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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잊힌 '1970년대 N번 시다'들의 이야기

전태일에서 김경숙까지, 여성노동자운동 발자취 '언니Ro' 탐방기

등록 2019.11.14 12:09수정 2019.11.14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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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은 YH무역에서 노조 활동을 하다가 1979년 신민당사 농성 당시 경찰의 강제진압 과정에서 사망한 김경숙 열사의 40주기가 되는 해이다. 서울여성노동자회는 김경숙 열사 40주기를 맞아 그 정신을 기리고 여성노동자운동 발자취를 기억하기 위해 역사 탐방 '언니Ro'를 기획했다.

'언니Ro'는 1960~1980년대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역사가 담긴 노동 현장을 권역별로 나누어 '구로언니Ro', '청계언니Ro', '영등포언니Ro', '금천언니Ro' 등 4코스로 개발되었다. 1970년 분신으로 항거한 전태일 열사, 1979년 경찰의 신민당사 강제진압으로 목숨을 잃은 김경숙 열사를 깊이 추모하며, '청계언니Ro' 탐방기를 소개한다. - 기자 말
 
   

청계천 남쪽의 평화시장에는 10살부터 많게는 16살까지, 평균나이 13세의 어린 여공들이 주요 인력으로 일했다. 이들이 평화시장에서 하루 16~17시간씩 일하고 손에 쥐는 돈은 일당 50원이었다. ⓒ 서울여성노동자회

 
청명한 가을하늘이 예뻤던 10월 19일, 서울여성노동자회 회원과 일반 참가자 20여 명은 아름다운청년 전태일 기념관(청계피복)-평화시장-전태일 재단-이음피움 봉제역사관을 따라 '청계언니Ro'를 걸었다.

전태일기념관에서 1970년대 청계피복노조 교육선전부장을 지낸 이숙희 선생님을 만나 당시 노동환경, 민주노조 결성과 투쟁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청계천 남쪽의 평화시장에는 10살부터 많게는 16살까지, 평균나이 13세의 어린 여공들이 주요 인력으로 일했다. 1960~1970년대 경공업 중심의 경제발전에 박차를 가한 정부는 이들을 산업일꾼이라 추켜세웠으나 합당한 대우는 없었다.  

"휴식 시간을 주지 않아 작업 중 눈치 보며 화장실을 가야 했어요. 다닥다닥 붙은 다이(작업대) 밑으로 기어 나와야 해서 늘 참았다 갔죠. 켜켜이 쌓인 원단이 뿜어내는 먼지는 고스란히 노동자들의 코로, 입으로 들어가 각혈과 폐병을 유발했어요. 회사에 알렸다가는 해고될 게 뻔해 병을 숨기고 일해야 했죠. 우리는 이름도 없이 '1번 시다', '2번 미싱사'로 불렸어요."
  
전시관에 마련된 당시 여성노동자들의 작업공간 '다락방'을 눈으로 확인했다. 허리 한 번 제대로 펼 수 없고 기지개는 엄두도 못 낼 그런 공간이었다. 어린 여성노동자들은 이런 곳에서 하루의 대부분을 보냈다.
 

평화시장 여공들의 다락방을 재현해놓은 곳 ⓒ 서울여성노동자회

 

이들이 평화시장에서 하루 16~17시간씩 일하고 손에 쥐는 돈은 일당 50원이었다. (당시 커피 한 잔이 50원). 회사가 제공하는 부실한 식사로 늘 배고픔에 시달리고, 잠도 부족해 졸다가 미싱바늘에 다치는 것도 부지기수였다. 생리 중임에도 휴식 시간이 없어 화장실조차 제때 가지 못했고, 한쪽 구석에 깡통을 두고 화장실로 삼기도 했다.

"당시 전태일 열사가 여성노동자의 생리휴가를 요구했어요. 상당히 앞선 것이죠. 그때는 재단사가 시다, 미싱사들의 공임을 결정하고 채용에도 영향력을 끼쳤어요. 전태일은 내가 재단사가 되면 부당한 처우를 바꿔볼 수 있겠다 싶어 월급 7천 원 받던 미싱사를 관두고, 훨씬 적은 월급을 받으며 재단 보조로 다시 시작했어요."

그가 이때 알게 된 것이 바로 근로기준법. 전태일은 재단사 10명과 함께 '바보회'를 결성해 평화시장 내 사업장 실태조사를 벌였고 근로기준법 위반사항을 꼼꼼히 기록했다. 이를 들고 근로감독관을 찾아가고 정부, 언론에 호소했으나 누구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

1970년 11월 13일 분신으로 항거한 전태일
    

평화시장 봉제공장의 실태 ⓒ 서울여성노동자회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법으로 보장된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기 위해 그가 마지막으로 선택한 것은 자신을 던지는 것이었다. 23살 노동자가 목숨을 던지고서야 언론은 노동문제를 특집 기사로 다루었다. 대학생과 시민사회, 종교계 등의 추모 집회가 이어졌고 노동자들이 행동에 나섰다. 대표적인 것이 평화시장의 청계피복노조 설립이다. 전태일의 분신 항거를 계기로 그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와 동료들은 청계피복노조를 결성해 투쟁을 벌인다.

