색 검정색만 사는 것처럼, 한국 사람들은 되팔 때를 위해 소유한 기간의 만족도를 희생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

수도권의 아파트를 본따서 지방 도시들마다 수백 수천 세대의 아파트들이 지금도 지어지고 있지만, 주거 공간으로서 아파트의 매력은 상당히 줄어들어 있다.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구해줘! 홈즈'라는 MBC 예능 프로그램이다. 

집 구하는 사람을 대신해서 예능인들이 집을 찾아다니는 이 프로그램에서 패널들의 큰 호응을 얻는 집들은 아파트가 아니다. 특색 있고 오밀조밀한 구조를 가진 집, 옥상과 텃밭, 널찍한 발코니 등 가족들과 느긋한 시간을 함께 보낼 만한 공간들이 있는 집이다. 공방, 카페 등 일터와 함께 있는 집, 바닷가 등 자연 속에 있는 집들도 자주 다뤄진다. 이제 사람들은 판에 박힌 똑같은 집에서, 똑같은 형태로 살고 싶지 않은 것이다.

대체할 수 없는 삶을 찾아가는 사람들
 

자영업자 등 비임금근로자를 포함한 취업자 전체에서 관리자, 전문가, 사무종사자의 비율은 34.1%다. 이 중에서 상용근로자, 5인 이상 조직 종사자를 집계하면 10% 정도일 것으로 추정된다.(통계청, 2019년 8월 기준) ⓒ 황세원

 
이런 흐름을 염두에 두고 최근 한국 사회에서 고용 및 노동과 관련해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워라밸(Work & Life Balance) 증진, 최대 52시간 근로제, 탄력근로제 등 주제들을 다시 보면 아귀가 딱 맞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전히 대기업 체제를 위한 해법이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의 모든 일하는 사람 중에서 몇십 명 정도 규모 이상 기업에서 관리자, 사무직 상용근로자로 일하는 사람은 10%도 채 되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 한계는 더욱 뚜렷하다.
  
물론 노동 조건의 최저선을 조금이라도 높이려는 정책적 노력이라는 점에서 의미는 있다. 이런 점진적인 해법도 "기업 경쟁력이 하락하면 고용은 더 불안정해진다"는 주장 때문에 쉽게 관철되지 못하는 게 현실이기도 하다. 최근 만난 어느 지역 경제인 단체 관계자는 "자꾸 고용의 질을 높인다 하면 기업인들은 한국에서 고용 안 하고 해외로 가버리게 마련이다"라는 익숙한 이야기를 새삼스럽게 다시 했다.

반면, 이번 제주도 행사에서 만난 한 기업 대표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했다. 직원 수는 30여 명으로 많지 않지만 업계에서 상당한 성과를 보여온 건축회사 공동대표인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회사에는 주 3일 또는 4일만 일하는 사람도 있고 하루에 몇 시간만 일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육아로 경력이 단절됐던 직원을 예전 자리로 다시 채용하기도 했어요. 다른 이유가 아니라 그 사람이 꼭 필요해서입니다. 저희 일은 전문성과 경험이 중요하기 때문에 대체할 사람을 찾기 어렵거든요. 꼭 필요한 사람이 육아나 학업 등 사정이 있다 하면 조건을 맞춰주는 수밖에 없지요."

대체하기 어려운 전문가들로 구성됐고 그들이 꼭 필요하기 때문에 근로조건을 유연하게 맞춰주는 기업. 그리고 내국인을 외국인으로, 혹은 사람을 기계로 언제든 대체할 수 있으니 고용의 질을 높일 수 없다는 기업. 둘 중에서 어디가 더 지속가능한 경쟁력을 가졌다고 할 수 있을까? 한국 사회가 중요하게 여겨야 할 기업은 어느 쪽일까?

제주에서 만난 '로컬 크리에이터'들도 대체될 수 없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자기만의 감성과 가치관을 담은 방식의 일과 삶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었다. 아직은 그 수가 많다고 할 수 없고, 한국의 제도와 환경이 적잖은 걸림돌이 되고 있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희망의 싹을 틔우는 사람들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이들의 노력이 커질수록 비정상적일 정도로 수도권에 쏠린 대한민국의 중심축을 바로잡을 수 있다는 점에서도 희망적이다.

이제부터 우리 사회의 지향점을 바꿀 수 있다면 어디로 향해야 할까? 새로운 형태의 일, 결정권과 선택지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질 수 있도록 제도 전반을 손봐야 하지 않을까? 한 걸음씩 차근히 간다면서 이미 지나쳐 버린 길을 되짚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할 때다. 제대로 한 걸음을 떼기 위해서는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부터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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