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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공할 무기 들고 시민들 공격한 계엄군

[김삼웅의 5·18 광주혈사 / 60회] 1980년 5월 27일 0시, 한국현대사의 가장 비극적인 순간이었다!

등록 2019.11.22 17:50수정 2019.11.23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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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18민중항쟁 당시 모습이 담긴 5·18 미공개 영상 중 일부. 계엄군의 무차별 진압으로 희생된 가족을 보내며 오열하는 시민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 광주드림

 
몸짓도 없고
 꽃도 없고
 종소리도 없이
 눈물도 없고
 한숨도 없이
 사나이답게
 너의 옛 동지들
 너의 친척이
 너를 흙에 묻었다
 순난자여,
 흙은 너의 영구대
 꽃도
 십자가도 없는 무덤
 오직 하나의 기도는
 동지여
 복수다, 복수다.
 너를 위해…….

(클로드 모르강, 「꽃도 십자가도 없을 무덤」.


광주민주항쟁 10일째인 5월 27일 화요일, 한국현대사에서 화요일은 '피의 날'이다.

20년 전인 1960년 4월 19일도 화요일이었다. 그날 독재자 이승만의 경찰은 부정선거 다시 하라는 학생ㆍ시민들에게 무차별 발포하여 수십 명의 사망자와 수백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이때 광주에서도 학생 9명이 사망하고 25명이 부상당한 비극의 날이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같은 날 다시 '피의 화요일'이 되었다.

이승만 경찰은 민중의 지팡이 아닌 독재자의 '견(犬)찰'이 되고, 전두환의 계엄군은 국가안보의 파수꾼이 아닌 살인마의 '개(犬)엄군'이 되었다. 그것도 미친 '견찰'이고, '개엄군'이었다. 지구의 자전에 따라 이날에도 어김없이 태양은 떳지만 빛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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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19일 오후 3시께, 계엄군들이 광주 금난로와 충장로로 출동, 전 지역을 들쑤셔대는 모습. ⓒ 5.18기념재단

 
26일의 늦은 밤, 외곽지역의 시민들로부터 도청상황실에 긴급전화가 잇따랐다. 계엄군이 쳐들어온다는 제보였다. 때를 같이하여 도청 행정전화도 끊겼다. 홍보부에서 이 사실을 시민들에게 알려야 한다고 결정하고, 심야에 광주시내 전 지역을 돌면서 마지막 가두방송을 했다.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 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형제자매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숨져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일어나서 계엄군과 끝까지 싸웁시다."

애절한 여자 목소리였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송원전문대 학생 박영순과 목포전문학생 이경희였다. 외신기자의 증언.

나는 한밤중에 잠을 깼다. 무엇이 나를 깨웠는지 지금도 모른다.(…) 그때 갑자기 여자의 목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젊은 여자의 목소리였는데, 몹시 흥분하여 날카로운 느낌을 주었다. 이 아가씨가 앳된 목청으로 소리치는 동안 울려나온 말들은 동일하게 반복되면서 하나의 비명, 하나의 부르짖음이 되어 모르면 몰라도 십여 분간을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여자가 무슨 말을 하고 있지?

"지금이 마지막이다!"

골자는 틀림없이 이것이었다. 거기다 시민들에게 밖으로 나와서 대학생들, 기껏해야 몇 명 안 되는 대학생들과 합류하라고 호소하는 내용이 덧붙혀진 것 아닐까? 그 목소리에 실려 있던 걱정을 그대로 전달할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주석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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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민주화운동기록관일 9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상영회를 통해 공개한 5·18영상기록물. 1980년 5월27일 계엄군의 도청 진압 이후 수습되지 않은 시신들이 찍힌 장면이다. ⓒ 광주드림

 
전남도청에는 죽음을 불사한 150여 명의 학생과 시민군이 머물고 있었다.(기록에 따라 차이가 있음) 그중 80여 명은 군복무를 마친 사람들이고, 60여 명은 군경험이 없는 청년과 고등학생, 나머지 10여 명은 여성이었다. 시민군을 중심으로 전투조가 편성되어 계엄군의 침입에 대비했으나 한말 의병수준을 넘어서기 어려웠다.

같은 시각 YWCA 건물에 시민군 20여 명, 계정국민학교에 30여 명, 유동삼거리에 10여 명, 전일빌딩에 40여 명, 옥상에 LMG 기관총 설치, 전대병원 옥상에 수 미상, LMG 설치, 서방시장에 수 미상, 기타 학동ㆍ학운동ㆍ지원동 등에 30여 명의 시민군 및 자체 예비군 병력이 배치되었다. 이들 역시 도청병력과 다를 바 없는, 한말 의병 수준이었다.

5월 27일 00:00시
계엄군이 행동을 개시한 시각이다.

27일 새벽 계엄군은 가공할 무기를 앞세우고 충정작전을 개시한다.

영용한 시민군은 계엄군에 맞서 목숨을 걸고 끝까지 싸웠으나 뒷담을 넘어 들어온 특공조의 후방공격과 무차별한 사격으로 순식간에 전투력을 상실당하였으며, YWCA를 지키던 사람들도 총 몇 방 쏘아보지 못한 채 진압되고 말았다. 광주항쟁 전 기간을 통해 가장 많은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했다.  

콩 볶는 듯 울리는 총소리에 광주 시민들은 분노와 통곡의 밤을 지새웠다. 동이 틀 무렵 계엄군은 시체와 부상자를 헬기와 트럭에 싣고 어디론가 떠났고, 생존자들은 도청 방화자, 총기소지자, 특수폭도로 분류되어 군부대로 이송되었다.

시민들은 밖으로 나오지 말라는 경고방송 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모자에 흰 띠를 두른 계엄군이 거리를 소독했다. (주석 2)

 

도청에 모인 시민들 ⓒ 5.18기념재단

 
광주시민들이 그토록 평화적인 사태 해결을 바랐음에도 신군부 살인마들은 '가공할 무기'를 앞세우고 도청과 여타 지역에 머물고 있던 시민들에 무차별 살상극을 벌였다.

한국현대사의 가장 비극적인 순간이었다.


주석
1> 헨리 스코트 스톡스(『뉴욕 타임즈』 기자), 「기자 사명과 외교요청의 갈등 속에서」, 『5ㆍ18특파원 리포트』, 43~44쪽.
2> 『광주5월항쟁전집』, 115쪽.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5ㆍ18광주혈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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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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