"전태일의 죽음을 두고 '평화시장 블랙리스트, 일하기 싫어하던 깡패가 폐병에 걸려 자살했다'는 악의적인 소문이 났어요. 나도 평화시장에서 일하면서 재단사들한테 숱하게 욕설도 듣고 손찌검도 당했으니까 소문을 믿었어요. 그래서 재단사들이 만들었다는 노동조합도 가입하기 싫었는데, 거기서 야간 중학 과정을 진행한다기에 바로 가입했어요. 배우고 싶었거든. 청계피복노조 활동을 하면서 전태일 열사 분신에 대한 진실을 전해 들었죠"

월급을 모아 작은 옷가게 사장님이 되겠다는 꿈을 꾸던 소녀들이 노동조합 활동을 하며 변화된 삶을 시작한다.

오전 9시 출근 오후 8시 퇴근을 요구해 노동시간 단축을 관철하고 퇴근 후 공부, 취미, 모임을 통해 성장을 도모했다. 미싱사가 시다의 월급을 주게 하던 관행을 없애고 '시다 직불제'를 도입했다. 16인 이상 사업장에만 가능하던 퇴직금을 대다수가 소규모 공장이던 평화시장에 맞게 10인 이상 사업체도 주도록 했다.

"이 빨갱이 같은 년들아"

청계피복 여성노조원들은 이러한 모욕과 욕설을 들으면서도 투쟁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들불처럼 일어난 1970년대 민주노조 운동은 이들 여성노동자를 빼고 이야기할 수 없다.

사측과 '짬짜미'하는 어용노조가 판을 치고, 회사의 회유와 협박에 노동조합이 하루아침에 와해되거나 어용노조가 되기도 하던 그 시절, '목숨 걸고' 민주노조 투쟁을 이어간 여성노동자들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YH노동조합 그리고 김경숙
 

전태일기념관에서 청계피복노조 이숙희 선생님의 말씀을 경청 중인 참가자들 ⓒ 서울여성노동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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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Ro map ⓒ 서울여성노동자회

 
작은 가발공장으로 시작해 수출 15위까지 오른 YH무역은 방만한 경영을 일삼다 은행에 큰 빚을 지게 되자 위장폐업을 하고 대량 해고를 단행한다. 이전부터 회사의 근로기준법 위반, 부당해고, 열악한 노동조건에 항의하며 노동조합을 결성해 활동하던 YH무역 여성노동자들은 회사의 위장폐업에 대항해 신민당 당사를 점거하고 농성을 시작했다.
  
농성 3일째인 1979년 8월 11일, 경찰은 신민당사에 진입해 이들을 강제 진압했고 이 과정에서 21살 조합원 김경숙이 사망했다. 당시 신민당 총재가 된 김영삼은 신민당 당사를 찾아온 YH무역 여성노동자들을 보호하며 경찰 병력과 맞섰고, 경찰 연행 과정에서 경숙이 사망하자 원내 철야농성을 진두지휘하는 등 강경 투쟁에 나섰다.

김경숙 노동자의 사망으로 여론이 악화하자 유신정권은 신민당 총재 김영삼을 국회의원에서 제명했다. 이에 반발한 국민들이 부산-마산 시민의 대규모 시위를 벌였고 이내 부마항쟁이 일어났다. 박정희가 부마항쟁 처리 과정에서 갈등을 빚다 총탄에 쓰러지면서 드디어 유신독재가 막을 내렸다. 자본과 독재정권의 폭압에 용감하게 맞선 여성노동자들의 단결된 행동이 역사의 전환점을 가져온 것이다.

언니들은 일찍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 생계부양자로 일했다. 동시에 자신의 노동권을 지키기 위해 노조를 만들고 지도부를 여성으로 선출하고, 어용노조를 민주노조로 정화해 더 나은 노동조건을 쟁취하고, 자본과 국가의 탄압에 맞서 싸운 투쟁의 주체였다.

청계천을 따라 평화시장 전태일 열사 동상 앞으로 이동해 이원아 일하는 여성 아카데미 원장으로부터 당시 노동자들과 함께 야학한 경험을 전해 들었다.

"노동야학이라고 하면 '빨갱이'라 생각할까 봐 '생활 야학'이라는 말로 위장(?)해 노동자들을 모집했어요. 한자어투성인 근로기준법을 한글로 풀어 교재를 만들고 노동자들과 학습했죠."

전투경찰이 학내 상주하던 시절, 야학을 통해 노동자들의 의식을 일깨우고 함께 투쟁한 용기. 대학 졸업장이 곧 취업이던 때에 일신의 안락을 뒤로하고 공장으로 들어갔던 그 뜨거운 마음. 이것이 여성노동자운동을 이어온 것이리라.

마지막 코스인 이음피움 봉제역사관을 둘러보는 것으로 '청계언니Ro'가 마무리되었다. 커피 한 잔씩을 들고 서로 소감을 나누는 여성 참가자들의 얼굴에서 서로에 대한 애틋함과 동지애를 읽은 것이 나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언제나 여성의 이야기는 쉽게 지워져 왔다. 기억하는 이도 없었다. 그래서 우리가 하려고 한다. 언니들이 노동자로 살며 싸우고 많이 지고 끝내 이긴 이야기. 우리가 기억하고 알리자.

언니들이 싸우고, 싸워서 우리에게 준 것에 비해 얼마나 쉬운가. 언니들의 길을 기억하고 알리는 것은.

고마워요. 언니!

[관련기사] 
가발 수출 세계 1위, 20대 여성들이 만든 역사 http://omn.kr/1lif8
 *'언니Ro, 여성노동자운동 발자취를 따라서' 지도 다운로드 https://bit.ly/370SB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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